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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6 | [문화칼럼]
‘숨쉬는 것이 바로 빛입니다’ 「산중일기」
「산중일기」 (2004-01-29 13:51:56)
* 지는 꽃을 보며 그리움입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기다림입니다. 벌써 꽃들은 피어서 꽃씨를 맺고 땅위에 떨어져 흩어지거나 바람에 날려 다음 봄의 기다림을 안고 어디 어느 모를 곳으로 길 떠나 갑니다. 이제 여름과 가을 겨울 비바람과 추위의 긴 나날을 건너야 다시 새짝을 틔울 수 있겠지요. 지는 것은 꽃들만이 아닙니다. 흩어져 떨어지거나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기약없는 길을 떠나는 것은 저 씨앗들만이 아닙니다. 머리 풀은 마음이 먼 산자락을 감고 올라 흩어지는 구름처럼 떠돕니다. 살아있으면 언제인가 만날 날 있겠지요. 기다림이 다하는 날 말입니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저의 목숨, 내가 건너야 할 오랜 강물입니다. * 숨 쉬는 것이 바로 빛입니다. 떠 나와 사는 사람의 일이 다른 이들에게 그리 떳떳한 일은 결코 아닙니다만 마음 아픈 일들은 그래도 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산중의 삶만은 아닐 것입니다. 힘없고 여린 생명들을 밟고 일어서려는 마음을 가진 못된 생명들이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총칼을 휘두르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의 마음이 그러할 것입니다. 하기야 그들에게는 양심이라든가 죄책감이라든가 하는 그런 감정들이 깃들어 올 마음이 있을리 만무합니다만 몇년 전이었지요. 적극적으로 적과의 싸움에 나서지 않는 자는 적대행위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바로 타도해야할 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어떤 후배의 서슬퍼런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아 그때 그말은 얼마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찔러댔는지 모릅니다. 산을 내려가 만나는 그의 눈길도 이제는 그때와는 달리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찌르고 자르는 관념의 비수가 이제는 묵은 대지를 갈고 김을 매는 괭이나 호미의 삶으로 다듬어 졌다고나 할런지요. 그러나 아직도 저의 마음은 산중의 이 안락한 삶이 그들에게 빚을 지고 사는 것이라는 생각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은 얼핏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삶과 삶이 서로 무관하지 않게 얽혀있는 연유로 인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산중의 삶도 세상사와 다름 아니었습니다. 나무와 풀과 햇빛과 물과 바람과 크고 작은 돌멩이와 이 세상 생명다운 생명, 제대로 된 생명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숨이 다 하는 날까지 두고두고 갚아야 할 제가 지고 사는 커다란 빛입니다. 몇겁의 생을 거듭나도 다 갚을 길 없는 참으로 은혜로운 빚입니다. * 술 취한 김에 한마디 벗삼을 일이 없는 것만은 아닙니다만 산중 외딴 삶의 날들에 술이라는 것도 참 고마워 마지않는 벗중의 하나입니다. 묘한 것은 그 술로 인해 저의 마음이 때로 심화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술이라는 것에도 깊은 보살의 공덕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술 한잔에도 들고일어나는 마음이며 그로부터 비롯되어 이어지는 행위가 또한 변화막측 했습니다. 잠재된, 혹은 일어나려는 마음을 상승시켜 준다라고나 할까요. 대상을 바라보는 그 대상을 대하며 일어나는 느낌이나 행위가 각기 사람에 따라서 달리 접근되어 나타나듯이 술 한잔에 투영되어 나타는 일들은 때로 저마다의 삶들을 긴밀하게도 반영시켜 보여줍니다. 그로 미루어 보면 술도 또한 흐르는 물과 같아서 둥근잔에도 네모난 잔에도 제 모습 고집하지 않고 부여집니다. 깨어나서 생각하면 웃고 울고 떠들던 시간이 거참 공허 허망하기도 했지요. 어찌 술 몇잔에 그러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저였습니다. 도덕이라는 허울 아래, 치덕 치덕 분바른 껍질의 허명속에 애써 감춰왔던 보이고 싶지 않던 저의 한 부분이었던 게지요. 술로 인해 세상이 달리 보이고 많은 좋은 인연들 맺었습니다. 술로 인해 가까운 벗들께 약속을 어기거나 마음 아픔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많은 날들이 흘렀습니다. 저에게도 세상의 물욕이며 시기와 질투의 마음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오랜 벗들 있습니다. 만나고 헤어짐이 이미 편안한, 크나큰 반가움도 걷잡을 수 없는 헤어짐의 눈물도 가셔진지 이미 오래. 밤중 홀로 부어 놓고 마주하는 한잔의 술도 그윽한 산행의 길목에서 만나는 솔숲에 한점 불어오는 바람이었습니다. 향기로운 저의 오랜 벗들, 그 숲의 한편에 솟아흐르는 감로의 한모금 샘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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