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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6 | 칼럼·시평 [문화칼럼]
글과 행동의 문제
최 형 시인(2004-01-29 13:51:57)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저마다 직종별 소임이 다르듯이, 어지러운 시대의 참여에 있어서도 저대로의 몫은 있게 마련이다. 이른바 문인의 몫은 글로 일깨우고 글로 저항하는 일임에는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렇게 글을 쓰는 것 자체가 ꡐ행동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글을 발표할 조건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거나, 또는 주어진다 할지라도 글을 통한 호소, 논박, 규탄 등이 무색해질만큼 긴박한 상황에서도 문인은 수긋하게 글만 쓰고 앉아 있어야 옳을 것인가? 해묵은 물음의 되풀이가 되는 셈이지만,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학생과 선생이 아우성치고 있을 때, 노동자나 농민이 본래의 소임을 별수 없이 저버리고 거리에서 절규하고 있을 때, 문인의 자세는 과연 어떠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다.
우리는 흔히 지성이나 양심을 두고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다 저 나름의 시각과 저대로의 기질․사고․판단에 따라서 행동양식 또한 저마다 다르게 마련이라고 한다. 옳은 말이다. 저 나름의 정의와 저대로의 삶이 있고, 또 그렇게 있어야 한다. 천차만별의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한데 저의 마음 속 깊은 자리에서 옳다는 것은 믿으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경우, 그것이 제대로 된 지성이나 양심일까? 하기야 강압 이상의 절망감에서 숨죽인 침묵일수록 어떤 비장한 집단적 합의나 희망적 전기를 맞으면, 오히려 자기를 버릴 만큼 행동으로 달렸음을 우리는 역사로 배운다. 3․1운동, 4․19, 저 5월 6월의 항쟁 등에서 그렇다. 제대로의 지성과 양심은 무슨 이기적 안일이나 비겁에 뿌리하고 있지 않다는 증명이다.
우리는 이런 소리를 흔히 듣게도 된다. 「네 말이 옳기는 옳다. 그러나 세상 만사가 어디 그렇게만 되는 법이냐?」 악이 있으므로 하여 선이 있다는 논리에서, 이른바 양시론과 양비론과도 좀 호흡을 달리하지만, 혈통은 같다. 이들 모두는 정의․진리에 봉사하는 뜨거움과는 먼 거리에서 달관의 자세를 짓는다. 본시 본래의 그 저대로의 몫을 강조한다. 이들 중 더러는 누구보다 순수를 앞세우면서도 실상은 누구보다 잡기에 밝아서 타락적 평온과 향락에 재 미를 붙인다. 이를 위해서 고급스럽게 발언하거나, 점잖게 입다물고 있을 뿐임을 저 자신은 까맣게 모를 만큼 허위 의식이 두꺼운 부류도 세상에는 많다.
한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이비 달관의 지성과 양심이, 그들 자신도 말하는 ꡐ옳지 않은 세력ꡑ그편의 한갓 약용자료만에 그쳐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은 악의 편인 것이다. 모두들 저렇게 가만히 있는데 괜히 무슨 당치도 않은 아우성이냐고, 권력․금력은 더욱 거들먹거리게 마련이다. 이러한 역사 발전의 제동 작용들을 가리켜 우리는 ꡐ반동ꡑ이라 이른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변절과 배신의 경우다. 어떤 영향력이 컸던 만큼 그 변절 배신의 파급 효과 또한 큰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광수나 최남선처럼 민족사의 큰 죄인이 되기도 한다. 이들에게 침묵하는 것도, 과거의 공적만을 두둔해주는 것도 또다른 반동성일 수도 있다. 그리고 글에는 글로써 그 악영향을 줄이는 일은 오직 글 쓰는 사람(학계․언론계․운동권의 이론가를 포함해서)의 몫이라고 할 것이다.
이 글의 논지에는 좀더 군더더기가 덧붙는 셈이지만, 몇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김지하의 ꡐ반전(反轉)돌격ꡑ이다. 확실히 그는 유별난 용기와 패기를 이번에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옛날의 그것이 신선하고 뜨거운 저항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번의 경우에는 병든 적응성에 뿌리하고 있는 것이 본질적으로 달라진 점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자살을 ꡐ장난끼ꡑ어린 ꡐ전염ꡑ으로 바라본 그것부터가 그 자신의 큰 병이요, 어떤 호소나 설득의 심정 따위는 애시당초 쓸어버린 자리에서 질타를 일삼은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긴 이야기는 줄인다. 그는 원래가 &#43088;문학의 돈키호테&#43089;다. 돈키호테적 기백이 그의 발랄한 재기를 고뇌의 진지성없이 크게 부풀려 놓았다. 〈오적(五賊)〉이 우리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도 통쾌하고 대담한 그의 고발이지, 무슨 전통적(민중적)가락이나 그런 담시(발라드)로서의 성취가 대단해서는 결코 아닐 것이다. 문학으로서는 오히려 실패작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감히 놀라운 증언을 했다는 것은 존경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러한 그가 소설 아닌 <대설(大雪)>에서부터 이미 민중,민족 문화과는 한참 멀어진 자리에서 해괴한 유식풍을 불기 시작했었다. 이른바 &#43088;생명철학&#43089;이다. 빗나간 역사 인식과 대세 영합의 타협성도 여기에서 유래되고 있는 셈이지만, 아무튼 그가 그토록 매도한 &#43088;죽음의 굿판&#43089;과 분신 &#43088;자살(쇠파이프 &#43088;피살&#43089;에는 한마디 스치지도 않았다) 그 자살 자체의 결정적 원인인 폭압 세력 편에 참으로 가상할 만한 공현을 했다. 얼마나 우쭐한 쾌재일 것인가? 「이놈들 보아라! 늬들 왕년의 일급 투사도 이젠 우리 편에서 호통치지 않느냐? &#43088;자살 전염병&#43089;에 걸린 &#43088;적군파&#43089;찌꺼기들 같으니라구!」이런 소리가 들린다.
죽음을 무슨 투쟁의 수단으로서만 파악한 그의 문드러진 직관력과 인간적 냉혹성은, 그가 떨쳐온 문명(文名)과는 걸맞지 않게 안이한 문학 정신의 허약성을 반증하고도 남는다. 긴 논박은 다른 지면에 미루겠으나, 그에게 더 한번의 존경스런 변신 반전을 빌어본다.
이 글의 본론에 되돌아가자면 심히 억눌린 상태에서는 &#43088;소리 없는 민중&#43089;이 오히려 깊은 저항일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43088;안다는 사람&#43089;이 침묵을 지키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몰라서 행동하지 못한 것과 알고도 행동하지 않은 것과는 근본이 다르다. 오늘날&#43088;고등 사기한&#43089;의 고도한 기만 정책으로 구조적 비리와 횡포가 웃으면서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양자의 본질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전자가 깨칠 때는 얼마든지 능동적 발전 세력일 수 있는데 반해서 후자는 그저 방관적&#43088;구경꾼&#43089;으로 머물러 있게 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고도 뒷짐만 지고 있는 사람은 앞서 말한대로 악의 편이 되고, 저도 모르게 역행 세력을 키운다.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이 이기적 자기 비하다. 나 하나쯤 빠진들 어떠랴, 나같은 사람이 안해도 역사는 굴러갈 대로 굴러간다. 될 대로 밖에 되지 않고 될 것을 되게 마련이라고 이들은 믿는다. 그래서 헤프게 맞장구를 치거나 내내 침묵할 때, 너나 없이 그럴 때 수레바퀴는 결코 제대로 굴러가주지 않는다는 것도 믿어야 할 것이다. 옳은 소리가 커진 만큼만, 꼭 그만큼만 옳게 굴러가는 법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뉴튼의 &#43088;운동의 법칙&#43089;은 그대로 사회 법칙일 수도 있는 것임이 새삼스럽다. 비록 모래톨만한 &#43088;내 힘&#43089;이라도 보태어질 때, 비로소 큰 &#43088;우리 힘&#43089;이 있게 되어 어떠한 광란의 변칙 작용에도 Rm떡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거슬러오는 파도가 모래톨을 삼킬지라도 모래톨로 이루어진 백사장을 끝내 삼켜버리지는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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