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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6 | 칼럼·시평 [시]
배신의 계절에 읽는 두 편의 시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이종민․편집주간(2004-01-29 13:52:56)

1991년 5월 5일을 죽음이라 부르자.「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가 반동 언론의 지면을 빌어 사이비 생명사상으로 참생명을 죽인 그날을. 그의 「황토」를 통해 우리 민족과 이 땅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되고 그의 「타는 목마름」을 읽고 민주주의에 눈을 뜬 우리들 모두의 염원을 모아 ꡒ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을/못믿는ꡓ그의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ꡓ 「오적」,「똥바다」를 손으로 베껴가며 읽으면서 풍자문학의 힘을, 칼보다 강한 펜의 힘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던, 또 「양심선언」과 「옥중수기」를 남몰래 읽으면서 소박한 울분을 굳건한 변혁의 의지로 키워왔던 우리들 모두의 금방 꺼져버릴 것 같은 소망을 모아 ꡒ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온몸을 흔들어/온몸을 흔들어/거절하자ꡓ고독한 우울증 환자의 넋두리를!!
그가 『대설 남』에서 한도 끝도 없는 장광설로 바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다가 이렇다할 해명의 말도 없이 그것을 중단했을 때, ꡐ신명풀이와 흥겨운 입심에 취하여ꡑ있던 우리들은 차라리 아쉬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또 「애린」의 소를 찾아 나설 때만 해도 현실이 이처럼 급박한데 무슨 도사님같은 짓인가 의아해 하면서도 무엇인가 깊은 심지가 있겠지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또 생명사상을 내세우며 비껴가는 듯한 인상을 줄 때에도 저것이 우리들 변혁운동의 철학적 기반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겠지하며 우리들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지난 2월 갑자기 충격적인 아니면 선정적인 참회의 고백을 신문매체를 통해 하면서 ꡐ고백운동ꡑ을 제안했을 때만 해도 이게 누구를 역성들자는 ꡐ수신제가론ꡑ인가, 왜 느닷없이 루소의 흉내를 내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그의 불굴의 의지와 조금도 무디어지지 않은 붓의 힘발에 조금은 시들해진 우리들 추앙의 불을 다시 지피기 조차 했던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내 탓이오’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이 운동의제창이 인연이 되어 연재하게 된 파격적인 원고료의 회고록(“모로 누운 돌부처”)을 보면서도 우리는 이것이 변절의 징후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지금이 어느 땐데. 또 자기 나이가 얼마나 되었다고 한가롭게 옛날예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연재가 거듭될수록 증폭되기만 하였지만 우리는 오히려 ‘곧 뭔가가 나오겠지요’ 하며 우리보다 더욱 안타까워하는 삽화를 맡은 화가 선생님을 격려했었다.
그러나 5월 5일 이러한 전선이탈의 징후가 엄연한 현실로 나타났을 때 우리는 회한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반동 언론의 교묘한 편집술에 의하여 그 요설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을 지켜보며 뒤늦게 혀를 깨물어야만 했다. 결국 궁지에 몰린 적들에게 가뭄의 단비같은 구원의 손길을 내밀도록 하고 만 것이다. 그의 질타의 충고는 원로제현들의 고답적 충고와 다를게 없다. 숨겨진 원인을 보지 못하고 드러난 현상적 결과만을 문제삼는 것도 그렇고 문제를 개인적 수양의 차원에서 해결하려 한 점도 그렇다. 생명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면서도 그 생명을 구조적으로 압살하려는 조직의 폭력에 대해서는 말없이 아량을 베풀고 있는 것도 그렇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는가하는 식으로 거창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흡사하지만 학생운동을 선진국에서는 이미 시들해진 철지난 유행으로 간주하여 그 파국적 결말을 예견하는 비역사적 안목을 극복하고 있지 못한 점에 있어서도 비슷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기득권자들의 입지만을 강화시켜 준 것까지도, 다른 게 있다면 그는 우리들을 동지라 여기서 ‘벗’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더욱 가증스러운 일이지만), 좀더 자신감에 차있고 수사법이 좀더 현란하다는 것, 그리고 그 배후에 대단히 심오한 사상철학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붓의 힘이 서려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를 더 한다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팬들이 있다는 것!
진즉 알아차렸어야 했다. 구체적 역사를 버리고 관념의 세계로 빠져들어 갈 때, 구조적 모순의 타파 대신 개인적 수양을 통한 구원의 길을 제시할 때. 그것이 기득권자들의 이데올로기 강화를 위해 얼마나 크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그가 ‘반민중적 복음주의’를 주창할 때 우리는 그의 탈선을 예견했어야 했다. 또한 그 스스로가 변혁운동의 주도적 위치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좀더 세심한 배려를 했어야 했다. 개인적 숭배자들이 주위에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어도 그것이 욕심많은 그의 손상된 자존심을 보상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면 좀더 신중하게 대처를 했어야 했다. 개인적 소외감이, 특히 그처럼 자아가 매우 강한 사람에게 있어 얼마나 극단적인 형태의 파행을 유발시키는가를 많이 목격해온 우리로서는 벼랑의 끝으로 몰고가는 일만은 삼갔어야 했다. 그의 남다른 기벽(奇癖 혹은 氣癖)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적어도 극단적인 비판이나 배격은 피했어야 했던 것이다. 아니 가끔씩이라도 관심을 쏟아 주었어야 했다. 중심에 서있지 못한다는 자격지심은,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소외감은, 이를 보상하기 위한 극단적 처방을 요하게 마련이다. 한꺼번에 잃어버린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충격적인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는 이판사판의 몸부림을 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가 한 우울증 환자의 신변에 연연할 수 있을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는 게 우리들의 당당한 변명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의 참작도 어느 정도의 일이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만 한다. 민족문학 작가회의의 제명조처에 대한 그의 반응은 이러한 정상참작 혹은 동정의 여지마저 앗아가버리고 말았다.

「잃어버린 지도자」

민족문학의 여건이 급박한 상황에서 ‘영문도 모르고’ 영문학을 하고 있는 나같은 외국문학 전공자들은 일정하게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이 시는 한때 진보적 자유주의자였던 윌리암 워즈워드가 보수 반동세력과 야합하고 마는 것에 대한 비판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불란서 대혁명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에드먼드 버크를 반박하는 글을 씀으로써 당시 젊은 이상주의자들의 추앙을 받고 있었으며 새로운 혁명적 시론과 그 실천을 통해 낭만시인들의 귀감이 되었던 워즈워드는 나이가 들면서 보수적이 되어 1843년 결국 영국 왕실의 계관시인이 된다. 낭만시인들의 이상주의를 이어받은 로버트 브라우닝이 이런한 변절에 분개하여 쓴 시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심경과 너무도 흡사하다.

오직 한 웅큼의 은화 때문에 그는 우리를 버렸다.
옷깃에 꽂을 훈장 하나를 얻기 위하여-
운명이 우리에게는 주지 않은 하나의 선물〔부귀영화〕을 얻은 대신
운명이 우리에게 헌신하도록 한 모든 다른 선물을 잃었다.
그들은 금화〔金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은전〔銀錢〕만을 주었다.
그토록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토록 조금밖에 주지 않았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구리동전〔銅錢〕을 그를 위해 바쳤던가‥
누더기들이었다- 자주빛이었더라면 그가 마음속으로부터 자랑을 했을텐데.
그렇게도 그를 사랑했고 그를 따랐으며 그를 존경했던 우리는,
그의 온화하고 당당한 안목을 의지하여 살면서
그의 위대한 말을 배웠고 그의 명쾌한 풍모를 본받았다
그를, 우리가 살고 죽을 모범으로 여기며,
셰익스피어가 우리와 더불어 살았고 밀턴이 우리를 위해 있었으며
번즈, 셀리도 우리와 함께 있었다- 그들이 무덤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만이 유독 전위에 대열에서.
- 그만이 홀로 낙오자가 되어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우리는 원기 왕성하게 전진하리라- 그가 함께 해서가 아니다.
노래가 우리를 격려해 줄 것이다- 그의 피리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업적을 남기리라- 그가 무위〔無爲〕를 자랑하며,
모두가 의욕을 북돋우고 있는데 웅크리라고 타이르는 동안,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잃어버린 영혼 하나를 기록하리라.
거절당한 또 하나의 과업과 아무도 밟은 이 없는 또 하나의 길을
또 하나의 악마의 승리와 또 하나의 천사의 슬픔을
인간에 대한 하나의 과오를, 신에 대한 또 하나의 모독을 기록하리라.
인생의 밤은 시작된다. 그가 다시는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기를,
의혹과 주저와 고통도 있으리라.
우리에게는 억지의 칭송이- 황혼의 가물거리는 빛,
그러나 다시는 즐겁고 자신만만한 아침의 햇살을 없으리라.
멋진 싸움은 좋은 것, 우리가 그를 일깨워 주었으니- 용감하게 쳐부수자.
우리가 그를 정복하기 전에 용기를 북돋우자.
그래서 새로운 지식을 터득하여 우리를 기다리게 하자
하늘나라에서, 용서를 받아 하나님 곁 가장 가까운 곳에서.

「투쟁이 헛되다고 말하지 마라」

결국 돌아오지 못할 것인가? 불퇴전의 결의를 다지던 「불 」의 시절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인가? 4월 혁명 이후 “속물들의 저 비웃음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투항한 자신의 벗들에게, “보드라운 젖무덤 멸망의 눈부심으로부터/탄식하는 골목 골목으로부터/넋의 참혹한 마비로부터… 사월의 높고 푸르른 하늘/헐벗은 황야의 부름 속으로 오라”고 외칠 때 그가 지니고 있던 신뢰와 사랑이 우리들 가슴속에 아직 남아 있어 그를 다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끝끝내 자유 천지를 보지 못하고 나 역시 더러운 먹물 시궁창에서 굶주린 개처럼 허덕이다 죽고 말것인가”하는 조바심을 결국 떨쳐 버리지 못할 것인가? 그는 과연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절망과 허무를 배웠는가? 노력의 무위성을 확인했는가? 자신을 그렇게도 탄압하던 군사정권 담당자들이 아직도 권좌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 때문에, 광주학살의 주역들이 지금 이순간에도 권력의 핵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조금도 변한 것 같지 않은 현실에서 워즈워드처럼 무위(無爲)의 철학을 배웠는가?
19세기 중반 영국의 인민헌장운동이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할 때, 또 대륙에서 조차 혁명의 불꽃이 실패로 사그라들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의 많은 지식인들도 무위의 철학에 함몰되어가고 있었다. 운동의 뒷전에 물러앉아 ‘공자님 말씀’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허무주의적 회색인들을 질타하는 이도 있었다. 믿음없이 머뭇거리는 것이 패배의 원인임을 지적하며 전선으로의 전진을 독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음은 그러한 북돋움을 내용으로 하는 아써 휴 클라프의 시이다.
그의 전선이탈을 너무도 가슴아픈 일이다.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손실이 될 뿐만 아니라 적들에게 엄청난 수확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읽으며 진정시키지 못했던 자유와 정의에 대한 염원으로, 그의 고뇌어린 투쟁을 되새기며 키워온 우리들 불굴의 투쟁의지로 「타는 목마름으로」,「녹두꽃」 혹은 「빈산」(이 노래를 특히 잘 부르던, 그와는 다르게 지금도 현장에서 삭발을 한 채 싸우고 있는, 그를 몹시 아끼고 따르는 소리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듯 한데)등의 노래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저리게 느껴야 하는 아쉬움으로, 그를 다시 한번 불러보자. 그가 돌아오리라는 희망이 꼭 있어서가 아니다. 이로 인해 흔들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이다.

투쟁이 헛되다고 말하지 마라
노고와 상처가 허사이고
적은 기운이 빠지거나 약해지지 않았으며
상황이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라고.

희망이 쉽게 믿는 얼간이라면, 공포는 거짓말쟁이일지도 몰라,
아마 저 연막뒤에서는,
그대의 전우들이 지금도 패주자를 추적하고 있을지도 몰라.

지친 파도가, 헛되이 부서지며 애쓸지라도
이곳에서는 한치의 땅도 점령하지 못하는 듯 하지만,
저 내륙에서는, 하구와 후미진 만으로 전진하면서
대양이 조용히 밀려들어고 있지 않은가?

햇살이 들어올 때
빛이 동쪽의 창으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니,
전면에서 태양이 천천히 솟아 오르지만(얼마나 느린가!)
보라, 뒤쪽 서편의 대지는 이미 밝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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