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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6 | 연재 [문화비평]
누군가의 존재를 경계하며
윤덕향 발행인(2004-01-29 14:01:01)

지난 스승의 날, 스승으로 불리기에 부끄러운 내게도 꽃다발이 전해졌고 그날 학생들은 전면적으로 파업을 하였다. 스승의 날이라서 편히 쉬라고 파업을 했는가 보다며 씁쓸히 웃던 동료교수의 모습이 뇌리에 아직도 남아있다. 우리야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지만 스승으로서 귀감이 되시는 분들에게 정부로부터 훈장도 주어지고 표창도 있었다. 그날만은 각급학교의 선생이 선생으로서 가슴 뿌듯함을 느낄수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한편으로 스승의 날이 아닌 요즘 같은 1년 364일은 스승이 아닌 선생이라는 직업인으로서의 나날들인 것같은 속좁은 느낌도 든다. 그런 기분은 군사부일체(軍師父一體)라던 조선시대에 스승의 날이 있었다거나 참된 스승이 많이 있었음직한 그때 국가로부터 훈장이나 표창을 받은 스승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요즘에 들어서 뒤늦게 스승의 날이 달력을 점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무래도 개운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승이 스승으로서 스승답고 제자가 제자로서 제자다울 때 굳이 스승의 날이라는 것이 필요하겠는가? 스승이 스승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하니까 스승의 날을 만들어 그날 하루만이라도 스승답게 모시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우리는 제대로 제자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제자의 날을 만들자는 주장이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같은 허황된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지만…
참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각자의 직분에 맞는 제자리 찾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같은 말이 혹시라도 위정자들의 구미에 맞는 학생은 학교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노동자는 공장에서 자신의 맡은바 일을 열심히 하라는 주장으로 비칠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지금은 각자의 자리를 찾을 때이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노동자는 노동자로서, 정치가는 정치가로서, 경제인은 경제인으로서, 농민은 농민으로서, 언론인은 언론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한가지만 생각을 해보자. 농투성이들은 자조적으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하는 법이라고 하여 자신들의 직분을 천직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농투성이가 농사를 지키기에 앞서 그들에게는 솔잎이 주어지는 솔밭이 있어야 한다. 솔밭에서 솔잎이 나지 않고 금잎이 나면 송충이는 솔잎을 수입해다 먹고 살거나 아니면 그 정든 솔밭을 떠나야 된다. 그러기 싫은 미친 송충이가 되어야 한다. 또 다른 대안이 있는가? 아니 솔밭에서 금잎이 아니고 솔잎이 난다하더라도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없어 처자식이 굶주릴 때도 애비된 송충이는 제 솔밭만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가? 그럴때도 농투성이들은 무던히도 송충이를 자처하며 자식들만은 자신들과 다른 곳으로 보내기 위하여 한 그루 두 그루 소나무를 팔아치우고 이제는 비루먹은 한두 그루의 소나무 밭을 지키고 있다. 그런 농투성이에게 농사를 직분으로 여기라고 말하기 앞서 참으로 있어야할 것은 솔밭에서 금잎이 나지 않도록 하고 자신이 거둔 솔잎으로 등따시고 배부르게 처자식을 먹여살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 있다. 송충이의 터전에서 솔잎이 아닌 금잎이 나게 하고 정든 솔밭에서 떠나도록 등을 미는 누군가 있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옆집 아이가 요즘 저금을 하는 날이면 최소한 3만원 이상을 손에 쥐어주어야 가방을 매고 학교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차피 저금인데 왜 하필 3만원이냐 이왕이면 30만원, 300만원이면 더 좋지 않으랴. 누가 이 아이에게 그런 금액을 저금하게 하였는가? 1주일동안 착한 일을 하고 얻어 돼지저금통에 한잎 두잎 모아둔 몇잎의 푼돈을 저금하는 아이다움을 없앤 것이 아니인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아무리 요즘의 아이들이 영악하다지만 결단코 아니다. 누군가가 배후에 있다. 그 아이의 부모가 아닌 그 누군가가 있다. 부모 역시 배후인물의 또다른 피해자일 뿐이다.
한때 전경들의 방패에 무석무탄(無石無憚), 백인(百忍) 따위의 문구가 쓰여져 있었고 빙그레 웃는 그림도 있어 최루탄과 돌덩이의 공방전속에서도 그나마 한줄기 웃음의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의 방패에서는 민주화의 발전과 때를 맞추듯 그같은 문구나 그림이 어느틈엔지 슬그머니 없어져 버렸다. 시위대의 투석이 없어져서 무석 무탄이란 문구가 무색해진 탓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유석(有石)이더라도 무탄(無憚)이라는 뜻은 더욱 아니다. 혹 무석(無石)이더라도 유탄(有彈)이라는 의미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또 이미 백인(百忍)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 굳이 문자로 나타낼 필요가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조금도 참지 않겠다는 왕성한 공격정신과 적개심의 발로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참을 인(忍)자 3개면 살인도 막을 수 있다는 옛말에 비추어 보면 많이 참을 분비가 되어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것은 정부에 대한 비난이나 체제 도전이 아니라 학내문제로 시위하던 학생을 쇠몽둥이로 때려죽인 것에서 분명하다. 그 학생을 때려죽인 전경은 죽은 학생과 평소에 무슨 깊은 원한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당국자의 말대로라면 지급된 장비이외에 쇠몽둥이를 가진 전경들이 시위를 막다보니 순간적오로 격한 감정에 우발적으로 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쇠몽둥이가 시위해산을 위하여 사용된 것은 불법이고 자신들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당국자들의 말은 언제나 같다. 쇠몽둥이의 사용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며 그런 것은 생각해본 일조차 없다는 수식어가 생략되었을뿐 당국자들의 말은 언제나 같다. 이말 정도는 언제나처럼 빠져서는 안되면 빠질 수도 없고 빠질 것으로 생각해본 일조차 없는 우리네 서민은 버릇처럼 이것도 언론의 의도적인 삭제가 아닌가 의심쩍은 눈길을 보낸다.
어쨌든 당국자들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시위광경의 사진 - 전경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는 사진이나 시위대를 뒤쫓는 전경의 사진 -을 볼 여지가 없는 분들인가 보다. 그 사진에 나오는 전경들이 들고 있는 몽둥이중에 지급된 몽둥이보다 긴 것이 있고, 돌을 주워던지는 전경들이 있다는, 잠시만 눈여겨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을 어찌 그들만 몰랐는지 정말 모르겠다. 전경들, 참으로 불운한 전경들은 역사 앞에 죄인처럼 되어 지금 구속되어 있지만 그들이 살인을 하게된 배후에는 누군가가 있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쇠몽둥이를 보지 못한 척하며 그들이 쇠몽둥이를 쥐도록 만든 누군가가 있다. 전경들이 방패에서 빙그레한 웃음과 문자를 지워버린 누군가가 보이지 않은 곳에 있다. 그 작은 여유를 주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초조한 그 누군가가 있다.
착실하고 점진적으로 민주화가 진행된다는 대명천지, 소련에게 30억불을 빌려주는 경제적 부자나라,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루고 유엔에 가입하려는 세계속의 한국을 이끄는 그들은 왜 초조한가? 전경들의 방패에마저 여유를 남기지 않을 만큼 왜 초조로운가?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기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목줄기에 핏줄을 세우며 외치는 그들이 자신들의 직분을 떠나 언필칭 주인이라는 국민의 뜻을 거슬려가며 왜 저토록 뻗뻗하게 천방지축 날뛰는지 정말 모르겠다. 아름다운 우리 강산에도 백담사만큼 경치좋은 흑담사가 없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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