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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6 | [저널초점]
인간됨과 하나됨을 위해 다시 제사를
윤덕향․발행인 (2004-01-29 14:02:59)
지난 5월초부터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부안 격포에 있는 제사유적을 조사하고 있다. 유적이 있는 곳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채석강과 적벽강이 있는 곳으로 제사유적에 대한 조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유적은 국립전주박물관의 처음 조사대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으며 지역의 문화중심으로서 전주박물관의 활약을 기대한다. 제사유적은 인간이 하늘이나 특정의 대상을 제사지낸 곳이다. 제사는 제사를 받는 대상이 무엇이던 간에 초감각적인 존재에 대한 의식(儀式)이다. 때로 그 대상은 죽은 넋일 수도 있으면 신이 대상일 수도 있다. 신이든 넋이든 우리는 그 존재를 눈으로 본다든가 만질 수가 없으며 다만 그것이 존재한다고 의식(意識)할 뿐이다. 인간이 지상에 나타난 이래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부단히 자연에 적응하고 때로는 자연을 파괴하고 이용하였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농경이나 목축을 시작한 이래 인간은 농사를 지을 땅을 확보하기 위하여 삼림에 불을 지르고 곡식을 심었다. 또 물길을 내기도 하였으며 때로 물을 가두는 뚝을 쌓기도 하였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도전이며 그같은 도전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자연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은 자연앞에서 무력한 존재일 수 밖에 없음을 느끼게 되었으며 자연과 그 자연에 발딛고 살아가는 인간을 주재하는 절대자를 상정하게 되었고 그같은 인식에서 제사는 출발한 것이다. 제사는 따라서 인간이 미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을 표하는 의식이며 그 바탕에는 인간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또 제사라는 의식을 통하여 공동체 성원을 모두가 신앞에서는 똑같은 입장이라는 공감대를 재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최근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자연에 대한 도전과 자연을 극복하는 힘은 자칫 절대자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하여졌다. 그 결과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인간의 손에 의하여 지배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인류가 지상에 나타난 이후 그 오랜 세월 인류의 보금자리였던 자연은 이제 어머니의 자리를 인간의 기술에 넘겨주어야 할 처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존경과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이제는 단지 이용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전락하려 한다. 그리고 그같은 인간들의 시건방은 자연의 적극적인 파괴, 즉 환경의 오염으로 대표될 수 있다. 환경오염을 걱정하는 소리는 여기저기에서 들리고 있으며 각종 환경오염의 지표는 우리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자연을 대신하여 절대자인 양 군림하는 인간들에게 그것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며 나 아닌 다름 사람들의 문제일 뿐이다. 나는 그저 농약에 덜 오염된 식품을 먹을수가 있으면 그만인 것이고 내가 쏟아내는 공해물질은 정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극히 적은 양이다. 힘들여 이룬 기술의 결정체, 냉장고, 합성세제 등을 사용하여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히 누려야되는 행복권이며 이의 제한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일뿐이다. 우리가 마시는 수돗물의 상수원에 어쩌다 낚시를 가서 한줌 오물을 집어 넣는 것은 자유이며 그 물을 그대로 먹을 수 없으면 정수기를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정수기도 믿을 수 없으면 아침저녁으로 배달되는 생수를 먹으면 되는 것이다. 상수원을 깨끗이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은 돈이 없어 정수기도, 생수도 마련할 수 없는 집단들이 알아서 해야할 일이다. 철이른 딸기를 생산하기 위하여, 빛깔좋은 딸기를 만들기 위하여 농약으로 뒤범벅을 하더라도 돈만 벌면 그만이고 내자식, 내 손자의 입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내 손톱밑의 작은 가시가 문제이지 실감할 수도 없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물체가 뇌종양으로,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것은 도무지 문제될 일이 아니다. 절대자인양 건방진 인간에 있어한 때 존경하고 두려워하던 절대자도 현재와 같은 행복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다음 세상에서도 누릴 수 있게 시리 적당히 돈으로 매수해두면 되는 대상일 뿐이며 이는 만약을 대비한 보험일 뿐이다. 끝간데 모를 만큼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이기주의는 지역간, 계층간의 차별만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최근 있었던 아이를 갖고 싶다하여 젖먹이 아이를 훔치는 파렴치의 근거가 된다. 길거리를 폭주하는 오토바이들의 횡포는 단순히 일본 폭주족의 한국판만이 아니다. 일본 폭주족과 같은 가치관의 갈등에서가 아니라 모방과 고립감, 그리고 소영웅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나아닌 남의 안전과 목숨에 대한 경시인 것이다. 이 같은 심리는 폭주족에서만이 아니다. 거리를 주름잡는 대형 화물 자동차들에게 길을 걷는 보행자나 소형차는 도무지 고려할 가치도 없는 목숨들로 보이는 것만 같다. 최소한의 법규조차 지키지 않으려는 그들에게 예의나 법규는 차라리 고급스러운 말장난이다. 그저 나는 죽지 않으니 죽기 싫으면 알아서 비키고 그러기 싫으면 부딪혀보자는 식이다. 이는 비단 화물차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개인 택시 기사가 자신이 고속도로에서 120㎞로 달리는데 자가용 승용차들이 보통 140~150㎞로 자신의 차를 추월하여 운전경력 30년인 자신도 아찔하였노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운전자만이 아니라 자동차까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차들을 본다. 외국영화에서나 봄직한 묘기를 부리는 각종 차량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들의 안전은 어디에도 없다. 환경오염을 막기 위하여, 교통안전을 위하여 이런 저런 방안과 조치들이 마련되고 있다. 심지어 지난 백제기행에서 보았듯 길거리에 경관 허수아비를 세운 곳까지 등장하였다. 그럼에도 약삭빠른 운전자들은 이것을 알고 무시하는 것이다. 상수원 보호를 위한 이런 저런 조치도 페놀방류사건처럼 흘러가고 마는 것이, 화물자동차의 과적 단속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처럼 일시에 빠져나가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를 지키도록 해야하는 측이나 지켜야될 의무가 있는 측 모두가 지킬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바로 내 손톱 밑의 가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몸담은 자연의 존재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날로 더워지는 날씨와 더불어 아니 날이 덥지 않다 하더라도 생활에서의 여유를 찾는 나들이 인파가 증가하는 판에 우리의 산과 바다, 들과 강은 어찌될 것인가? 나들이 길에서 겪는 교통의 막힘은 그렇다하고 짜증을 더해주는 몰염치와 사생결단을 내자는 듯 달려드는 무법차량의 횡포를 어찌할 것인가? 온갖 쓰레기로 뒤덮힌 우리의 산에서 건강한 우리의 삶이 비롯될 수는 없으며 너 죽고 나 살기 식으로 덤비는 각종 차량 속에서 우리의 공동체의식은 공감대를 잃고 표류할 수밖에 없다. 얼마간의 이익을 위하여 상한 음식을 팔고, 얼마간의 편의를 위하여 절간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우리네의 모습에서 절대자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나만이 아니라 남의 생명도 귀한 것이며 자연은 기술로 극복되고 정복될 대상만이 아니라 더불어 살기 위하여 이용하고 보존하여야하는 우리의 터전인 것이다. 전주박물관의 조사가 끝날 즈음에 그 터전에서 조촐하나마 제사를 올려야 될려나 보다, 우리 모두가 자연을 다시 두려워하고 존경 할 수 있게 되기를 빌며. 그리고 그곳에 우리 모두의 인간됨과 하나됨을 확인하기 위한 작은 제단이라도 마련하여야 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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