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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6 | 칼럼·시평 [문화칼럼]
웅치혈전과 천인의 총
황안웅 향토사가(2004-01-29 14:04:07)

호랑이 키워 물린 우환
모든 인간의 일을 관계지어 나누면 옳고 그름과 이롭고 해로움으로 크게 구분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특히 개인간의 다툼이나 나라 사이의 전쟁 역시도 사실 겉으로는 그럴싸한 명분이 앞서기 마련이지만 속으로는 한몫을 취해 보자는 이익추구의 수작일 경우가 거의 십중팔구다.
임진왜란만 보더라도 그렇다. ꡒ명나라를 칠 터이니 길 좀 빌려 달라ꡓ는 왜놈들의 구차스런 명분이요, 실은 어려운 저들의 국내적 상황을 전쟁으로 해결하고 나아가 침략을 통한 약탈, 그것이 그들의 바람이었다.
그래 임진왜란은 삼국 이래로 대륙의 문물을 착실히 받아 전해 일본을 키워준 은인으로서의 조선에 대한 왜놈의 배신, 바로 그것이니 호랑이 키워 물린 우환치고는 큰 우환이 곧 임진왜란이다.
ꡒ물건은 스스로 썩기 시작한 연후에 반드시 벌레가 생기고, 사람은 스스로를 업수히 여긴 뒤라야 남들이 깔보게 된다.ꡓ고 하였다. 그러나 무도한 왜놈만 나무랄 일이 아니라 깊은 반성을 통해보면 동서로 나뉘어 밤낮 정권싸움만 일삼던 그 동서의 틈바구니로 배고픈 왜놈이 새잡이 총을 들고 쳐들어 온 넌센스가 곧 임진왜란이다.
모르면 몰라도 왜 하나같이 모를턱이 있겠는가? 대나무를 쪼개듯 추풍령과 조령을 넘고 탄금대를 친 뒤, 서울을 차지한 왜놈들은 다시 침략의 철저를 기해 대륙병탄의 꿈을 실현코자 하는 전략상의 잔꾀로 이른바 분지지계(分地之計)를 세워 호남침공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즉 남원을 치고 전주를 점령하여 호남을 손아귀에 넣으면 전라감사를 줄테니 물불을 가리지 말고 곧장 싸워 이기기만 하라는 식으로 개인의 공명심과 성취감, 또는 욕구충족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전쟁을 마무리 짓자는 저들의 계획에 분지지계라는 것이다.
무슨 일이나 터무니없이 서두르는 일에는 반드시 어리석은 놈을 앞장 세우는 것이 빠른 법이라, 이 계책에 놀아나 죽고 사는 것을 모르고 눈이 빨게 가지고 대든 무례한 놈이 바로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이였다.
막상 조선에 든 왜놈으로서야 곡창 호남을 차지하는 일이야말로 조선의 어느 한쪽을 차지하는 일보다 전략상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기에 용빼는 재주를 다해서라도 호남을 빨리 차지할 수 있도록 감언이설을 써가며 독려했을 것은 뻔한 노릇이였다.

곰치는 곧 숨구멍
당시 호남 침공이 가능한 루트는 대략 세 코스였다.
첫째 함양에서 팔랑치를 넘어 남원으로 들어오는 코스, 둘째 금산에서 배제를 넘어 고산으로 들어오는 코스, 셋째 거창에서 육십령을 넘어 진안을 거쳐 곧바로 전주를 검거하는 코스, 바로 이 세 코스였다.
겁없는 왜놈들은 애당초 남원을 거쳐 진주를 검거할 계획으로 창원에 있던 왜군의 두목에게 “전라감사”를 자칭토록하여 침공을 명하였다. 그러니 말하자면 이때의 호남 침공은 단순한 침략이 아니라 사실상 “전라감사 부임행사”였다.
그러다 중도에서 의병장 곽재우의 군사에 의해 뜻밖에 진로가 막히자, 놈들은 길을 바꾸어 일단 상주에 머문 다음, 서울에 있던 왜놈 두목 소조천륭경에게 이 사실을 급히 알렸다. 이 소식을 접한 소조는 서울을 떠나 내려오며 청주에서 남하하는 왜군들을 이끌고 들이 닥쳐 무주, 용담, 금산에 분불이를 하고 진안을 분탕질하며 다된 밥 뜸들이 듯 잔뜩 교만을 떨며 발따짐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관군들은 어찌하고 있었던가? 왜놈들이 용담에서 장수로 향하자 조방장 이유의는 군사를 버린채 도망쳐 버렸고, 방어사곽영은 고산으로 물러나 벌벌 떨고 있었으니 전주를 잇는 목구멍과 숨구멍만 막히면 꼼짝없이 호남 전체가 앉아 죽을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처럼 조선발상의 옛 터전, 호남곡창의 중심인 전주가 목조여가는 이 위기일발의 소용돌이 속을 헤치고 마치 사경을 헤매는 어버이께 무명지를 잘라 자신의 피를 바칠 나라의 충신동이는 과연 누구였던가?
역사는 분명히 전하고 있다. 금산군수 권종은 우리의 진중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고 전하지만 당시 진안성주 정식은 어찌했다는 기록이 없고, 오히려 이 풍전등화의 위기속에서 철없는 금산, 용담의 일부 책상들은 저들의 위협에 못이겨 침공에 앞장섰던 이들도 있었다 하며, 실제로 전라감사 이광은 사실상 금구로 도망쳐 버렸다 전해오니 생각건대 “가난한 집구석일수록 현명한 아내를 생각키 마련이고,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훌륭한 인재를 생각게 된다”고 장탄식을 한 우리의 지도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으랴?
오직 의주로 몽진하신 선조대왕께서 읊으신 글귀대로 동서다툼의 틈사이로 스며든 살인귀들의 장난치고는 위험한 장난 앞에 호남마저 부서지려는 판이었다.
이처럼 조선발상의 옛 터전, 호남 곡창의 중심인 전주가 목조여가는 이 위기일발의 소용돌이 속을 헤치고 마치 사경을 헤매는 어버이께 무명지를 잘라 자신의 피를 바칠 나라의 충신동이는 과연 누구였던가?
관산 달 바라보며 통곡할 뿐이요, 압록 물 바람쐬며 마음 상할 뿐이러니 조정의 신하들아 오늘 이후로 동이니 서이니 다시 말할건가?(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 朝臣今日後, 更論西與東)

누가 지켰노?

민족갱생의 터전인 호남수호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명장은 누구였던가?
첫째 무민공 황진(武愍公 黃進)을 꼽아야 하리라.
황공은 이미 임란전에 황윤길을 따라 일본까지 다녀와 국제적 안목을 정확히 갖춘 분으로 왜침을 예견하였다 하며, 당시 동북현감으로 전주수호를 위해 곰치에 진을 치고 저들의 척후를 맞아 싸우던 중, 왜적들이 장차 남원을 치리라는 정보를 듣고 그곳으로 갔다가 다시 곰치에서 혈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황급히 안덕원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미 곰치는 무너졌고, 뻘겋게 달아오른 왜놈들은 이 전갈을 받고 전주침공의 진로를 왜망실로 돌리고 있었다. 이처럼 전라감사(왜놈의)를 곰치에서 잃고 갈팡질팡 왜망실로 모여드는 놈들을 바라본 황공은 마치 한 그물속으로 고깃떼를 몰아 놓듯 몰아 넣어 그야말로 일망타진(一網打盡)해 버린 뒤, 다시 배재로 치달았다.
배재의 싸움은 소조천륭경이 직접 진두지휘해 들어오는 주력부대의 침입,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황공은 중과부적의 세를 고군분투로 이겨내며 치명상을 무릅쓰고 끝내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호남을 잘 지켜 내었다.
그러니 제해권을 한손에 쥐어 섬과의 융통을 막아버린 충무공 이순신을 임진전쟁의 성웅이라 하고, 반도의 식량 창고인 호남을 각방에서 지켜낸 무민공 황진을 임진 7년 전투사상 가장 두드러진 명장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곰치의 꼭대기에서 삼일동안 밤낮을 연이어 침공해 들어오는 왜구를 중과부적의 어려움에서 고박 지켜 내다가 붉은 깃발밑에 백마타고 겁없이 올라오는 적장(왜놈의 가짜 전라감사)을 죽이고 세부득의 상황에서도 부하들에게 의연히 ꡒ차라리 왜놈 하나라도 더 죽이고 죽을 지언정 한 걸음도 물러서서 살 수 없다ꡓ고 호통친 김제군수 정담의 충렬을 꼽지 않을 수 없으리라.
셋째 어느 지방 지켜야 할 특별한 임무도 주어지지 않았던 전만호로서 더구나 상복을 입은 채로 제일 먼저 곰치로 나아가 성을 샇고, 몸소 선봉장이 되어 기꺼히 목숨바쳐 나라를 지킨 의병장 황박을 똑똑히 기억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넷째 늙은 몸으로 아들 형제를 이끌고 이복남이 진을 쳤던 제2진의 옆골짜기에 들어 아비는 정치며 독전하고, 아들 하나는 군량미를 나르며, 다른 아들은 가동과 함께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마쳤던 오봉 김제민 일가족의 충의정신을 꼽지 않을 수 없으리라.
어디 그 뿐인가? 제 2진에서 골짜기를 지켜 많은 왜적을 죽인 나주판관 이복남은 이때의 공로로 당상에 올랐으며 해남현감 변웅정도 잘 싸웠으며 계유정란에 진안으로 숨어든 오매당 김만서의 손자 김수(金粹), 김정(金精)은 왕대밭에 난 왕대처럼 한 몫을 단단히 하였다.
아! 반만년 우리 조국을 누가 지켜왔던가? ꡒ천시는 지리보다 못하고 지리는 인화보다 못하다ꡓ하였으니 의로운 우리네 조상님들의 화합된 단결이 우리 터를 지켜왔다 할것이지만 ꡒ높은 뫼는 명장과 같고 깊은 물은 정병과 같다.ꡓ는 말을 음미해 보면 바로 이 곰치의 성황이 바로 명당자리 아니겠는가?

다시 써야할 여덟글자

여기 호남과 영남을 잇는 옛 길에서도 전주의 숨통처럼 바싹 전주쪽에 붙은 곰치의 정상에 하나의 큰 돌무덤이 사백년 비바람을 견디며 처연한 모습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뉘라서 임진7년의 전쟁을 참혹하고도 비참하다 하였노? 이제 모두 다 잊어버린 옛일이 아니련가? 봄풀은 해마다 푸르려니와 나라위해 목숨바친 의로운 혼백들은 너와 나를 막론하고 이 곰치의 이쪽과 저쪽 잡목 사이에 벗겨진 무덤으로 나둥글어져 있다.
일장공성만골고(一將攻成萬骨枯)라는 문자는 침략적 야욕에 혈안이 되었던 왜장 무덤에 맞는 말이라면 그야말로 아무런 공명심도 없이 나라위해 목숨바친 조선국의 무명용사들에 어울리는 문자는 과연 무엇일고?
<징비록〉권1에 왈;

왜적은 돌아가다 웅령에 이르러 전사한 이들의 시체를 모두 모아 길가에 묻어 몇 개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무를 그 무덤위에 세우고 쓰기를 「조선국의 충간의담을 조상한다」고 하였다. 이는 대개 그들 조차도 힘써 싸운 일을 칭찬한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전라도 한도만은 유독 보전되었다.
자, 그럼 뻔하지 아니한가? 돌보는 이 없었던 이 외로운 혼백을 모신 천인의총에 초혼례와 면례를 올리고 저 무도한 왜적들마저 우리의 충의에 감복하여 모처럼 되찾은 양심으로 저들이 썼던 문자 그대로 [吊朝鮮國 忠○義○ ] 이렇게 8글자를 크게 써서 비문으로 후세에 남기면 어떠랴?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요, 이긴 자 중에서도 힘있는 이들의 기록이었던 것은 어제와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역사는 이긴이들의 그늘에 가린 패자들의 진실도 올바르게 밝혀져야 하리라.
이런 점에서[吊朝鮮國 忠○義○]이라는 여덟글자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다시 저 웅치의 옛 전쟁터에 새롭게 큰 글자로 새겨져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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