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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6 | 연재 [세대횡단 문화읽기]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맑시즘적 입장에서』④제 1장 포스트모디니즘의 지적부당성(3)4. 차이의 철폐
이종민 ;전북대 교수, 영문학(2004-01-29 14:06:43)

앞서의 논의에서 살펴본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기 위한 다양한 주장들이 주는 지배적인 인상은 그것들이 상호모순적이라는 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발전의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 상응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리오따르)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다시 리오따르). 포스트모던 예술을 모더니즘의 연속으로 간주하기도 하고(리오따르)모더니즘과의 단절로 간주하기도 한다.(젱크스). 제임슨은 조이스를 모더니스트라고 하는 반면 리오따르는 그를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적 혁명에 등을 돌렸다고 주장하면서도 브르똥과 벤야민과 같은 혁명적 예술의 실현자나 그 옹호자를 그 선구자로 추켜세우기도 한다. 그래서 커모드가 포스트모더니즘을 ꡐ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과거를 조망하려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또 다른 하나의 시대상황 묘사ꡑ라고 지칭하는 것이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처럼 다양한-상호모순적일 뿐만 아니라 종종 내적으로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기도 한-모든 설명을 관통하고 있는 생각은 최근의 미학적 변화( 그 성격이 어떻게 규정되든)가 좀 더 광범위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의 즉 서구문명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변화의, 징후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붐이 절정에 이르기 직전에 다니엘 벨은 서구 지식인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ꡐ종말의식ꡑ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것은 ꡐ우리가 진입하고 있는 시대를 정의하기 위하여 합성어의 형태로 포스트라는 단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점에 의해 상징적으로 나타난다.ꡑ는 것이다. 그가 들고 있는 예는 다음과 같다; 포스트자본주의,포스트부르조아,포스트모던,포스트문명화,포스트집단주의,포스트청교주의,포스트르로테스탄느.포스트크리스챤,포스트문학,포스트전통,포스트여가,포스트시장사회,포스트조직사회,포스트경제,포스트결핍,포스트복지,포스트자유주의,포스트산업주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있어 결정적인 단절은 계몽주의와의 단절인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계몽주의가 모더니즘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때때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주장을 낳기도 한다: ꡐ철학에 있어 모더니즘은, 현재 널리 유행하는 것과 새로운 혹은 혁신적인 것이라는 모더니즘적 개념을 도입한 베이컨, 갈리레오, 데카르트에게까지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ꡑ이는 거의 경탄을 불러일으킬 만금 무식한 진술이다. 대상의 감각적 특성이 이성적으로 확인 가능한 내적 구조의 표시라고 믿는 (로크에 의해 가장 완전하게 구체화한)재현적 인식론에 입각해 있는 사상가들을,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불가능하며 바람직스럽지도 않다는 신념하에서 상식적인 기대를 맹박하고 있는 예술운동과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주장의 요점은 사소한 그 사실적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다.차라리 그것은 이러한 주장이 모더니즘을 서구 합리주의의 가장 최근의 예로 취급함으로써 포스트 모더니즘-보통 모더니즘에서 빌어온 용어로써 그 성격이 규명되는데-의 새로움을 부각시키려는 시도라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계몽주의와의 결별을 묵시록적인 용어로 파악하려는 경샹을 수반한다. 그래서 그것은 천년은 아닐지라도 수세기동안 지속된 서구문명에 내재해 있는 근본적인 결함에 대한 드러냄(계시)이 되는 것이다. 이런류의 사고방식 중 가장 어리석은 예가 크로커와 쿡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ꡐ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서구경험의 심층적 구조적 양식에 있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ꡑ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은 ꡐ그것이 탄생한 그 순간부터, 또 내부에서부터 근대적 구도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제공해 주며’, 단순히 ‘근대적 구도’가 아니라 ‘포스트모던적 장면이 4세기부터 전개되기 시작하고…아우구스티누그스의 거절 이후 서구문명 자체가 수동적이며 자멸적인 허무주의의 징후를 보임에 따라 모든 것이 환상적이며 소름끼치는 경험의 내파(內波)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구체화했다고 여겨지던 묵시록적 ‘종말의식’은 어떤 역사적 특이성을 상실하게 되고 로마멸망 이후의 서구문명에 있어 만성적인 여건이 되어 버린다. 여기에 헤겔이 셀링을 비판하면서 언급한 밤(어둠)-그 안에서는 모든 암소가 검은 것이 되어버리는-이 있게 되며 이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맑스, 니체, 파슨스, 푸코, 바르트 그리고 보들레르도 모두 동일한 ‘포스트모던장면’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크로커와 쿡의 공허한 응접실 허무주의는 사실 귀류법(reductioadabsurdum)적 사고방식의일례로 이에는 더 유명한 선배들이 있다. 니체와 하이데거도 서구 형이상학을 전역사를 통해 편재하는 구조적 본질적 오류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플라톤의 환원이나 본질과 존재 사이의 본래적인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소크라테스 이전시대의 망각이 그 예라는 것이다. 그 이후 유럽의 사상사는 이러한 근원적 오류의 변형 혹은 그것의 정교이며, 이것은 데카르트의 자조적 주관성의 철학에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되고 그 결과 근대의 특징인 자연과 인간에 대한 합리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하버마스는, 그들의 후계자-특히 푸코와 데리다-는 물론 니체와 하이데거가 이성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기 위해 합리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철학적 논의나 역사적 분석에 있어-직면하게 된 모순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점의논의에 있어 더 적절한 것은 오류에 근거해 있는 것으로서 서구문명 전체를 전반적으로 각하시키는 것이 어떻게 역사적 차이를 이러한 원죄의 반복으로 해소시키려는 시도를 고무시키는가의 방법에 주목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스스로 차이의 철학자라 자처하던 사람들을 당황케 했던 니체-하이데거 전통의이런 경향은 한스 블루멘베르크로부터 가장 심한 비판을 받게 된다. 그의 특별한 관심은 ‘세속화의 테제(secularization thesis)’ 즉 근대의 믿음, 제도, 관습 등을 기독교적 모티프의 세속적 변형으로 간주하는 것에 주어지는데, 특히 그가 주목했던 칼 뢰비트에 의해 정교화한 이론에 의하면 역사진보에 대한 계몽주의적 개념이 섭리에 관한 기독교적 관념을 유사과학적 용어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블루멘베르크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뢰비트에게 있어 근대성을 야기시킨 기독교의 세속화’는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전개로 파악하면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수행한 ‘고대 이교도적 우주로부터의 이탈’(이것은 시간에 대한 순화론적 개념의 거부와 더불어 진행되는데)과 비교해볼 때 덜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근대사상의 독특한 특징과 그것이 기독교 신학과 관련하여 보여주는 질적인 단절을 증명하면서 블루메넵르크가 과시하고 있는 역사적 지식의 풍성함을 정당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이러한 단절의 기원을 중세 후기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 대한 유명론자(唯名論者)들의 비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게되는데, 이들은 특히 물질세계로부터 어떤 신성한 목적의 징후도 배제하였으며 그것을 단순히 신의 의지행사의 우연스러운 결과로 돌려버렸던 것이다. 이 유명론자들이 ‘숨은 신(hidden God-deus absconditus)’의 절대적인 완결성과 힘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된 신적 질서에 대한 세소적 징후의 부인은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했는데, 블루멘베르크가 독특하게 근대적인 태도라 일컬은 ‘주제넘음(self-assertion)'의 형태를 취하게 하는 공간의 창출이 바로 그것이다: ‘자연이 인간과 관련하여 더욱 무관심하고 무정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인간에 대한 무관심의 문제는 덜 부각되고 인간은 완벽한 장악을 위해 좀더 무정하게 자신에게 미리 주어진 자연을 물질화해야 한다.’ 자연은 더 이상, 중세의 스콜라철학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받은 ‘축복받은 방관자(bissful onlooker)’에 의해 관조되는 목적들의 위계질서가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인간은 신이 죽은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유명론자들의 ‘주장은 세상에 대한 부단한 검토와 평가를 유발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과학시대의 원동력으로 지칭되는 것이다.’ 호기심은 기독교 신학에서처럼 사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갈릴레이 과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자연에 대한 방법론적 간섭에 있어 체계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세상을 유한하고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질서로 간주하는 스콜라철학에서의 세상에 대한 개념은 ‘열린 문맥의현실개념’으로 대치되는 데 이러한 개념이 ‘항상 실현의 불완전한 결과로서의,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구성함으로써 신빙성을 획득하는 것으로서의, 또 결코 명확하거나 절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일관성을 견지하지 못하는 것으로서의, 현실 개념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열려있고 불완전한 것으로서의 현실에 대한 개념은, 다시 진보에 대한 계몽주의적 개념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진보개념은 기독교의 종말론과는 다르게 ‘이질적인 것으로서 역사를 초월하여…역사에 갑자기 뛰어드는 사건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에 존재하는 구조로부터 역사안에 내재하는 미래로 외삽(外揷)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보의 사상’은… 현재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미래라는 수단에 의하여, 현재가 스스로와 비교하는 과거의 앞에서, 진행하는 끊임없는 자기정당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블루멘베르크는 니체에 의해 제기되고 하이데거가 지속시킨 사고체계에 대하여 풍성하고 강력한 비파능 제공해준다. 뢰비트의 세속화 테제에 의하면 이러한 사고체계내에서 ‘사물은 유럽의 역사에 대한 기독교의 개입(유럽의 역사를 통한 세계 역사에의 개입)으로 인해 만들어진 상태 그대로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하여 기독교 이후의 무신론 조차도 실제로는 부정적 신학에 대한 기독교 내부의 한 표출양식으로 간주되며 유물론도 다른 수단에 의한 신자성육(神子成育)의 지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블루멘베르크가 모더니티의 독특한 특성에 골몰한 것 역시 이 전제 장(章)에 함축되어 있던 의문을 강조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다양한 스스로의 성격구정에 있어 모더니스트 예술, 보다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이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모던 시대’와 대조하여 스스로를 정의한다. 이장(章)의 주요 요지는 소극적인 것으로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포스트모던 예술에 부여하는 무게와 그 독특한 자질을 설득력있게 또 일관성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당연하게도 모더니티의 성격과 그것의 비판적 반영이라 여겨지는 모더니스트 예술에 대한 적극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제2장에서 이러한 요구에 응하게 될텐데 이 장에서 비판적으로 개관한 포스트모더니스트 이론들과는 다르게, 검토되는 현상에 대하여 그 고유한 역사적 맥락에 따라 정당한 평가를 해나갈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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