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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7 | [정철성의 책꽂이]
배짱이의 유혹을 뿌리칠 자신이 있는가 「이솝우화」
김학․KBS 군산방송국 방송부장 ․ 수필가 (2004-01-29 14:15:07)
때때로 이솝우화를 읽는다. 마음이 산란할 때도 이솝우화를 읽고, 한가로울 때도 이솝우화를 읽는다. 글을 쓰다가 막힐 때도 이솝우화를 읽고, 가족이나 직장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도 이솝우화를 읽는다. 이솝우화는 내용이 간결하고 유머러스하여 읽는데 부담이 없어 좋다. 한 편을 읽고 책을 덮어도 되고, 열 편을 읽어도 지루하지가 않아 좋다. 같은 내용을 두 번 세 번 읽어도 새로운 맛을 느끼며, 인생을 꾸려가는데 도움이 될 진리를 깨닫게 된다. 내가 즐겨 인용하는 이솝우화중에는 「어리석은 당나귀」와 「개미와 베짱이」가 있다. 당나귀가 등에 금불상(金佛像)을 싣고 걸어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금불상을 향하여 경배를 드렸다. 그러자 당나귀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경배하는 것으로 착각을 했다. 어리석은 당나귀는 우쭐대며 심통을 부리게 되었고, 그 결과 주인으로부터 심한 꾸지람를 듣는다. 「야, 이 어리석은 당나귀야, 네등에 실린 금불상에게 경배를 드리는 것이지 너같은 당나귀에게 경배를 드릴 사람이 어디 있겠니?」 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따금 이 우화를 떠올리며 나의 자세를 바로잡는다.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할 금불상인 줄 모르고 으시대던 당나귀의 어리석음을 나도 범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반성하며 산다. 아무리 높은 벼슬이라 하여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그 벼슬이라는 금불상을 벗어버린 뒤에도 만인의 경배를 받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성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 벼슬만을 방패삼아 우쭐대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어리석은 당나귀 꼴이 되고 말 것은 뻔한 일이다. 벼슬이 높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쥐꼬리만한 힘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이 음미해 볼만한 교훈일 듯하다. 같은 시냇물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듯이 모든 순간은 모두 최후라는 신념으로 빈 마음이 되어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하리라 믿는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안다. 부지런한 개미는 여름내 땡볕 아래서 일을 하는데 베짱이는 시원한 그늘에서 깡깡이를 켜며, 놀고 먹는다. 그러다가, 눈보라치는 겨울이 되자 베짱이는 개미를 찾아가 구걸을 한다. 영국의 문명비평가 미아크스는 여기에다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현대사회의 가치관을 풍자했다. 아버지 개미가 베짱이의 애원을 외면하고 돌아서자 아들딸 개미들이 들고 일어선다. 「아빠, 집에는 먹을 것도 남고, 또 깡깡이 소리도 듣고 싶으니 베짱이를 들어오라고 하시는 게 어때요?」 개미 가정의 식객이 된 베짱이는 추위와 굵주림에서 벗어나 개미 가족과 잘 어울리게 된다. 개미자녀들이 희망곡을 신청하면 깡깡이를 켜준다. 베짱이는 개미집창고에서 오래 된 곡물이 발효하여 술이 돼 있는 것을 발견한다. 베짱이는 개미 자녀들에게 이상한 액체를 먹도록 유혹한다. 술과 음악이 있으면 의당 춤이 따르기 마련, 일하는 것보다는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는 게 즐겁고 신날 수밖에. 이렇게 한 겨울을 보내다보니 개미 가족에게서 전통정신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봄이 되었는데도 개미 자녀들은 일터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 개미가 아무리 근로의 가치를 타일러도 소귀에 경읽기 식이다. 아버지 개미는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실추된 것을 비관한 나머지 술을 퍼마시며 폐인이 되고 만다. 이리하여 화려 하던 개미 문화권은 붕괴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요즘 신문 사회면을 펼쳐들면 이 우화가 떠오른다. 부모의 교화력(敎化力)을 상실한 아버지 개미의 탄식이 귀에 잡히는 성싶다. 백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온 강토는 초토화되었으며, 산업시설이 온통 파괴된 처절한 6․25의 상채기를 딛고 일어서서, 오늘을 이룩한 부모세대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이 땅의 자녀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무섭도록 변해버린 가치관의 혼돈이 가슴을 짓누른다. 나는, 아니 우리는 베짱이의 유혹을 뿌리칠 자신이 있는가를 점검해 볼 일이다.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 해도 교화력이 살아있는 민족이나 문화권은 멸망한 적이 없었다는 토인비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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