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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7 | [문화저널]
먼 길에서 띄운 배
박남준․시인 (2004-01-29 14:15:51)
부는 바람처럼 길을 떠났습니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 닿을 수 없는 사랑때문도 더욱 아닙니다. 그 길의 길목에서 이런 저런 만남의 인연들 맺기도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끝에서 발 길 돌리며 눈시울 붉히던 낮밤이 있었습니다. 그 길가에 하얀눈 나리고 궂은 비 뿌렸습니다. 산 넘고 들을 지났습니다. 날 저물면 저 마다의 집으로 돌아가는 굴뚝새들 보며 하나 둘 불 걸어 밝히는 별들의 하늘 우러렀습니다. 산다는 것이 때로 갈 곳 없이 떠도는 막막한 일이 되었습니다.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오래도록 그 강가에 머물렀습니다. 이 강도 바다로 이어지겠지요. 강물로 흐를 수 없는지…… 오늘도 새벽 강에 나갔습니다. 그 강엔 자욱히 물안개가 일었습니다. 이제 닻을 풀겠어요 어디 둘 길 없는 마음으로 빈 배 하나 띄웠어요 숨이 다 하는 날까지 가슴의 큰 병 떠 날리야 있겠어요 제 마음 실어 띄울 수 없었어요 민들레 꽃씨처럼 풀풀이 흘어져 띄워보낼 마음하나 남아있지 않았어요 흘러 가겠지요 이미 저는 잊혀진 게지요 아 저의 발길은 내일도 배를 띄운 강가로 이어질 것이어요 오랜 길끝에서 돌아와 집을 찾았습니다. 뜨락엔 발길 닿지 않아 무성한 쑥대밭, 잡초더미로 우거졌습니다. 하얀 망초꽃들 햇살을 받으며 투명하게 빛을 뿜어내었습니다. 뻐꾹새 쪽박새 소쩍새 산중엔 새들의 푸르른 초여름의 노래로 가득했습니다. 오랜 노정의 노독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헤세의 소설 “나르찌스와 골드문트”가 떠올랐습니다. 아! 나르찌스 먼 하늘 바라봅니다. 뿌리없이 떠도는 것들, 뭉게구름에 실려오는 그리운 얼굴들…… 눅눅한 습기들의 빈방에 누웠습니다. 첫날 밤 족두리 쓴 그대로, 꿀물 발라 살몃 내리 감은 두눈 그대로, 연지곤지 찍은 새색시 모습 그대로 초록 재와 다홍재로 스러져 사위어 갔다는 옛날 이야기가, 서럽고도 슬퍼 가슴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당신과의 만남이 첫 만남이어서가 아닙니다. 당신과의 이별이 첫 이별이어서가 아닙니다. 빈방에 눅눅한 적막이 흐르고 꿈도 없이 무릎 꿇었습니다 빈방가득 바람불고 눈물 같은 비 젖어 옵니다 뚝 뚝 감꽃이 지는 밤 호랑지빠귀 소리가 아득해져 갔습니다 이제 사위어 질지요 타고 남은 재로 다 타고 남은 재로 긴 잠을 잤습니다. 오랜 잠을 잤습니다. 바다에 이르렀습니다. 붉은 일몰로 노을 지는 바다, 이제 막 탯줄을 자르고 한 아이가 태어 났습니다. 고해의 바다, 수 겁의 윤회를 건너온 그 바닷가에 이제 또 사람의 업을 받은 그 아이도 하나의 생명으로 자랄 것입니다. 세상 속으로 흐를 것입니다. 아이는 자라나 바다에 나갔습니다. 다 비워진 그릇이 다시 가득 차듯이 들고 나는 밀물과 썰물의 바다를 보았습니다. 빈배를 풀어 띄웠습니다. 썰물을 따라 흘러갔다 밀물로 함께 밀려왔습니다. 굴을 따고 조개를 주웠습니다. 아침 꽃을 보며 미소 지었습니다. 지는 노을 보며 기다림을 배웠습니다. 해와 달과 밤하늘에 제일 먼저 뜨는 샛별도 알았습니다. 대지의 어머니가 그들의 고요한 정기를 받아 세상의 무릇 생명있는 것들을 키우며 살아 숨쉬게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아이는 길을 떠났습니다. 갈 곳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끊임없이 떠나가는 길의 나그네였습니다. 먼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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