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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7 | 연재 [문화저널]
소나무에 관한 몇가지 단상
박남준․편집위원(2004-01-29 14:43:55)


1991년 6월 19일 오전 9시 50분 전주 시청 옆 칙칙하고 검붉은 타일이 건물의 외양을 치장하고 있는 삼성생명 건물앞에는 이제 막 푸른 움이 트기 시작하는 조선 소나무가 토막토막 잘리며 그 뿌리채 뽑혀져 있었다. 흰 와이셔츠 차림의 몇 사람이 삽과 톱을 들고 주변을 서성거리며 손을 텉고 있었다.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내가 언제인가 모악산의 한 산자락 중턱에 자리잡은 문수암이라는 조그만 암자를 갔다가 살길을 내려 올 때였다. 외딴 집, 울창한 나무숲에 둘러 쌓인 집두칸의 외딴 집에는 할머니 한분이 살고 계셨다. 마당 앞으로는 모악산의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솔잎으로 불을 지피며 밥을 짓는 저녁연기, 산자락에 비스듬히 걸리며 밀려오는 땅거미의 풍경, 나는 갑자기 먼 어린 날 어머니의 그 포근하던 젖무덤이 그리웠다. 저 방 한칸을 얻어 살았으면...... 세월은 흘러갔다. 그 꿈결같던 풍경도 어느새 잊혀져 기억의 저편으로 빛 바래진 올 봄날이었다.
화가 유휴열 형한테 전화가 왔다. 일거리가 있어서 그러는데 사람을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찾아 달라는 사람은 김현철이라는 친구였다. 그 친구와 나는 다문이라는 전통찻집에서 처음 수인사를 나누며 가까워졌는데 내 기억으로는 휴열이 형이 서로를 소개시켜 주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우연히 다문에 들러보았는데 그 다문의 한쪽벽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그림, 바로 소나무 숲이 마음에 들어즐겨 찾는다고 하던 친구였다. 사실 다문에 그려있는 그윽한 솔숲향의 소나무 숲에는 다른 내력이 있었다. 그림 그리는 내 친구중에 소나무를 즐겨 그리는 오광해라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소나무가 참으로 마음에 들어서 언제인가 나는 그에게 부탁을 했다. 내가 언제인가 방한칸을 장만하게 되면 내 방안에 소나무밭을 그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나는 무가선생이라는 별칭을 얻어 다닐만큼 한몸 내 활개를 치며 잠자리 누일곳이 요원하기만 했었는데 마침 내가 몹시도 따르던 이정수형이 전통찻집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잘 되었다. 내 그 친구에게 부탁을 하여 이정수형의 다문에 소나무숲의 그윽한 향내를 안기리라.
그 후 전통찻집 다문에 그려진 소나무숲은 그곳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칭송이 자자하게 되었다. 아뭏튼 유휴열 형과 찻집 다문의 소나무숲을 통하여 알게된 김현철이라는 친구는 참으로 좋은 재주를 많이 가지고 있는 친구인데 아무렇게나 뚝딱거리는가 하면 어느새 책장이 되고 초막이 한 채 지어져 편안한 잠자리가 되고 그런가 하면 그 굵직 굵직한 손끝으로 꼼꼼하게 한올 한올 짚을 꼬아, 보기도 좋은 짚신을 만들어 놓기도 하는, 소원이 있다면 이 땅의 산천을 닮은 초가집 몇채를 지어보는 것이라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친구다.
그 친구와 연락이 닿아 구이면 항가리의 유휴열형 집을 차게 된 것은 그리 오랜 시일이 흐르지 않은 때였다. 사실 획하니 바람처럼 떠도는 역마의 기운은 그 친구가 나보다도 더하면 더했지만 일이 잘될려고 그랬는지 어떤 것일지 몰라도 찾아 달라는 연락을 받은지 채 일주일이 흐르지 않아서였다.
휴열이 형은 할머니가 한분 사시다가 돌아가신 빈집을 한 채 구했다고 이야기를 꺼내고는 현철이라는 친구에게 그집을 한번 가보고 손을 봐 달라는 것이었다. 아! 바로 그 집이었다. 내가 언제인가 방한칸을 얻어 살고 싶었던 바로 그 집이었다. 유휴열형의 배려로 내가 그 집에 들어가 살기까지는 거의 모든 손질을 현철이라는 친구의 손길이 닿은 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벌써 두달이 가까워 오는 그곳에서의 삶은 나의 정신과 육체를 맑게 했다. 그러나 피곤한 일도 일어나는데 그것은 이따금 그곳을 알고 찾아오는 무리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 좋은 곳을 혼자서만 차지하고 살 수는 없는 법, 그러려니하며 지내던 어느 날 아침 휴열이 형과 함께 시인 백학기가 집을 찾아왔다. 며칠전 백시인은 그의 두 번째 시집 “나무들은 국경의 말뚝을 꿈꾼다”를 출판하기도 했었다. 그는 나의 삶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죄가 많아서 시를 쓰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혼잣말처럼 하며 쓸쓸히 웃었다. 화살처럼 그 말은 내 가슴에 와 박혔다. 그럴지도 몰라. 어쩌면 학기의 말이 맞는 말이었다. 죄가 많아서 이렇게 사는 것일게야. 백학기와 헤어져 시청 뒤의 직장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렸을 때였다. 흰 와이셔츠 차림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 여름에 무슨 나무라도 심겠다는 것일까? 목불인견이었다. 나무라도 심는 일이었다면, 토막토막 잘려진 조선 소나무, 내가 지금의 직장을 다니게 된 올봄부터 오며 가며 보았던 그 소나무는 언제 이식을 했는지 모르지만 시름시름 몸살을 앓고 있었다. 떠나온 산천이 그리워서였을까? 그러나 내가 보기에도 죽은 것처럼 보였던 그 소나무는 한 보름여전부터 여리기는 하지만 푸른 새움을 터오고 있었다.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야. 살아났어. 생명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야. 아 그러나 이것이 무슨 변고인가 이제 막 살아나기 시작한 생명을 저처럼 무자비하게 잘라 버리다니. 나무를 심어만 놓고 잘자라기를 바라는 사람들, 그것은 마치 네가 잘 자라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뽑아버릴 수 있다는 , 생명을 마치 소모품처럼 보고 있는 가진 자들의 사고에서 비롯되어진 일이다. 저 폭력, 소나무가 아닌 수많은 이 나라의 꽃다운 젊은 청년들이 온몸에 불을 지르며 안타깝게 죽어갈 때에도 두 눈 깜짝 거리지 않고 오히려 그 장렬한 죽음을 매도하고 생명을 가벼히 여긴다고 오히려 비판을 일삼는 무리들. 그들이 바로 그 기만적은 폴력이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나는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겠다고 했다. 백학기는 나무들은 국경의 말뚝을 꿈꾼다고 했다. 토막톰막 잘려진 저 조선 소나무들이 이제 무슨 꿈인들 꿀 수 있겠는가. 떠나온 산천이 그리워 시름시름 몸살이 앓고 있을 때 차라리 막걸리 한되라도 받아 소나무에 먹였더라면 저처럼 끔찍한 죽음을 맞지는 않았을 터이데. 나의 안타까움은 몇몇 친구들에게 전해졌고 소나무를 잘 그리는 오광해라는 친구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며칠 뒤 토막난 그 조선 소나무는 내 방의 한쪽 벽에 다시금 푸른 목숨으로 살아나 숨을 쉬고 있었다. 다시는 잘려지지 않을 푸른 목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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