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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8 | [문화저널]
‘챠이코프스키 풍물굿’을 읽고 주체성있는 주장과 언어의 퍼즐적 유식함의 거리
이병초․농사꾼 (2004-01-29 14:46:54)
‘우리 것 찾기’라는 표어가 한낱 ‘소박한 무지’이며 ‘소시민적 낭만의 양심 어루만지기’이며, ‘풍물’이라는 탄력적인 우리 문화가 문화의 단순 재생산에 그치고 만 ‘천박성’으로 나타났으며, 챠이코프스키에게서 풍물 ‘한 수’를 배우자는 그의 주장은 어떤면에서 감동까지도 전해주었다. 이렇게까지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이렇게 깊이 있게 ‘우리 것’을 눈여겨보고 진정 고민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이런 사람이 내 주위에도 있었구나 하는 은근한 자부심까지 일고 있었다. 그러나 이글을 읽어오면서 어찌된 일인지 내가 ‘멍청이’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것은 김원호씨가 제시한 챠이코프스키의 음악적 배려를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알고 있는 ‘풍물’이라는 것 자체를 멍청이 수준의 ‘민족을 팔아먹’는 ‘애국 행위’ 쯤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의 주체성있는 주장이 무슨 「적」 무슨 무슨 「적」―이를테면 소시민적, 과학적, 유물변증법적, 등―이라는 용어를 부침으로써 오히려 설득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안타깝기까지 했다. 결국 김치적이 되었는지 파적이 되었는지 서양 핏자가 되었는지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뜬쇠 양순용과 뜬쇠 챠이코프스키가 삼투해’서 어떤 세계적인 ‘우리 것’을 창출해낼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좀더 쉽게, 정확한 논조로 가려줬으면 좋겠다. ‘우리 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당대의 건강한 현실 문화로 담보해내기 위해서는, 당대의 표독스러운 비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나또한 뻔히 알고 있는 마당에 ‘한 문예운동가의 단상’을 헌바지 부랄 삐지듯이 삐딱하게 덮고만 것은 아무래도 아쉽다. 어쩌면 그 글에서 먹물 냄새부터 맡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땀냄새, 똥 냄새, 구질구질 하지만 끝내 살아있는 사람 냄새를 맡기 구보다는, 김원호씨의 말마따나 ‘국어 사전이나 뒤져서 죽은 언어의 퍼즐적 유식함’을 맡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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