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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8 | [문화저널]
가자 가자 달려가자
김경은․시인 (2004-01-29 14:55:44)
아직도 미명이다. 시간의 덫에 걸려서 세상을 사는 일, 지리한 가물 끝에 단비 내렸지. 지방 MBC에 근무하는 우리 동창 이흥애 기자는 어느 시골어른의 표현대로 쌀이 내리는 것이라고 오늘 아침 라디오 뉴스시간에도 반가워했지. 그래 내리는 것이다. 삶이라 내리는 것의 연장선 같은 것이라고 나는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지. 끝없이 내리는 것, 그래서 침몰하는 것, 아니 무너져 내리는 것이지. 우리집 두 딸에게 시를 외우라고 요 몇 달전에 사탕 한 봉지로 유혹했는데 요즈음 아주 신나게 외워대는 통에 나는 진정으로 내 시를 사랑하는 두명의 여성독자를 가졌지. [가자 가자]. 그래 어디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된장인지 똥인지 모르지만 가자 가자. 그렇게 가다간 신바람나면 달려가자. 모두다 가고 없는 듯한 날들 속에서 불현 듯 내가 아는 K씨는 부질없은 일을 벌렸었지. [주간 한편의 시]를 배달했었지. 그때도 달려가고 싶었던 산천이 있었지. 그래소 좁쌀 같은 머리지만 “한라에서 백두까지” 달려가는 한편의 시를 꿈꾸웠지. 그런데 지금 K씨는 인고의 사간을 딛고 일어서 전라도 사람 많이 산다는 성남시에 가서 봉급쟁이 한의사 되었지, 맞아 죽어도 곧은 허리 잘라 놓은 아버지의 아버지, 역사의 궁핍이란 풍요로운 겉치레는 분명 아니지. 온 천지에 타는 그리움 다시는 피빛 눈물 바다가 되어서는 안되지. 군대 삼년을 이땅의 반쪽에서 가장 위도가 높은 강원도 간성의 건봉산 아래에서 근무했는데 그때 나의 정확한 사격술은 나는 야생 조수의 심장을 관통했지만 그러나 야생조수의 비상하는 꿈은 깰 수가 없었지. 망연히 바라보면 어느결에 다가왔는지 사계의 변화에 정체된 시간에 꿈들을 허물어 버리곤 했지. 자아식, 그렇게 소리없이 산너머 저쪽 경계의 눈초리 피해 다가갔는지. 지금은 무엇이 되었는지. 지금은 무엇이 되었는지. 별별 흉흉한 소문들에 휩싸여 지낸적도 있었지. 그 시절에도 보물처럼 비밀처럼 다가서던 산너머 저쪽 그리움이여. 그때나 지금이나 분단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뜨거운 가슴으로 만나는 길이지. 그길에 내가 아는 K씨 침들고 달려와 막힌 혈을 풀어 주겠지. 기왕이면 냄비 뚜껑, 솥 뚜껑 모조리 들고 한바탕 신명나는 살풀이라도 해야지. “나 피양에서 왔디요”. 그래 평양이고 신의주고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피면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움으로 보낸 인고의 세월 잊어버리고 어깨 둥실두둥실 살아 한마당의 그날까지 살아서 달려가야지. 흐르고 흐르면 끝없이 다가서는 날 있을 것이 높은 산이 막거든 돌아가면 되는 것이고 깊은 강이거든 건너가면 되는 것임을―. 그러나 아직은 미명. 낮은 물소리에 깨어 일어나 가자 가자 달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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