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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8 | 칼럼·시평 [시]
‘저녁꿈’
정인섭 시인(2004-01-29 15:03:44)

‘저녁꿈’
정인섭 시인

내 기억에 남아있는 대로 하면, 내가 의식적으로 시를 한 번 써본 것이 국민학교 5학년 시절 어느 여름날이었다. 「오포」라는 제목으로, 당시 우리가 살던 읍내에서는 의용소방서에서 오정포(午正砲)를 울려주었는데 실은 대포가 아니라 사이렌 소리였고 그 소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시를 썼던 것이다.
그 시 내용은 기억이 자세하지 못해도, 그 시를 쓸 때, 사람들은 왜 오포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점심밥을 챙겨 먹는가 하는 것하고, 그 오포소리는 끝이 길게 끌어가다가 사라지는 마치 신음하는 사람의 목소리같은 것이라 그 끝부분 소리를 나타내보려고 꽤 애썼던 것만이 생각난다.
그러고 나서, 써야만 한다는 힘에 밀려서 시를 쓰게 된 것은 군대복무를 끝내고 나서다. 복학 때까지 반년을 놀면서 시만 썼다.
누구나 그렇듯이 군대를 마치면 상당기간 군대 충격을 나름대로 과장도 하고 축소도 시키면서 다스리는 것인데 나는 정방철책선 근무를 했고 비무장지대의 체험이 골수에 사무쳐서 그저런 경험들을 시로 쓸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시들을 모두 내버려야 할 것들이 라고 여겨져서 버렸다. 이를테면 사설만 많고 자기훈련 정도밖에는 안되는 것들이었던 것이다.
대학 졸업반 때(고향 남원고등학교에서 국어교생실습을 채 덜 마친 상태에) 광주항쟁이 터졌다. 나는 전방 복무때 조국 분단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겪었고 그 실체는 중풍과 같이 마비현상같은 것으로 나름대로 정리했었다. 군대에 가게 된 것도 3학년 2학기 교련점수가 F학점이 나오는 바람에 원치도 않은 상태로 끌려간 것이었고, 그 F학점도 시험점수나 출석과는 무관하게 나온 것이어서 군대 31개월의 세월을 아주 쓰디쓴 역사체험으로 개인의 집단과의 갈등을 필연적인 맛으로 대해야 했다. 말하자면 광주항쟁은 상처가 덧나되 크게 난 것이고 그런 상처는 전신(민족․국토․남북의 조국)에 퍼진 것이니 만큼 간단없이 계속될 일이었다고 믿었다.
남원에서 교생실습을 3주쯤 했을 때 광주에서는 대살육이 벌어졌다. 남원은 광주에 가까워서 소식은 하루도 안 걸렸다. 버스에서 끌려내려진 남녀노소가 길가 논두렁에서 총도 맞고 개머리판으로 으깨어지고 폭행도 당하는 광경이 남원 사투리와 억양으로 다 알려졌다. 나는 부들부들 떠느라고 밥을 입가에 묻히고 흘리고 하면서 저녁밥을 그래도 날마다 먹었다.
그때 나는 시를 평생 죽는 날 저녁까지 쓰고 생각하고 직업으로 해야만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내가 시를 신음소리나 비명소리만큼 아름답게 쓰지 못하면 부끄러운 일 아니냐고 늘 자신에게 타이르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됐다고 생각된다)
그 뒤로 학교를 졸업하고 시는 직업으로 되지 않고 학교 선생으로 나섰다.(이 학교는 200년전 조선시대 천주교 탄압시절에 순교자들이 처형됐던 자리였다) 대단한 인상과 매력으로, 말을 하자면 죽음의 현장이라는 내 직장이 천주교를 내게 내밀었던 셈이라고나 할까. 종교탐색을 시작한 나는 1년만에 천주교가 내 종교라고 결단하였다. 영세를 한 다음, 다음 단계는 이 종교의 끝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옮겨갔다.
영세 직전에 첫 시집이 나왔는데 거기에는 내 종교체험은 전혀 없다.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시가 하나 들어있지만 다른 내용이다.
천주교를 끝장을 볼 테면 순교를 한다거나 거기에 일생을 걸어 바쳐야 할 것이다. 3년이 지나면 나는 신학생이 될 것이었지만 사실은 수도원으로 들어갔던 것이고 수도원들 가운데서도 가장 엄격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정식 이름은 ‘엄격한 규율의 시토 수도회’다)이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밤 7시에 자고 침묵을 절대 지키며 육식을 끊고 공부와 기도와 명상과 일로 먹고 사는 것이다.
역사와 현실로부터 멀리 나앉기로 하면 산중보다 더 깊은 곳이 없겠지만 그러나 산중만큼 인생고가 백일하에 발가벗겨지는 곳이 또 어디 있는지 사람들은 자세히 알아채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깊은데는 아닌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에 있는 수도원에서 서양방식의 중노릇을 2년 한 셈이다.
첫시집에 「봉군이 되어」라는 시가 있지만, 투사냐 수사(修士)냐 하는 문제를 좀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현장에서 살아내기의 문제라는 정돈이 서기 시작한 것이 1987년 가을이었다. 법원리 버스터미널에서 서울행 직행버스를 타고 십분쯤 지나 기지촌인 용주골을 거쳐서 머리를 박박 깎은 채로(스님과 같이 머리를 밀고 지낸다)세상으로 되돌아 나왔다.
나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 종교가 우리것이 아직도 못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다. 알기 분명한 사실을 더 분명히 증명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10년, 집단적으로는 1784년이후 200년이 된 이 종교가 이 민족 속에서 무엇을 해내고 있는가는 아직 연구대상일 뿐이지만, 내 시와 삶과 관계지어 볼 때는 아무래도 종교와 역사현실은 제각각이거니와 종교가 어쩔 수 없이 도덕적 차원의 냇물로 흘러갈 수 밖에 없다는 소감이다.
내 시「저녁꿈」은 선시(蟬詩)같지만 기실은 비린내나는 세상 신음에 비명을 비빈 내 밥이다.
술 없는 저녁이 나를 데리고
끌간 데 없는 어둠 길로 내려갔네
도중에 어떤 절벽 낙락장송이
길을 막고 내게 물었네, 자네
어둠 마신 그 넋을 내 가지에 걸겠나?
나는 금나 그 말에 취해
몸은 그 길에 넋은 절벽에 풀어버렸네
잠을 깨고 보니 동터오는 앞산 강가에
나룻배 한 척
나를 건네주려고 매어 있네
이 강가의 낙락장송
저 절벽의 구름 한 장

내 시가, 내게 선천적으로 찍힌 초월주의와 후천적으로 묻은 실존주의․역사이상주의 등을 더 파내게 되면 더 시원한 현실주의의 바다에 돛달고 달릴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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