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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8 | 문화현장 [문화가 정보]
백제의 거찰 미륵사
유철 부여문화재연구소 연구원(2004-01-29 15:05:22)

백제의 거찰 미륵사
유철 부여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미륵불이라는 불교의 내세신앙과 찬란했던 백젬누화가 한데 어우러져 오늘날까지 그 정신의 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곳이 있다. 현재에는 초라한 자취만이 남아 지난날의 화려했던 영화를 대변해 주지만, 예 시절의 거대했던 위용은 각박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값진 문화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를 이름하여 ‘미륵사’라 칭한다.
미륵불이란 현재는 보살로서 도솔천의 천인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지만 석가불의 예언에 의하여, 그가 4천세(인간의 56억 7천만년)되었을 때 이 세상에 하생하여 용화수 밑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을 약속한 불이라 한다. 이 미륵불의 왕림으로 현세의 고통과 슬픔에서 영원한 용화세계로 인도해준다는 것이 미륵신앙이며,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미륵사는 이 신앙을 토대로 창건되 사찰이다. 미륵사지는 금마면 소재지에서 함열로 연결된 국도를 따라 약 3km 정도 가다보면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23번지에 속한다. 이 사찰 뒤로는 해발 430m의 용화산이 있으며, 그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내려 미륵사를 휘감고 있다. 현재 사적 150호로 지정되어 있는 미륵사지내에는 미륵사지 석탑(국보11호)과 통일시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당간지주(보물 236호)와 그 밖의 많은 건물지가 남아있다.
이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중서부지역 고대문화를 규명하고 아울러 고대가람의 실체를 밝히며 유적의 보존 및 정화를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데 목적을 두고 1980년부터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실시되고 있다. 그 간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가람의 성격규명이 상당부분 밝혀졌고,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이 분야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가람이란 범어로 Sangharama에서 유래된 것으로 한자로는 승가람마(僧家藍藦) 또는 중원(衆園), 정사(精舍)로도 번역되며, 불제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여 불도를 닦는 것을 의미하나 후대에 와서 절에 속하는 건물을 뜻하기도 한다. 삼국시대에 나타나는 가람양식은 각 나라마다 특색을 보이는데, 고구려는 1탑 3금당의 가람이 주류를 이루고, 백제는 1탑식과 평지에서는 병렬식, 산지에서는 석굴사원가람이 조영되었다. 이러한 선진적인 불교문화는 신라에 영향을 주어 1탑식 가람을 형성시키고 이것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 가람인 2탑식 가람양식으로 발전하였다.
미륵사가 소재하는 익산군은 금마를 중심으로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어 고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금마면 오금산, 함열군 다송리, 현재는 이리시에 편입된 팔봉 등에서 청동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궁터로 인식되는 황궁면 왕궁지, 무왕의 묘로 알려진 쌍룡, 그 밖의 익산토성, 제석사지, 태봉사, 동․서 고도리석상 등이 이러한 예이다. 또한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후한서』,『삼국지』등의 사료에도 익산지역이 마한의 고도였다는 설과 백제 무왕의 별도설, 그리고 견훤의 후백제 도읍설등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고대 문화의 중심지인 금마에 소재한 미륵사는 백제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적임을 알 수 있다.

미륵사 창건

미륵사 창건 연대는 몇 가지 견해가 있으나 대체로 백제 30대왕인 무왕(AD600-641)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유사 『무왕조』에도 창건에 얽힌 설화가 기록되어 오늘에 전한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무왕을 낳았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기량이 뛰어났으며, 마를 캐어서 먹고 살았기 때문에 서동이라 이름하였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서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들어갔다. 마를 아이들에게 주니 그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서동을 숨겨두고 밤마다 몰래 안고 간다”는 노래를 가르쳐 주어서 부르게 했는데 이게 바로 ’서동요‘이다. 이 노래가 서울에 퍼져서 진평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왕은 심히 노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으며 왕비는 떠나는 딸에게 금 1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터에 도착할 때 서동이 나타나 공주를 모시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를 비록 처음 만났으나 믿고 좋아했다고 한다. 이에 서동은 공주를 데리고 백제로 돌아왔다. 공주는 왕비가 준 금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자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서동은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러한 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흙처럼 많이 쌓여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공주는 크게 놀라면서 금은 천하의 진귀한 보물이니 신라의 부모에게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서동은 이를 찬성하였으며, 보낼 방법이 난감한지라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수송할 계책을 부탁하였다. 이에 지명법사는 신통한 도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내 주었다. 이를 받은 진평왕은 그 신비로움을 이상히 여겨 서동을 존경하였고 늘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게되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서동과 그의 부인은 어느날 사자사에 가는 길에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였다. 이에 왕과 왕비는 절을 올렸으며 왕비가 왕에게 이 곳에 큰 절을 지을 것을 간청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으나 못을 메우는 것이 문제였으므로 지명법사에게 찾아가 물었다. 지명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곳에 낭무․탑․불전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고 이름지었다. 신라 진펴오앙도 공인을 보내어 도와 주었다고 한다’는 내용이다.
이와같은 삼국유사의 기록이 허구성이 짙다는 것과, 무왕때 창건 되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몇 가지 점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즉, 실제로 이 곳에는 못이 있었으며 건물에 사용된 석재들이 용화산의 바위와 같은 재질이라는 점, 그리고 세곳에 탑․금당․낭무를 두었다는 점들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 보여지는 이들의 사랑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전라도 청년과 경상도 처녀와의 사랑, 어려운 여건 속에서의 결혼, 설화속의 주인공 서동과 선화공주가 남겨주는 메시지를 우리는 과연 읽을 수 없는 것인지. 신분과 지역을 선화공주가 남겨주는 메시지를 우리는 과연 읽을 수 없는 것인지. 신분과 지역을 초월한 끝없는 이들의 사랑 앞에 우리들도 그저 이유와 조건 없는 그런 순수한 사랑의 여유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사이 위정자들이 부르짖는 지역감정 해소책에 이들은 실제적 행동을 통해 그 가능성을 보여준 선구자들이 아닌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지역감정 해결에 골몰하는 우리에게 가장 간단한 해결방안을 던져 주고 있는 것 같다. 오늘도 이들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듯 많은 젊은 남녀가 이곳을 찾는다. 늦은 밤까지도……
백제말에 창건된 미륵사는 통일 신라와 고려 때까지 오랫동안 그 맥이 이어지다가 조선 영․정조 이전에 폐찰 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역사에서 멀어진 미륵사는 일제 때 일본인 학자로부터 관심과 연구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서 서탑의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져 탑의 서편부분은 더 이상의 붕괴를 방지하였다. 하지만 무성의하게 시멘트를 이용하여 보수하였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실망을 금할 수 없게 한다. 또한 반쯤 남아 그 당시의 영화를 조금이나마 보여주는 문화재를 보존하기는커녕 페어글라이딩을 타고 탑 주위를 돌거나, 탑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답답한 마음이 앞설 뿐이다. 문화재가 그들에게는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장애물이거나 암벽 등반의 적격지로 보는 것은 혹 아닌지 모르겠다.

미륵사 가람

이렇듯 역사적 산실인 미륵사지는 석탑과 당간지주 그리고 드러난 몇몇 유구를 제외하고는 거의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1974년과 1975년에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 연구소에 의해서 최초로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발굴은 동탑지에 한해서 이루어져 전체 가람을 규명하는데는 부족하였다. 이에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1980년 문화재연구소가 발굴에 착수함으로써 미륵사의 실체가 밝혀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0년부터 1984년 까지는 미륵사의 중심곽을 중심으로 발굴이 행해졌으며, 1985년부터 1989년까지는 사지 외곽의 고려․조선시대 건물지․공방지․와요지 발굴이 거의 완료된 상태이며, 현재에는 연못지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유적이 중요성과 사역의 넓은 면적으로 인해 당초의 계획을 연장하여 앞으로 2-3년간은 조사가 계속될 전망이다.
그 동안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역의 중앙부에는 중원이 자리하고 그 동편과 서편은 중원의 회랑을 경계로 중원과 동일한 양식을 가진 독립된 동원과 서원이 위치하는 3월 병렬식 가람의 매우 특징적인 구조이다. 중원에는 목탑이 있고 그 뒤편에 금당과 그 사이에 석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회랑이 둘러져있다. 동원과 서원 역시 탑과 석등․금당이 있는 것은 중원과 동일하나 목탑 대신 석탑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석등과 금당은 석탑의 뒤편에 중원의 석등과 금당이 동서로 일치되는 선상에 거의 같게 자리한다.
이들 3원의 남쪽 편은 서원의 서쪽 끝에서 동원의 동쪽 끝까지 회랑이 동서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들 회랑에는 중원, 동원, 서원으로 들어가는 중문 3개가 있다. 남회랑은 동원과 서원의 끝에서 꺽여서 북쪽으로 중원의 동서회랑보다 약간 짧게 연결되다가 다시 안쪽으로 꺽인다. 이 동서로 꺽인 회랑은 26.5m정도 연장되다가 동서 안쪽에 남북으로 놓여 있는 승방지가 있는 회랑과 연결되며, 승방지의 북쪽 끝과 강당의 동서 끝 부분 사이는 작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중 동․서원의 바깥쪽에 둘려진 회랑은 담장을 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당 뒤로는 11.3cm 폭의 배수로가 자리하고, 배수로 북편에는 동서로 길게 뻗은 승방지가 위치한다. 여기까지가 창건시의 가람이며 통일 신라 때에는 남회랑에서 남쪽으로 더 확장되어 연못지 바로 북편가지 또 하나의 회랑이 놓여진다. 이때 넓혀진 회랑내의 동쪽과 서쪽에 당간지주가 만들어 진 것 같다. 또한 후대건물지는 서원 승방지 주변과 사역의 서편 및 북편 승방지 북쪽에 주로 위치한다. 사역의 중심곽에서는 조선시대의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고 사역의 북쪽 외곽과 서쪽 외곽의 후대 건물지에서 백자 및 분청사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건물지의 초석도 많이 노출되고 있음으로 보아 조선초기의 미륵사는 창건시의 중심곽 밖에서 그 맥이 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는 발굴조사를 통해서 몇 가지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있는데 탑과 금당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겠다.

1. 탑
위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미륵사에는 3개의 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주에서 중원의 목탑지는 기단의 일부만이 남아있어 정확한 성격 규명이 어려우나 규모가 80m에 달하는 황룡사의 9층 목탑보다는 작았을 것이다. 그러나 탑을 지탱해 주는 기초는 점질토와 사질토를 사용하여 매우 섬세하고 견고하게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 발굴이 거의 완료된 동탑지는 이와는 약간 달리 화강암을 깬 할석과 점질토와 모래를 섞어서 기초를 다졌는데 습기 방지를 목적으로 흙을 구운 흔적이 나타난다. 그리고 기단 안쪽에 깔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전(塼)이 거의 나오지 않는 점도 특이한데 탑지와 금당지에서 다량의 유리가 출토되는 점에서 전을 대신해서 유리를 깔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탑의 층수 문제에 있어서도 9층이었음이 판명되었으며, 상륜부까지의 높이는 23.5m정도로 추정된다. 이 동탑은 현재 복원할 계획에 있으므로 머지않아 그 거대한 자태가 드러나리라 기대된다.
2. 금당
금당 또한 탑과 같이 3월에 모두 설치되었으며 이들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동․서 금당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동․서 금당은 약 1m 내외의 지하공간을 두었는데, 이는 ‘미륵사’라는 사찰 명에서 알 수 있듯이 미륵불이 설법할 장소를 상징적으로 남겨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미륵사의 탑과 금당은 2증 기단으로 되어있어 백제의 조형감각이 신라보다 기능적이며 선진적이 아니었는가하는 견해를 낳기도 한다.
3. 출토유물
미륵사는 발굴조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약 18,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중 토기류와 막세류, 그리고 자기류가 주류를 이루며, 이외에도 금속류, 목제품, 토제품, 석제품, 유리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류와 막세류는 사역의 거의 전 지역에서 출토되며 기형도 다양한 편이다. 또한 건물 지붕의 연목에 붙이는 앞면과 옆면에 녹유가 시유된 연목와가 다량 출토되었다. 이 녹유연목와는 다른 사찰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그 편년은 대체로 백제로 추정되어 유약시유 편년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제공되어 질 수 있다고 본다. 자기류는 주로 후대건물지에 편중되어 출토되는데 이 중에는 소량의 중구자기도 나타난다.
이상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거의 비슷한 규모로 알려진 신라 황룡사에서 출토된 유물보다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미륵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상당수 전주국립박물관 1층 전시실에 전시되어 미륵사 유적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발굴조사는 올바른 역사규명과 함께 제료제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발굴 중에 뜻하지 않은 유구의 출현은 더욱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이럴 때 일수록 발굴조사에 참여하는 조사자들에게는 역사의 기록원이란 책임감과 자부심이 더욱 요구된다. 또한 발굴조사는 그 특수성으로 포크레인과 같은 중장비를 이용하여 몇 시간이면 파헤칠 수 있는 것을 마다하고 사람의 힘만으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비합리적인 방법이 사용된다. 이와 같은 힘든 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발굴조사에 참여해 주시는 인부 아저씨들에게는 늘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이 분들의 노고 없이는 결코 미륵사지에서 실시되고 있는 대규모 발굴조사는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오랜기간 발굴에 참여한 덕분에 유구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정확함을 간혹 느끼곤 한다.
이러한 발굴조사에 의해서 얻어진 미륵사의 실체는, 경주 황룡사와 거의 유사한 규모임에 불구하고 독립기념관에 복원 전시된 모형은 황룡사보다 왜(?) 훨씬 작게 만들어졌냐고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속시원한 대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실체가 드러난 미륵사는 앞으로도 더욱더 그저 놀이공간이 아닌, 노인들에게는 백제인들의 은은한 향수를 느낄 수 있고, 젊은 남녀에게는 유익한 공간을, 청소년들에게는 진정한 배움의 장소를 제공할 그런 날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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