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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 | [특집]
우리나라의 도자기 문화
김정실․이리농고교사 (2004-01-29 15:09:46)
오랜 가뭄 속에서 호흡하기 곤란할 정도로 푹푹 찌는 무더위는 모든 것을 훌훌 벗어 던지고 조금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가방하나 가볍게 꾸려 여행을 떠나고 싶게 한다. 짜증스러움이 있었으나 박물관 문화학교의 성인강좌는 학문적인 열기가 충만한 전주박물관에서 아름다운 토기와 도자기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배울 수 있다라는 가슴 벅찬 설레임으로 나의 생활의 청량제가 되었다. 토기와 도자기는 점력을 갖춘 가소성이 있는 태토로 형태를 만들고 이것을 불에 구워낸 것이다. 인류가 도자기로써 최초로 만든 것은 토기인데 그 기원은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사기대에 태토로 토기를 만들어 불에 굽지 않고 햇빛에 말려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처음 토기를 만들던 때에는 그릇을 만들어 가마 없이 노천에서 600℃ 정도에서 구워냈다. 사람의 지혜가 점차 발달함에 따라 토기를 구워내는 화도를 높이고 높은 화도에 견디어내는 태토를 찾아내고 가마를 만들어냈다. 우리나라는 신석기시대로부터 흙을 빚어 번조한 즐문토기를 사용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고화도로 환원번조한 토기를 만들었다. 삼국토기 중에서도 신라․가야토기는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것이어서 1200℃ 이상이나 올라가는 고화도 환원번조로, 표면색은 회청 흑색이고 무쇠같이 단단한 것이었다. 신라․가야토기는 기형이 다양하며 바닥이 둥글거나 아니면 높은 받침이 있고 표면에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음각문양이 있으며 선의 흐름이 강하고 직선적이어서 제례적이고 의례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토기는 부장용보다는 실생활용으로 안정된 것으로 삼국시대의 높은 받침은 낮은 굽으로 변하고 둥근 바닥은 편편한 바닥이 되고 높은 목은 낮아져서 안정감 있는 토기로 이행되었다. 통일신라 말 9세기경부터 중국의 월주지방의 청자와 그 기술이 바다를 통하여 우리나라 서해안과 일부 남해안에 많이 유입되어 초기청자인 햇무리굽청자와 녹청자를 만들어 냈으며 백자도 일부 번조되었다. 고려에 와서 더욱 발전된 고려청자는 1%의 철분함량의 태토로 환원번조한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고려자기는 17대 인종때부터 고려적으로 아름답게 세련되어 독특한 비색의 청자를 완성하고 18대 의종 때에는 상감기법과 문양구성이 가장 뛰어났다. 그러나 몽고군이 침입하면서 상감기법을 비롯하여 비취색과 선을 잃고 서서히 실용성과 안정감을 보이면서 변모하여 갔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청자의 유연한 곡선은 단조롭고 둔해졌으며 기벽이 두껍고 투박해졌다. 문양 역시 단순화되면서 섬세하던 상감문 대신 기능적인 인화문으로 변하였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도자기는 고려 말 퇴락된 청자의 여맥을 이은 이조청자와, 정자에서 일변한 분청사기, 초기의 고려계 연질백자, 원․명계 백자, 중국의 청화백자의 영향으로 발달된 백작 있고 이 밖에 흑유, 철채, 철사유 등이 있으나 크게 분청사기와 백자로 나눌 수 있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도자기 발전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여 전국적으로 가마는 파괴되고 많은 사기장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때부터 일본은 비로소 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기 발전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후 가마운영이 어려운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수난을 딛고 색을 피한 평범하고 소박한 순백자가 소생되게 되었다. 한국의 도자기는 36년 간 일본통치, 6.25사변, 미군정 통치, 서구문명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보잘 것 없이 퇴보하게 되었는데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적인 우리 조형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5일 동안 이론적으로 배워왔던 도자기에 관한 것들을 눈으로 직접 관찰하고 확인하는 답사가 진주박물관, 경남 산청에 있는 가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가야문화를 중심으로 전시되어진 진주 박물관은 진주성의 유적지 안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이 자연스레 가야문화를 접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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