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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 | [문화저널]
바로크 시대의 서양음악
문윤걸(2004-01-29 15:12:31)
서양음악사에서 바로크 시대란 대체로 르네상스가 막을 내린 1600년경부터 바흐가 사망한 1750년경까지를 말하는데 이 시기는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와 근대과학, 근대철학의 성립으로 특징지워지는 근대사회 성립의 초기 단계로서 시민문화 시대로 접어드는 변화와 모험의 시대였으며, 근대 민주국가 형성의 전조(前潮)와 이에 대항하는 전제군주제의 강화,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상충하는 조류사이에서 개인주의의 관념이 촉진된 시대였다. 이에 따라 모든 예술장르에 있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구성형식과 표현법, 미학적 사고방식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바로크 시대는 교회예술과 궁정예술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시기로 교회는 퇴색해 가는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술적 웅장함을 추구하는가 하면, 성장하는 시민계급은 자유로운 인간적인 감정을 음악에 담아 노래함으로써 화려한 음악 예술을 등장시켰다. 초기 바로크의 예술은 반종교 개혁운동의 이념과 일치하는데 개신교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카톨릭이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 예술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일 수 있다고 인식하였고, 더구나 케플러, 뉴튼, 갈릴레이 등에 의한 자연과학적 성과나 인간 이성의 역할을 역설한 데카르트, 볼테르 등의 근대철학이 카톨릭의 존립기반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예술이야말로 교회에 영원한 충성을 바칠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예술의 전 영역은 카톨릭 포교의 수단으로서 전폭적인 지원아래 화려하고 장대한 양식들을 꽃피웠다. 그런데 르네상스의 예술이 선적(線的)이고 평면적, 폐쇄적, 명확한 것인데 비해 바로크 예술은 회화적, 입체적, 개방적, 통일적이었다. 특히 음악에서는 회화적이고 통일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 초기 바로크 음악의 회화적 경향은 불협화음이나 반음계의 효과적 사용, 두 개의 합창단간의 메아리 효과 등과 같은 시도로 구체화되었다. 또한 정선율의 극복과 화음개념의 출현, 자유로운 선율 장식과 악기의 특색에 따른 독자적인 작곡법의 대두, 상성부의 출현 등 관습을 벗어나 본원적인 것을 표현하려는 창작태도는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적인 것이었으며 예술에 있어서의 주관주의의 대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교황의 세력약화로 인해 예술의 중심은 강력한 전제정치를 통해 사회적 안정을 확보한 루이 14세 치하의 파리로 옮겨가게 되는데 당시 유럽사회는 상공업의 발달로 근대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이에 따라 시민계급과 중산계급이 성장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농민과 귀족 같은 봉건적 신분계층이 남아있던 시기로 이 두 계급간의 균형이 오히려 왕의 위치를 공고히 해주었으며 절대 권력을 안겨 주었다. 전성기의 바로크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안고 성장하는데 정치적 안정을 찾은 이 시기에 탄생한 예술은 이제까지의 혼란스러웠던 모든 시도와 실험들을 종합, 정리하여 하나의 체계적이고 안정된 양식을 확립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과학철학은 이제까지 세계를 움직인다고 믿었던 종교적 도그마를 무너뜨리고 자연세계는 인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이러한 과학적 인식의 발전은 영국의 경험론과 프랑스의 합리론으로 대표되는 17세기 근대철학의 대두와 함께 인간의 이성에 최초 승리를 가져다 준 근대사상이 토대가 되었다. 데카르트는 음악에 있어서의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개념을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명백한 논증에 의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빈센초 갈릴레이는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구별은 귀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는 경험주의적 주장을 했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경험을 통해서 판단되는 화음개념과 자명한 원리로부터 도출되는 이론상의 개념이 서로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성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면서 보편적 미의 개념을 도출하려고 했던 데카르트는 바로크 시대의 효과이론에 영향을 주었다. 효과이론이란 인간의 감정을 극히 생생하고 격렬하게 재현하기 위한 음악적 효과에 관한 이론으로 어떤 특정한 마음상태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음악적 모형이 있다고 믿으며 이러한 음악적 모형들은 각각의 감정에 따라 특정한 선율, 리듬, 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이념들을 음악적으로 구체화하려는 노력은 데카르트적인 합리주의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의 감정적 효과에 어떤 보편 타당한 진리나 영구불변의 진리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이는 음악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감수성이 어느 정도 경험에 의해 선험적으로 조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험론과 합리론의 갈등이 시작되는데 많은 미학자나 음악 이론가들은 합리적인 이론 토대 위에 경험적인 실제가 논증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합리적인 이론 토대와 경험적인 실제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크 음악의 효과이론이 혼선을 빚는 것은 이 때문인데 효과이론이라는 합리적 토대는 그 후의 음악이 보이는 주관적 경향에 비한다면 훨씬 객관적인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보편성의 음악적 발현은 바흐와 헨델의 음악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추구되었다. 바로크 예술은 후반기로 오면서 국가만이 모든 것을 초월한 절대적 우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절대주의적 이념의 강화로 인해 더욱 권위적인 궁정문화로 변해갔다. 더불어 절대주의의 원칙에 따라 예술에 있어서 주관주의는 철저히 부정되었고, 엄격한 구성원칙을 지키며, 모든 부분들은 불변하는 보편적 동기에 의해 지배되어 더욱 동질성을 띠는 등 신고전주의와 형식론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구체화한 사람이 바로 바흐와 헨델이다. 그들은 예리한 통찰력과 직관을 가지고 그들의 시대정신을 파악하였으며 과학과 철학의 성과를 철저하게 음악에 적용하였다. 봉건주의의 붕괴과정에서 싹트기 시작한 근대정신은 17세기의 합리주의 철학을 거쳐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으로 이어졌는데 계몽사상은 인간의 이성과 어긋나는 구습과 낡고 모순된 제도를 과감하게 고치려는 개혁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과 더불어 사회적으로는 다수의 중산층이 점점 더 영향력 있는 위치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안고 탄생한 것이 로코코양식이다. 이 양식은 프랑스에서 유행하여 우아한 양식(Galant style)이라고도 불렸으며 특징은 바로크적 웅대함이나 열정 등의 강렬한 특징을 제거한 채 장식적인 요소를 강조한다는 데에 있다. 장려함보다는 우아함과 세련미, 목가적인 태도를 구가하였고 음악적으로는 미묘한 음정을 가진 소곡이 이 양식에 속하였다. 이 로코코양식을 어떤 이는 계몽주의 사상과 연결시켜 형식 규율에 얽매인 과거의 가치에 반항하는 문화의식의 개방운동이라고 하는 반면, 어떤 이는 정신적 내용이 없는 형식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확실히 로코코양식이 보여주는 평이하고 우아한 서정적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을 제공해주며 ‘이상적인 음악이란 불필요하게 복잡하지 않으며 듣기에 기분 좋은 것’이라는 계몽주의의 이상에 적합한 것이었다. 따라서 훈련된 귀를 요구하는 과거의 복잡한 대위법 양식은 이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였다. 또한 로코코양식은 형식과 인습, 규율에 얽매인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귀족들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귀족과 부르조아지들의 예술이었다. 또한 초기의 진보적인 부르조아지조차도 자신의 지위가 확고해지자 보수반동으로 돌아섬에 따라 봉건적인 귀족문화와 결별하지 못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형성된 로코코양식은 과거에 대한 복고적 향수에서 발생한 것으로 잊혀진 것에 대한 말기적 폐쇄성을 현저하게 드러낸다. 바로크 시대에는 서양음악사에 있어 크게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피아노의 발명과 바이올린의 활성화, 그리고 오페라의 발명을 들 수 있는데 이 세 가지 사건에 관해서 간단하게 얘기해 보겠다. 우리가 흔히 피아노라고 부르는 악기의 정식명칭은 ‘피아노에 포르테(Pianoe forte)'로 문자 그대로 셈과 여림의 표현이 가능한 악기라는 뜻이다. 피아노와 비슷한 악기로 14세기경부터 사용되어 피아노의 전신이라 부르는 하프시코드나 쳄발로는 건반을 누르면 현을 뜯으면서 소리를 내는 악기로서 지속적인 소리나 셈여림의 표현이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피아노는 해머로 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것으로 페달을 이용하여 음의 지속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후 악기는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 음악분야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악기가 되었다. 피아노는 처음부터 전 유럽에 널리 유행하는 악기는 아니었다. 피아노는 그 생김새 때문에 실내 생활에 적합한 악기였는데 유럽의 기후나 역사적 배경 상 남유럽에서는 안락한 실내생활이 보장되지 않았고 음악적 기호에 있어서도 아카펠라(무반주) 합창이나 오페라를 훨씬 더 좋아한 반면, 북유럽에서는 가정중심의 실내생활이 발달하여 거실 한 부분에 피아노를 위한 공간을 제공할 만큼 가정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였다. 따라서 피아노는 북유럽을 중심으로 퍼져나갔고 북유럽 중산층 가정의 중요한 가구품목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때문에 쇼팽, 리스트, 그리그, 라흐마니노프 등과 같은 피아노의 선구자들이 모드 춥고 습기가 많은 북유럽출신인 것이다. 이러한 피아노의 발달사를 관찰해 보면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가 피아노는 중산층의 악기라고 표현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크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성악음악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던 기악음악이 17세기에 이르러 그 자체의 독립된 주요 레퍼토리를 확보해 가는데 이는 바이올린의 발달과 그 길을 같이 한다. 악기의 여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바이올린은 그 조상을 11세기 아랍지방의 악기에서 찾을 수 있겠으나 근대적 의미에서의 바이올린은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등장한다. 오늘날과 같은 악기의 모습으로 제작된 것은 16세기 중반 마기니에 의해서였다. 이후 바이올린은 이탈리아의 크레모나지방을 중심으로 발전을 거듭하는데 아마티,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등 유명한 제작자들에 의해 악기가 표준화되고 뛰어난 음색을 지닌 악기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뛰어난 바이올린의 등장은 그동안 현악기들이 단순히 춤곡이나 노래의 반주로만 사용되던 것에서 독주악기로, 또는 강력한 합주악기로 그 위상을 끌어 올렸다. 더불어서 기악음악의 발달과 함께 합주에 있어서 모든 현악기군이 합주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 중에서도 바이올린은 협주나 합주에 있어서 가장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바이올린은 점점 강하고, 높으면서 아름다운 음색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이는 아도르노가 말한 데카르트 이후의 ‘이성의 시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악기로서 음악을 이루는 핵심적 음색을 발전해간다. 오페라는 그 탄생일이 분명한 음악양식이다. 16세기말 피렌체의 바르디 백작의 집에서 시와 음악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모여 인간성의 자유로운 표현이라는 르네상스 정신에 입각하여 그리스의 연극을 재현하고자 논의하던 끝에 1598년 그리스 신화(아폴로와 다프네라의 사랑)를 소재로 한 음악극을 공연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오페라로 기록되고 있는데 작곡자는 페리였으며 악보는 남아있지 않다. 악보가 남아있는 최초의 작품은 페리 작곡의 <에우리디체>로 1600년경 피렌체에서 프랑스 왕의 결혼잔치에서 공연된 것이다. 따라서 오페라는 돈 많은 귀족의 후원, 높은 이상을 가진 아마추어, 전문 음악인의 기술, 화려한 행사를 원한 권력자의 욕심 등이 합해져 만들어진 발명품인 셈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오페라는 몬테베르디에 의해 중요한 음악적 발전을 하게 된다. 1607년 몬테베르디는 오페라 역사상 첫 걸작품인 <오르페오>를 공연했는데 이전의 오페라들이 연극대사를 좀더 음악적으로 읊는 형식인데 반해 몬테베르디는 음악이 연극을 감동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다양한 악기들을 동원하여 목가적인 분위기, 무서운 저승의 짐승들, 저승신의 엄숙한 명령 등을 생생하게 묘사하였고 노래가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되었다. 오페라가 이러한 힘을 얻자 오페라는 유럽 가 지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가는데 각 지방마다 조금씩 변형되기는 하지만 기본정신은 귀족중심의 화려하고 구경거리 많은 이탈리아적 예술이었다. 즉 17세기의 절대권력을 가진 왕이나 영주들은 자신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위하여 많은 음악가들을 거느리면서 자주 오페라 공연을 하도록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 오페라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여흥거리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던 중 베네치아에서 상업성을 띤 공공오페라가 시작되었는데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을 장악한 공화국으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많은 부자들이 1637년 돈을 모아 오페라극장을 짓고 1층을 개방하여 오페라를 공연하였는데 이것이 유행하여 곳곳에 극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베네치아 오페라는 경비를 절감하기 위하여 합창단과 관현악단은 최소한으로 하였으나 청중을 동원하기 위해 부대장치는 개의치 않았고 아첨할 권력자가 없었기 때문에 시대상을 반영하고 권력자를 풍자하는 좋은 작품들이 많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이후 오페라는 전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이러한 사정으로 보아 바로크시대는 음악이 예술의 전면에 부각된 시대임에는 틀림없으며 음악장르에 있어서도 무든 가능성들이 실험, 검토되었고 중세이후로 지속되어 온 기독교의 영향에서 해방되어 종교적 도그마와 인생의 초자연적인 지배에 반항하는 근대적 의식을 싹틔워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는 근대 서구 문화의 진정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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