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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 | [서평]
『재미있는 의학의 역사』 (황상익 편저, 동지, 1991)
지역사회연구모임 (2004-01-29 15:13:07)
인간은 건강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의학은 이 건강을 지켜주는 수단들을 제공한다. 하지만 건강과 건강하지 못함이 단지 의학적(생물학적․생리학적) 요인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사회적․문화적 규정이 따르게 된다. 다시 말해 모든 사회적 요소가 의학과 질병에 영향을 주고 또한 의학과 질병은 거구로 인류역사의 발전을 제약하거나 추동한다. 예컨대, 동성연애는 도덕적으로 나쁜 것으로 간주되지만, 직업생활에서의 시달림으로 인한 스트레스 질환이나 심장지환은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사회적 건강수준은 사회의 과학 기술 발달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흑인보다는 백인들이 건강을 위한 자원들을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하층빈민보다는 부유한 상층이 물질적, 정신적 건강상태가 더욱 좋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건강 및 질병을 사회적 맥락과 환경의 관계에서 바라볼 수 있는 폭넓은 관점을 제공하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처럼 그야말로 상식을 넘어서고 있지만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는 글로 채워져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 책은 의학의 역사(곧 질병의 역사)를 통해서 질병은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더구나 우리의 의학사에 대한 독자적이고 나름대로의 연구가 부진한 그간의 우리 사회를 돌아볼 때 의학의 역사를 누구나 알기 쉽게 적고 있는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실로 크다 할 수 있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원시시대에서 근대세계에 이르기까지 의학이 어떻게 발달하고 있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2부에서는 산업 및 정치혁명과 현대의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글쓴이는 의학의 역사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를 “오늘날의 의학적인 문제가 병원건물이나 진료시설이든, 의학사상이나 보건의료기술이든 또는 보건의료직업이나 보건의료제도이든 모든 것이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4세기 페스트, 16세기의 매독, 17-8세기의 천연두․발진티푸스, 19세기의 콜레라․결핵, 20세기의 유행성 감기․암․심장병 등은 모드 인간의 역사와 사회 속에서 발생하였다. 1348년 한해동안 유럽인구 4분의 1을 없애버린 페스트는 십자군이 동쪽으로, 징기스칸이 서쪽으로 원정하던 동서교류의 시기에 유럽에 전염됐다. 페스트는 노동인구를 격감시켜 노동력의 임금화를 촉진시켰으며, 15세기 말-16세기에 유럽을 휩쓴 매독은 르네상스시대의 열정, 성의 자유풍조와 무관하지 않다. 1509년 베네치아 인구 30만 가운데 1만 1천 6백54명이 매춘부였고, 파리시민 3분의 1이 매독 감염자였던 것이다. 산업혁명을 통한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수준의 향상은 한편으로 대도시의 인구 집중에 의한 과밀현상으로 거주환경의 불결을 낳고,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건강의 문제를 심각하게 노출시켰다. 19세기 많은 사람들은 질병이 쉽게 만연할 수 있는 더럽고 밀집된 환경 속에 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산업화의 결과로 생긴 질병은 수 없이 많았다. 광부의 천식 또는 시커먼 가래침, 도자기공의 천식 또는 문드러진 폐, 놋쇠공의 학잘, 성냥제조공의 괴사 그리고 굴뚝청소부의 암이 그것이다. 19세기에 호흡기 질환을 알지 않는 공장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잇듯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산업과 관련된 직업병이나 산업재해 및 농업재해가 속출하기에 이르렀다. 이황화탄소나 수은중독, 농약중독, 그리고 VDT증후군 등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활동을 하는 동안에 발생한 질병이다. 현대인의 사망원인 중에서 가장 빈도가 높은 암, 80년대 이후 무섭게 전파되고 있는 에이즈도 현대문명의 성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암은 각종 화학물질의 증가와 상당히 관련되는 것이다. AIDS(후천성면역결핍증)는 동성연애자에게서 발생할 확률이 높으며, 이는 사회적으로 성모랄의 파괴에 기인하는 것이다. 동맥경화증, 당뇨병과 같은 대부분의 성인병은 식생활의 변화로 인한 새로운 질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산업화의 결과로 생겨나는 건강 및 질병의 문제는 언 사회나 똑같은 모습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또한 사회구조의 변화도 각기 다르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방식도 사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의 사회경제적 발전은 위생환경 및 영양상태의 진전을 가져왔으며, 과학기술혁명에 힘입은 의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평균수명의 연장과 출산율 저하 및 사망률의 감소를 낳았다. 그러나 현실의 의료체제는 있는 자, 가진 자만이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생의학적 모형이 의료과학기술의 발달을 가져와 중산층은 첨단과학장비를 동원한 진단을 받기 쉬워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질병을 개인적인 문제로 돌리고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하기를 조장하는 의료에 대한 개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만연으로 예방적 차원에서 국가의 보건의료조직체계가 빈곤층의 의료 및 건강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적 성격이 결여되고 있다. 흔히 의료의 질적 수준이 높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의료자원의 고급화를 가져왔다고 보아야 한다. 의료인력의 전문화를 가져온 반면에 의료기관 규모의 대형화, 의료장비의 고급화를 가져와 오히려 국민의료비를 증가시키고 가계비중에서 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높혀 놓은 것이다. 아마 오늘날의 인류는 역사를 통해 평균적으로 가장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건강상의 발전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인류사회의 전반적인 발전에 기인한다. 과학적 지식 자체는 엄밀한 객관성과 엄정한 중립성 위에서만 설 수 있지만 관학의 내용이 실제로 어떠한가에 따라 과학은 결코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누구를 위한 또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따라 과학과 의료의 민족성과 민중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국민 모드가 피동적인 관객이 되더라도 올림픽 1위를 하는 것과 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하더라도 누구나 스포츠를 즐길 수 있고 그것을 통해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 중 어느 것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일까? 국민 모드의 건강이야 어떻든 선택된 일부 국민만 초현대적 시설에서 세계적인 의료진의 시술을 받을 수 있고, 세계적인 학자가 배출되며 우주적인 연구 결과가 쏟아져 나오는 사회와 선진국적 가치체계로 보아서는 훌륭한 학자와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국민 모두가, 특히 소외당해온 농민과 도시빈민과 노동자가 의료에서도 인간으로 대우받는 사회 어느 쪽이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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