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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 | [특집]
아이를 잘 키우는 남자는… 『반쪽이의 육아일기』와 이땅에서의 <집안일>
오정요&#8228;전북민주여성회 사무국장 (2004-01-29 15:34:07)
대저, 애낳고 애 키우고 생활비 분할하여 시장보고 밥하고 빨래하고 철마다 옷바꿔 농속 정리사고 집안 정리에 손님 접대까지 등등의 <집안일>이란 무엇인가? 대체로 <바깥일>은 남자가 하고, <집안일>은 여자가 한다. 그것이 여자와 남자가 생물학적으로 지닌 특성상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좋고, 또 그리하는 것이 하늘의 도리에 맞는 자연의 이치라고 해도 좋다. 여자와 남자가 <집안일>과 <바깥일>을 서로 나눠 하는 것에 대하여 뭐라해도 좋으나,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일에 대한 평가이다. <바깥일>은 사회가 평가하고 사회 속에서 그 일의 의미며 댓가가 주어지는 대신, <집안일>은 한 가정에서만 평가받고 한 남자와 아이들 속에서만 그 일의 의미며 댓가가 주어진다.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한 순간도 빠짐없이 ‘일’을 하되, 그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정당한 평가와 확인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힘으로써 여성의 억압과 예속은 가속화되었다. ‘모든 인간은 사회,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을 인용한다면 여성은 사회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비인간적 삶으로부터의 여성해방’이라는 말은 앞뒤가 잘 맞는 진실된 슬로건이라 할 것이다. 물론 <집안일>의 ‘비인간적’인 측면이 그 평가와 댓가 때문만은 아니다. 그 평가와 댓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를 떠나 <집안일>이 지니는 성격 자체 또한 그 일을 하는 이의 ‘비안간화’를 가져오는 요소이다. 이를테면 <집안일>이라고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단순 반복적이며 <바깥일>과는 달리 ‘생산적’이지도 않는 일이라는 점, 하여 그가 누구이던간에 그 일을 하는 사람은 그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감수해야만 한다는 점 등은 따로 따져봐야만 할 문제인 것이다. 최정현씨가 그린 만화책 『반쪽이의 육아일기』는 바로 이 땅에서의 <집안일>에 대한 몇가지의 토론을 제공하고 있다. 주간 「여성신문」의 연재만화로 시작된 이 육아일기는 연재물이고 만화라는 특성상 대단히 단편적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만화’가 주는 재미는 그것을 어느정도 만회시켜주고 있다. 쉽게는 <집안일>은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여성만의 신성한 일>이라는 사회관념에 쐐기를 박는 것일 수도 있고, 좀 더 나아가서는 ‘여성의 억압에 반대하는 건강한 사고를 가진 남성’이 자신의 철학을 실천해나가며 겪는 ‘자기 훈련의 고백일 수도 있다. 이 글은, 이 한권의 만화책이 ‘만화예술적’으로 얼마나 성공하고 있느냐의 여부는 관심에 두지 않는다. <집안 일은 고루 나누어 해야 하는 것>이라 믿는 한 남자가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내가고 있는가, <사내가 부엌에 들락거리면 고추 떨어진다>는 훈련을 20여 년이 넘게 받아 온 한 남성이 자신의 그 ‘악성 종양’과 어떻게 싸우는가가 이 만화책에 대해 쓰는 이 글의 관심거리이다. 괜찮은 남자와 괜찮은 여자가 서로 만나 결혼을 하면 그 남자는, 여성도 남성인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을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사회정치적인 인가’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여성을 존중했고 곧 여성의 일을 존중했다. 누가 봐도 그 남자는 괜찮은 남성이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일’을 결혼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설령 그 이유로 결혼이 늦어지거나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한 남자에 의존해서 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떻든 한 사회의 젊은 청년으로서 그 여성은 누가 봐도 괜찮은 여성이었다. 이렇듯 괜찮은 남성과 괜찮은 여성이 결혼을 한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이들의 결혼생활에 ‘평화’가 깨지기는 단지 시간문제이다. 아무리 건강한 여성관으로 무장된 남자와 여자라 해도, 그들이 적어도 이 사회에 사는 한 그들 앞에 가로놓인 <집안일>에 얽혀있는 ‘장벽’을 뛰어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집안일>로 인한 여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괜찮은 남자와 괜찮은 여자가 서로 만나 결혼을 해도 문제는 마찬가지가 된다. 반쪽이의 눈에 보인 첫 번째 장벽은 이런 것이다. 아무리 똑같이 일을 하고 들어왔다 해도 시댁식구나 손님이 오면 그 접대의 몫은 온전히 여자의 몫이다. 피곤하기는 다 마찬가지이며, 그 상태에서 집안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집안 일에 공동으로 대처해 보겠다던 생각은 슬그머니 무시되거나, 최소한 단계적으로 유보된다. 흩어진 식구들이 만나는 즐거운 명절, 남자들은 모여서 고스톱으로 밤을 새우고, 여자들은 또 모여서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강도로 일을 하며 ‘즐거운 명절’을 준비한다. 그래서 명절은 여성들에게 또 다른 의미의 ‘노동절’이다. 반쪽이는 이걸 모두 다 보고는 있지만 속수무책이다. 가끔 아내의 눈치를 보거나 남자들의 고스톱판에 소극적인 것으로 대처할 뿐이다. 그러나 반쪽이는 이 이웃들의 오랜 관념에 어렵게 도전한다. 그 하나의 방식이 명절날이나 나들이 때에 ‘어떻든 애는 자기가 맡은 일’이다. 이 일마저 가끔은 ‘사내 자슥이 그게 뭐꼬?“하는 질책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아무튼 우선 반쪽이가 찾아낸 나름의 대응은 ’애라도 내가 봐주는 것‘까지 와 있는 것이다. 남성의 오랜 버릇 또한 반쪽이에겐 장벽 중에 하나이다. 애가 빽빽거리며 죽는다고 울어대도 자기는 손 하나 까딱 않은 채 오히려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를 향해 호통을 치는 친구를 만나고 오면, 슬그머니 화가 치민다. 부엌이며 온 집안이 쓰레기 더미 위에 올라 있어도 잠자코 책상에 앉아 일을 하는 아내를 보면, 가끔은 눈이 곱게 떠지질 않는 반쪽이인 것이다. 그런 아내를 째려보며 자신도 남들처럼 호통을 쳐보기도 했다가, 일을 한다며 책상머리에 앉아도 본다. 싸움은 ‘무승부’로 끝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결국은 반쪽이가 슬그머니 포기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적어도 반쪽이는 ‘대단히 권위적인 친구’의 모습이 일견 부러워 씩씩대다가도 그러한 자신의 버리지 못한 버릇에 스스로 백기를 들고 마는 것이다. 반쪽이는 최소한 자기와의 싸움에 일단은 승리한 셈이다. 반쪽이의 ‘여성 존중’의 길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벽은, 여성의 바깥일을 어렵게 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반쪽이의 경우 ‘집안’에서 <바깥일>을 하는 화가인 탓에 비교적 심각하지 않다 해도 ‘애를 돌보는 일’에 누군가가 매달려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포기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이 ‘양육’을 위해 여성이 그동안 해오던<바깥일>을 포기하거나, 또다른 사람, 이를테면 양가 부모 등 가족 중의 누군가가 이 일을 맡아주어야만 한다. 반쪽이가 믿는 한 그것은 애를 위해서도 좋지 않은 일이며, 양육의 문제로 누군가가 자신의 일을 포기해아만 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때문에 반쪽이는 ‘동네 탁아소’ 건설에 맹렬적이다. 시청에 가서 건의하고 동네사람들이 서로 모여 서명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뛰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반쪽이는 아이를 봐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별 수 없는 일이다. 반쪽이 가족과 이웃들처럼 ‘동네탁아소 건설’에 사람들이 많아지거나, ‘직장 탁아소 건설’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길만이 그 장벽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환상적인 역할분담 반쪽이네 가족처럼 각자가 ‘바깥일’을 하고 있고, 설령 이 일을 서로가 존중해주는 남자 여자라 해도 <집안일>에 관한 한 이런 저런 이유로 하여 서로 싸우고 어려움을 겪기는 매 한가지이다. 탁아소나 육아 휴직 등이 보장되지 못한 현실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문제의 <집안일>을 앞에 두고 집안 안에서 벌어지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갈등 역시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다. 그 갈등의 출발점은 대체로 이러하다. 자신이 생각할 때 여늬 남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집안일>을 군소리 없이 해내고 있는 자신의 노고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은 채, 아직도 완벽하게 분담하고 있지 못한 현실만을 자꾸 문제삼는다는 것이 남자의 항변이고,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째서 완벽한 분담을 못하느냐는 것이 여자의 입장이다. 서로가 조금치도 손해볼 수 없는 이 항변과 입장 사이에서 여자의 눈에 나멍은 ‘틈만 나면 배운 버릇을 핑계삼아 게기는 것을 일삼는 것’으로 보이며, 남자의 눈에 여성은 ‘이 시대 남성의 현실을 무시하는, 그래서 넉넉함이나 어머니 품성을 갖고 있지 못하는 경직된 여성’으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만고불변의 진리는 있다. 여성과 남성간의 갈등과 모순이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어쩌고 하는 말이 그것이다. 가사노동을 분담하지 못하여 이혼했다는 사람은 없는 걸 보면 분명 이 말은 맞는 말인 듯 하다. 그러나 웬걸, 하루에도 수 십번씩 ‘도대체 이런 말은 누가 만들어놔서 사람 속을 더 긁어놓는고?’를 생각한다. 적어도 그 순간 순간 만큼은 남성의 그 못된 버릇은 여성의 적이요, 여성의 그 경직된 사고는 남성에게 진저리 쳐지는 그 무엇인 것이다. 이런 갈등이 반쪽이와 같은 남자라 해서 없을 수 없다. 여성의 일을 존중한다는 이유 때문에, 반쪽이가 담당해야만 하는 <집안일>은 엄청 많기만 하다. 완벽한 분담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꾸만 자신이 해내고 있는 <집안일>을 열거하고 싶어진다. 그리곤 ‘또 뭐가 있지’하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자랑삼아 얘기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반쪽이가 하고 있는 일의 면면이라고 하는 것이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이지, 여성과 똑같이 주체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여성의 그 ‘넉넉한 어머니 품성’은 마침내 인내를 잃게 된다. <집안일>을 놓고 똑같은 양과 질로 분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설령 열 번 하는 설거지를 다섯 번씩 똑같이 나눌 수는 있을지언정, 언제쯤 떨어질 간장이며 된장을 미리 생각하는 것은 여서의 몫이다. 이걸 놓고 여성과 남성의 천성적인 마음씀이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어떻든 20여 년이 넘도록 ‘집안일은 여자가 하는 것’이라 배워 온 오랜 교육은 알게 모르게 이렇듯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아직도 여전히 <집안일>의 전문가는 여성이며 남성은 단지 보조자일 뿐임에는 어느 집이나 다르달 것이 없다. 그리고 이것이 쉽게 시정될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에서 반쪽이가 찾아낸 것이 ‘역할분담’이다. 같은 일을 둘이서 함께 나눠하는 분담이 아니라, 그 역할 자체를 분담하는 것이다. 반쪽이는 <애를 보는 일>을 제외한 모든 집안 일에서 해방된다. 나머지는 아내의 몫이다. 물론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던 방식은 아니다. <집안일>에 예속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또다른 분업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쪽이와 같은 갈등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즉 집안 일이라고 하는 것이 현재의 구조 속에서 완벽하게 분담될 수 없는 것이며, 아무리 ‘여성해방;’ 어쩌구를 외쳐대도 결국 이 공백을 매꾸게 되는 것은 여성이라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비록 궁여지책이긴 해도 반쪽이의 대안이 갖는 ‘현실성에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다. 실로 그 오랜 교육과 남성 중심의 사회 체계는 놀라운 것이어서, 아무리 알려주고 요구해도 집안 일에 대하여 남성이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길은 쉽게 열리지가 않는다. 그 사이 사이를 별 수 없이 여성이 매꾸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오르고 올라 못오릴리 없지만, 그 오르는 순간에도 여성이 더 많이 흘려야 할 땀을 인정한다면, 우선은 몇가지의 일로부터라도 완벽한 분담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대단히 현실적인 것이다. 물론 rfl해도 남성에 비해 여성이 흘려야 하는 담은 더 많지만 말이다. 애 키우는 재미에 새로 태어나는 남자 반쪽이는 이 역할분담을 통해 좀 더 <집안일>에 주체적인 사람이 된다. 아이의 성장을 낱낱이 지켜보며 ‘가끔 선물이나 사다주는 아빠’가 아닌 진정한 부모 중의 한 사람이 되어가며, 또 이를 통해 여성의 문제, <집안일>의 문제까지도 더 폭넓게 바라보게 된다. 또한 자신이 그 역할을 하지 않았으면 분명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버렸을 ‘부모의 안타까움과 기쁨’을 알게된 것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 기쁨을 여지껏 여성만이 독점해 온 셈이라며, 부모로서의 남성의 권리를 주장하기도 한다. 아이가 자라는 환경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임하다보니 <집안일>의 폭넓음과 그 어려움을 좀 더 바로 보게 된 반쪽이는 어느새 여성운동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괜찮은 남자가 되기 위한 험난한 길 위에서 괜찮은 남자와 괜찮은 여자가 서로 만나 백년해로하며 잘 산다면, 그것은 필시 그 여자가 ‘잘못된 여성관’과의 싸움에 때로는 현명하게 때로는 모지락스럽게 지치지 않고 임해 온 결과이며, 또 하나는 그 남자의 괜찮은 면면이 보통은 넘어 ‘썩’ 괜찮은 남자가 되기 위한 자기 노력을 한평생 갈고 닦은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박수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 후자쪽이다. 적어도 지금의 남자와 여자, 그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이뤄 잘 살기 위해서, 그동안의 버릇이며 생각이면에 버려야만 하는 것이 더 많은 쪽은 남자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가정>은 상대적으로 그 집안의 ‘남자’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렸는가에 따라 결정지워진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여성의 주체적이고 자신감 있는 대처에 따라 남성의 그 ‘버리는 일’의 성공 여부가 가려짐은 물론이다. 한 가정 안만을 그 무대로 한다면, 그리고 그 무대에 각자가 주연으로 서야 하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직 이 무대에서 ‘여자만한 남자는 없는 것’이 현실이며, 이 현실은 그 무대 위에서 주연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여자 보다 더 많이 새로 태어나야만 하고, 더 많이 갈고 닦아야만 하는 남자의 운명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쯤은, 집안의 주연으로 서기 위해 아직도 싸우고 있는 이 남자, 반쪽이의 만화책 한 권 사들어 남편에게 건네 볼 일이다. “남편이여! 어쩌다 남자로 태어난 죄로 ‘괜찮은 남자’ 되어보겠다며 지금까지 이뤄온 것 이렇듯 자랑스러우나, 어찌하오리까, 아직도 더 가야할 길이 이렇게 넓고 깊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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