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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 | 칼럼·시평 [시]
내소사와 슈베르트
우미자(2004-01-29 15:40:08)


10년 전 대학원 시절의 일이다.
개울 방학이 막 시작될 무렵, 도서관에서 논문자료를 뽑아 가지고 나오다가 영춘과 영길 시인을 만났다. 그 때 그들은 대학 졸업반이었고 우리는 모두 등단하기 전이었다. 영춘은 그 날 내소사에 ‘스님을 만나러 가는데 함께 동행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해왔고 우리는 그냥 그 자리에서 마음이 일치되어 내소사로 향했다.
우리들이 부안읍에서 내려 내소사에 당도했을 때는 저녁식사 시간 무렵이었다. 내소사 행은 내겐 그 때가 두 번째였는데 저 뒤로 관음봉이 우뚝 절경을 드러내고 저녁 연기 피어올라 모색에 젖는 산사와 함께 범종소리가 어우러져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대로 산승이 되나보다 하였다.
‘스님은(그 때 우리 대학 국문과에 편입하여 소설 창작을 수강하고 있었다)우리를 몹시 반가와했다. 그 날밤 내내 우리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문학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더구나 ’스님은 귀빈이 오면 내놓는 다는, 귀물인 내소사 홍시를 깊은 곳에 비장(?)해 두었다가 내어 놓은게 아닌가. 그 날밤의 홍시는 늦서리에 잘 익은 것이라서 우리 넷이 먹다가 넷이 다 죽어도 좋을만한 기막힌 맛이었다.
‘스님은 자칭 땡초승이라면서 산문아래 가게에 나아가 막 소주와 오징어 땅콩을 사 갖고 와서 우리에게 권하며 자신도 주량은 가히 주당에 가까우리 만치 잘 마셨다. 내겐 쇼팽의 「플로네이즈 환상곡」을 들려주면서 자지가 좋아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뿐 아니라 팝송의 한곡 중 ’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할 때‘라는 노래를 ’한 아저씨가 한 아줌마를 사랑할 때‘라고 제목을 바꾸어 들려주기도 하는 익살꾼이었다. ’스님은 스님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문학도였다. 아니, 문학에 생애를 건 시인이었다. 그 밤의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고 즐거웠던 추억은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다.
삼경이 넘었을까. 나는 목이 말라서 문을 열고 대웅전 뜨락으로 내려섰다. 사위는 죽은 듯 고요와 적막에 싸여 있는데 지창에서 비쳐 나오는 호롱불빛과 하늘에 걸려 있는 푸른 달, 이름 모를 새소리, 그리고 맑은 샘물. 아! 이 순간은 내게 또 하나의 세계로의 문을 열어 주었다. - 지리산 등반길에서였던가, 피아골의 산 중턱에서 한밤중에 눈떠보니 그 하늘의 빛나던 별, 별, 별들-
나는 황홀경에 전율이 왔다. 방금 그렇게 즐겁고 유쾌하던 시간 속에서 빠져나와 나홀로 우주를 껴안은 듯한 경악감. 태고의 신비로움 속에 나는 서 있는 듯했다. 그 밤의 샘물 맛은 영원한 약수가 되어 지금도 내가 목마를 때마다 목젖 한 부분을 축여주는 것이다.
나는 그 고요한 적막의미, 황홀한 선경에 도취되어 내 방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깨어날 줄 몰랐고 그 가슴 두근거림으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먼동이 터오자마자 대응전 뒤뜰 대숲을 빠져나와 청련암에 오르기로 했다.
영춘, 영길시인은 ‘스님과 아침잠에 빠졌는지 보이지 않고 나는 초 새벽 안개가 걷히는 청련암을 향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뗄 때마다 또 다른 심비감에 온 몸이 휩싸였다. 눈감고 서 있으면서도 깨어있는 잡목과 잡목 사이로 날아다니는 겨울새, 지난 가을 떨어져 쌓인 낙엽이 아직 마른 잎 냄새를 피워 올리며 부드럽게 밟히는 감촉은 나를 그대로 산희(山姬)로 만들어 주었다. 청련암에 올랐을 때 감회! 그것은 나를 또 하나의 완전한 신선으로 화하게 했다.
아침을 먹고 우리는 직소폭포에 가기로 했다. 동자승의 작은 운동화를 빌려 신고 가는 내 발걸음의 가벼움이란!
긴 오솔길과 넘기 좋은 고개 하나, 그 너머 직소폭포의 살얼음, 모두가 처음 만나는 신선함으로 나의 원 감각을 채워주었다.
돌아올 때 고개 마루에서 보던 곰소항과 죽도. 고요하면서도 그린 듯한 서해안의 멀리 뻗쳐있는 해안선과 고깃배 몇 척,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이들은 환상과 그리움으로 나를 한없이 눈물에 젖게 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와서도 내소사에서 만난 최초의 신비와 경이감으로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우연히(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른다)라디오 FM에서 내 생애의 또 다른 한 면을 채워준 슈베르트를 만났다. 그의 현악 5중주.
처음엔 곡명도 모르고 듣다가 갑자기 왼몸에 전율을 느끼게 하는 듯해 바로 녹음해 두었다가 그 이튿날까지 무려 50번을 들었다. 그 때 그 곳은 나의 온 생애를, 나의 그리움과 아픔과 고통과 처절함까지도 모든 것을 싸안은, 그야말로 나의 가장 깊은 곳의 응집된 것들만을 아주 절묘하게 표현한 곡인 듯 싶었다. 나는 그 때 내 인생의 자일을 필사적으로 타고 오르다가 한가운데가 툭 끊어져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었다. 그 피흘림과 그 허망감과 고통과 비애를 슈베르트는 현악 5중주를 통해서 어김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 곡을 레코드로 구하는데 무려 석 달이 걸렸다. 무척 찾기가 힘들었다. 그 겨울은 슈베르트와 함께 지냈다.
그러다 그 겨울이 갈 무렵 어느 날 밤 불현듯 스쳐 가는 내소사 전경과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
“내소사 연가”는 그 밤에 쓰여졌다. 그리움과 환상, 고통과 절망, 비애와 고뇌, 우수과 갈망, 이런 내 젊은 날의 모든 것이 뒤섞인 영과육의 총체성의 결정체,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나 혼신의 다해서 내 몸에서 내 영혼 속에서 흘러나왔다. 이 시는 내게 ‘등단’이라는 가시관의 영광을 주었고 그 뒤로 내소사는 내게 연인이 되었다.
나는 살아가면서 절망적이면서도 따뜻하고 차가우면서도 빛나는 시, 아픈 듯 하면서도 건강한 정서의, 보이지 않는 듯하면서도 투명한 시, 해도 필경은 우리를 노래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노래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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