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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 | 연재 [문화와사람]
우리아이들을 살리자
조명원(2004-01-29 15:42:20)


요즈음 국민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이를 두고 “대학입시 12년전”하고 비장한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는 웃지 못할 얘기가 들린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국민학생을 위한 영어. 수학 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이쯤 되면 이 땅의 아이들은 대학입시를 위해 태어난 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듯 싶다. 이 일생일대의 목적을 코앞에 둔 고3학생들의 생활은 직접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새벽 네시에 일어나 학원으로 달음질치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다시 학원으로 갔다가 집 근처 독서실에서 새벽 한시까지 앉아 있는 다는 어느 학생의 경우가 그다지 유별난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누가 이들에게 공부기계가 될 것을 강요하고 있는가. 학생들로하여금 성적비관이란 고리표를 붙이고 옥상에서 뛰어내리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구의 것인가....
두 해전에 “더이상 우리의 아이들을 죽게 할 수는 없다”고 외치며 일어섰던 선생님들이 있었다. 전에는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고, 지금은 전교조 전북지부 연대사업부를 맡고 게신 윤양금 선생님도 그 때 그 사람들중의 하나다.
86년 초에 결성된 Y교사협의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한 그가 교육운동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격변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 있었다. 대학 3학년때 10.26을 맞고, 사회진출을 예비하는 졸업반 시절에 ‘80년 민주화의 봄’에 이어 5.17을 경험하면서 느낀 갈등은 다음해 임피중학교로 첫 부임한 후 보다 현실적이고 절박한 문제로 다가왔다. 가난한 농민이 아들 딸들은 붓 한 자루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미술시간에 임했고, 그런 학생들 앞에서 펼쳐보여야 하는 자신의 미술적 인식 내용은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것일 수밖에 없었다. 교사들은 잔디가꾸기, 돌나르기, 보리베기, 모심기 등 학교가 필요로 할 때마다 아니면 면에서 요청해올 때마다 즉각 동원되는 학생들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고, 기껏 교장에게 이의를 제기해봤자“위에서 시키니까 나도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교장과 싸워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데서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이 생겨났다. 개인적 차원에서 대항할 힘이 없으니 자연 목소리를 합하게 되었고, 그 첫번재 시도가 Y교사들의 ‘교육민주화선언’으로 나타났다. YNCA에서 소모임 형태로 꾸려졌던 협의회의 성격은 철저한 정치적 중립, 그것이었다.
당시 서명자 중 유일한 기혼자였던 그는 육아문제 때문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했다고 한다. 모임에 나갈 때면 자극을 받지만 생활에 묻혀 지내다 보니 시각이 둔화되는 건 피하기 어려웠고 또 혼자서 하는 투쟁이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그 무렵 Y 교사협의회에서 교사협의회로 탈바꿈한 모임은 도교육청을 상대로한 단체교섭에서 아무런 구속력을 행사할 수 없는 조직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그들은‘힘을 갖기 위해서’ 88년 1년동안 노동법개정운동을 벌이는데, 교육 공무원도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도록 제한요건을 삭제할 것과 노동3권보장을 요구하는 것이 그 내용 이었다. 여론으로부터 “스승의 지위를 격하시킨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하는데 기여했고, 실제로 산업노종자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국회는 개정안을 통과시켰지만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전교조는 비합법조직으로 탄생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가혹한 투쟁의 길이 시작된다.
1989년 5월 28일, 연세대 운동장에서 이루어진 전교조 결성식은 말 그대로 싸움이 시작이었다. 하루전날인 토요일 오후에 상경하기 위해 벌여야 했던 윤양금 선생님(이때는 옥구고등학교를 거쳐 금구중학교에 재직중)과 교장, 교감, 형사로 묶어진 저지대와의 숨박꼭질은 코미디 프로에서나 보여짐작한 해프닝이었다. 뒷문으로 빠져나오다 교감에게 발각, 교장실로 끌려가고, 거기 대기하고 있던 형사는 “당신이 결혼만 안 했으면 오늘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위협(?)하고, “절대로 안 올라가겠다는 다짐을 하고서야 풀려나올 수 있었던 상황을 회고하며, ”그 당시 거의 활동을 안하고 있던 내게까지 그렇게 집요한 탄압을 하는 걸보고 오히려 전 교조 일이 내게 ‘숙명적인 일’로 느껴졌다.“고 토로하는 그의 모습은 수줍음 잘 타는 순박한 시골 여선생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박한 열정이야말로 무엇으로도 막아내지 못하는 힘의 토양일 터, 장학사들이 포진해있는 터미널에서는 안경을 벗는 등 나름대로 ‘위장’을 할 줄 아는 지략가 이기도 하다. 집에 들러 아이를 데리고 서둘러 빠져나오지 않았더라면 거기까지 따라붙은 교장과 형사에게 도로 잡히고 말았을 숨막히는 순간을 생각하면 코미디 운운할 때의 느긋함이 부끄러워진다. 그 날의 행사가 어떻게 치러졌는지는 TV뉴스와 신문보도를 통해 이미 보고 들어 알고 있는 바다.
그로부터 전원 해직사태를 맞는 89년 8월21일까지 두 달 남짓, 그들은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전교조 지키기 운동을 전개한다. 7월 23일부터 열흘 간에 걸쳐 1000여명이 함께 한 명동성당 단식투쟁은 그중 가장 힘들었고, 또 그 만큼 의의를 지닌 것이기도 했는데, “그 기간동안에 인생을 다 배운 것 같다.”며 교육, 민주화 운동의 새로운 인식과 각오를 다지게 해준 그 때의 경험이 지금까지의 투쟁을 지탱하는 저력이 되었다고 스스로 평가를 내리는 그들이다.
그러나 권력의 힘은 막강하여 하나 둘씩 학교에서, 학생들로부터 거리로 쫓겨 나가는 사례가 속출할 즈음, 윤 선생님에게는 개인적인 시련이 함께 닥쳐든다. 남편이자 민미련 회원이신 송만규 선생님이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건으로 수배되기에 이른 것. 계속 도피생활을 해야하는 남편의 처지 때문에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격려해주시는 친정, 시댁어른들 덕분에 흔들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고. 그 당시 탈퇴각서를 받아내기 위해 부모를 이용, 압력을 행사했던 저들의 행각- 금구 중학교에서 같이 전교조에 가입했던 여선생님 한 분은 어머니, 큰아버지, 작은아버지까지 동원된 탈퇴 압력에 못 견뎌 울면서 각서와 사표를 동시에 던진 일도 있었다.-을 돌이켜 볼 때 이 땅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겪는 고통은 그대로 우리 민족, 우리 역사의 고통 위에 포개어진 모습으로 드러난다.
활동내용에 상관없이 오로지 각서여부에 따라 취해진 징계의 여파는 도리어 학교에 남아있는 교사와 학생들에게 더욱 심각하게 나타났다. 개학과 함께 출근 투쟁을 하는 동안 제일 곤혹스러웠던 일이 학생들에게 알리는 거였는데, 그들이 아이들이 여린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입술을 깨물어야 했는가는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방학중 언론의 보도를 통해 어렴풋이 알게된 아이들은 커다란 눈망울로 물어왔다. “전교조가 뭐예요?”, “왜 가입하셨어요?” 될수록 간단히 답변했는데도 아이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학생을 위하는 선생님은 전교조에 가입했다’고 나름대로 판단한 아이들은 이제 거꾸로 비가입교사를 향해“왜 선생님은 가입하지 않으셨나요?” 라고 묻게 되었다. 새로 배정된 담임선생님을 학생들은 붙여주지 않았고, 조회 종례시간에만 참석하는 ‘우리 선생님’이 ‘가버리실까봐’ 불안해 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된다는 건 ‘아이들에게 못한 짓’이었다. 결국 일주일만에 이임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처음엔 응하지 않다가 마지못해 허락한 학교의 분위기는 그나마 다른 데에 비하면 우호적인 편이었다. ‘선생님이 떠나시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학생들은 종일 수업고부‘ 도시락 먹기 거부 농성 등으로 맞섰다. 심지어는 개구멍이 나있는 산주변을 모조리 에워싸고 지키는 학생들의 투쟁은 처절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2년뒤, 지금은 3학년이 된 제자가 스승의 날 편지를 보내왔다. “이제는 전교조를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때, 선생님이 절 버리고 가신 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해직 이후의 생활은 이전보다 더 힘들고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제 시간 여유도 갖고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를 필요로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던 것이다. 우선 시급한 조직복원사업과 함께, 정부의 압력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각서를 썼던 교사들의 심리적 압박을 극복하도록 하는 일이 주된 과제였고, 거의 매 달 해내야 하는 홍보행사, 대중집회, 문화사업, 교육사업 등으로 해직교사들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교내에서 원상복직 서명운동이 다시 일어나고 후원회원과 신규회원이 확산되는 등 전교조가 제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기까지 그들의 투쟁 뒤에 감추어진 피눈물나는 사연들을 어찌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전교조의 주인은 현장 교사들이고,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의 조력자로서 대 국민 교육운동과 학부모운동이 될 것”이라며 한 숨 돌리는 윤선생님에게서 단단하고 품이 넓은 바위가 느껴진다.
지금 전교조에서는 참교육 실천 연구 모임, 교과모임, 학생자치활동을 위한 교육사업, 우리 문화정착운동 등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을 해나가고 있다. 그것들은 반공이데올로기와 지배권력의 정당성을 주입시키는 교가내용을 바로 잡는 데서부터 성교육연구자료의 배포, 매 달 한번씩 실시되는 동일주제 동시 수업자료집 분재,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겨냥한 건강한 놀이문화 보급... 등 다양한 내용으로 ‘민족. 민주. 인간화교육’을 향해 매진하는 착실한 걸음걸이이다.
그 중에서도 여성부장을 맞았던 윤양금 선생님이 관심은 성차별교육에 쏠린다 교과서에 실려있는 성차별 사례모집을 기초로 교사들의 인식전환까지 함께 이뤄내야 하는 열악한 조건 때문에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연구단계에 머무르고 있음을 안타까워 한다. 한편으로, 다른 직장에 비해 여교사의 사회적 불이익이 상대적으로 적은 학교지만‘ 여교사를 위한 탁아방 설치’ 같은 문제는 꼭 필요하고 또 가능한 일 이라 는게 그의 의견이다(실제로 서울의 국민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다) 조합원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여교사들이 대부분 진보적 의식이 소유자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그들이 결혼으로 말미암아 아이들이 매달려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되는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얘기다. 스스로도 육아문제로 고심했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우선 “아이는 사회가 키워준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지만, 아이에게 언제나 당당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모르는 그가 아니다. 사실 할머니 밑에서 자란 둘재 딸아이가 아빠하고 쉽게 적응하지 못해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또 하나 여성부장으로서 그가 해낸 일 중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주학부모회의 구성이다. 학부모들에게 전교조의 참뜻을 알리고 그들로 하여금 교육에 참여함으로써 교육자치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으로, 궁극적으로 ‘학생, 교사, 학부모가 만다는 자율적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지금 까지 아이를 볼모로 학교에 입시위주 교육을 강제해왔던 학부모들의 역기능이 그들을 깨우침으로써 순기능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믿는 그는 민주적 학부모조직이야말로 주부운동의 한 부분으로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학교의 시녀에 지나지 않았던 기존 육성회(태안 서남중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을 생각해 보자)와는 질적으로 다른, 교사조직과 함께 학교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견제 세력에 될 것이다.
인력난으로 인해 연대사업부로 자리를 옮겨 앉은 그에게 여성문제는 아직 다 해결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부담을 고스란히 남겨놓고 있는 듯하다.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대학입학을 걱정해야 하는 우리의 아이들, 그리고 학부모들을 살리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그보다 먼저 우리의 교육이 어쩌다 이 지경에 되고 말았을까? 교사는 태부족이고, 콩나물시루의 콩처럼 빼곡이 들어 찬 밀집 수업, 과중한 수업과 잡무에 짓눌린 교사들, 오락실이나 디스코텍이 아니면 갓 곳이 없는 건전한 놀이문화의 부채, 극도의 개인주의와 상호불신을 조장하는 내신 성적제, 그 모든 것을 총괄하는 정부의 우민화 정책...... 끝이 없을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하나? 윤양금 선생님의 답변은 거침이 없다. “전교조를 살려야 교육이 산다”.
그리고 이어서 한 마디, “빨리 학교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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