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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 | 연재 [문화저널]
연길에서 만난 북한학자들(1)
하우봉(2004-01-29 15:45:43)


1. 최근 남북한 학자들이 같이 참여하는 형식의 국제학술토론회가 자주 열렸다. 특히 이번 여름방학을 기해서 중국의 조선족자치주인 길림성 연길시에서 많이 개최되었다. 예컨대 연길시에서 개최된 한민족의학자대회, 장춘시 길림대학에서 열린 인문지리학 학술회의를 비롯하여 8월중만 하더라도 연변대학에서 개최된 한민족대회, 한민족과학기술자대회, 서울에서 개최된 한민족 철학자대회 등 남북한 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학회가 계속 열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북한측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대부분의 대회가 북한학자들이 불참함으로써 모처럼의 기회가 그 의의를 상실해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비해 국제고려학회와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원이 공동주최하여 7월 28일부터 31일까지 나흘간 중국 연길시에서 열린 ‘코리아학 소장학자 국제학술토론회’에는 남북한의 소장학자들이 다수 참가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필자도 이 학회에 참가하였고 누구보다도 북한측 학자들과 많은 대화를 가졌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상당한 행운이라고 생각된다.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 물론 중국여행이 처음인 만큼 그 자체에 대해서도 기대가 있었지만 역시 첫째는 북한학자들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고 두 번째 바램은 백두산 등정이었다. 그런데 7월 26일 출발하는 날 신문에 최근 중국 길림성 장춘에서 열린 인문지리학회에서 북한학자들이 발표자와 논문제목을 제출하였는데도 아무런 설명 없이 불참하였다는 시가를 보고 과연 이번 학회에 북한 학자들이 참가할 것인가 우려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북한측에서 5.60명 규모로 대거 참가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는데, 출발 전 최종적으로 듣기로는 12명이 참가한다고 하였다.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다행히 북한 측 학자들이 예정대로 참가하게 되었다. 연길시와 주최측의 사정도 있었겠지만 학회참가자들이 모두 한 호텔에서 투숙하는 바람에 당초의 기대이상으로 북한학자들과 친숙해 졌고,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또 이 기간 중 백두산혁명 유적지를 답사하던 북한측 청년들 30여명도 같은 호텔에서 머물게 되어 만나기도 하였다. 이들과 함께 토론하고 저녁에는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나눈 대화들 중에는 나로서는 새로운 것이 적지 않았고,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했던 몇 가지 사실들을 알고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현재의 나로서는 상당히 소중했던 체험이라고 여겨지는 만큼 주제넘음을 무릅쓰고 문화저널의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2. 머나먼 길을 돌아 7월 27일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 도착하였다. 우리들이 투숙한 호텔은 연길에서 제일 시설이 좋다는 백산빈관이었다. 12층 건물에 객실이 140개나 되고 회의실 등 부대시설도 괘 훌륭해 학술대회도 여기서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 우리들이 도착한 날 북한측 학자들도 마침 당도하여 로비에서 마주치게 되었으나 눈인사 정도만 교환하였다. 이튿날 오전에는 북한과의 접경지역인 도문시를 구경하고 오후5시 학회등록을 하였다. 참석자는 발표자와 주최측, 진행자, 고문단을 합쳐 300명쯤 된다고 하였다. 나라별로는 한국측이 70, 북한12, 일본 30, 중국 90, 구미지역 30여명이 참가하였다. 주최측의 대회 운영방식, 호텔의 수용능력 미흡, 발표논문집의 미발간 등 미숙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국제학술회의의 면모를 갖추는 것 같았다.
7월 29일 연변예술극장에서 개회식을 가졌는데, 이 때 북한 학자들과 정식으로 수인사를 하였다. 이 학회는 코리아학(한국학, 조선학도아닌 다소 우스꽝스러운 절충의 산물이다.)소장학자 학술토론회인 만큼 종합적인 성격을 띠었다. 언어, 문학, 역사, 경제, 철학 종교, 사회 문화 교육, 정치 법률 등 7개 분과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나는 발표내용이 실학사상이라서 그랬는지 철학 종교부회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학회는 백산호텔의 7개 회의실에서 부회별로 나누어져 사흘동안 발표, 토론식으로 진행되었다. 한 곳에서 같이 투숙하면서 회의를 하였기 때문에 시간낭비 없이 집중할 수 있었으며 그만큼 밀도가 있었다. 또 참가자들끼리 인간적으로 친숙해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서 좋았다.
전체적으로 보아 여러 분야를 망라하는 이런 방식의 학회는 종합적이기는 하지만 수준 면에서 문제가 없지 않았다. 대회전체의 주제를 선정하고 그에 따라 발표자와 논문을 선정하는 보다 세련된 준비와 진행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한국학에 대한 소규모 ‘올림픽’적 성격을 띠는 이런 모임도 나름대로 의의는 있으며, 특히 40세 이하의 소장학자를 중심으로 학술회의를 구성한 것은 신선한 아이디어라고 여겨졌다.
작년 오사카의 제3회 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때도 그랬지만 이 모임은 단순한 학술토론회에 그치지 않고 인적교류(친목도모)를 중시하기 때문인지 저녁에는 가무를 포함한 만찬순서가 꼭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 대회의 경우에는 사흘 연속 만찬회가 있었다. 첫날 저녁 환영만찬회의 경우 연변가무단의 공연이 있었고, 사이사이 남북학자들의 순서도 겯들여졌다. 남남북녀가 이중창으로 한 <우리의 소원은 통일>,<조국은 하나다>는 모든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이어 민속음악에 맞춰 모두 흥겹게 춤을 추었다. 남한측 인사들에 비해 중국의 동포와 북한측 인사들이 춤사위가 능숙하였다. 이런 식의 행사는 여느 학술대회와는 다른 독특한 것이지만 역시 코끝이 찡한 감동을 주기에 족하였다. 그만큼 우리는 정이 많은 민족일까, 아니면 너무 어렵게 만난 감동대문일까?
이튿날에는 연변자치주의 청년단체와 장애인복지회가 주최하는 파티가 있었다. 끝날 무렵 휘호쓰기 순서가 있었는데, 나는 ‘民族統一誠心誠意’ 여덟자를 쓰고 ‘독립운동의 聖地에서 한 부끄러운 놈 씀’이라고 하였다. 취중이었지만 구호와 선전만 난무하는 속에 통일에 대한 실질적인 의지와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부끄러움을 표현할 것이었다. 마지막날 폐회만찬회는 한국 측의 인사가 마련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경우나 참석자들간의 우의증진에 도움이 되었고 특히 북한측 학자들과 친숙해지는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

3. 북한에서 온 학자들은 12명이었던 만큼 모두에게 관심이 표적이 되었다. 특히 남한측 학자들은 앞을 다투어 그들과 접촉하여 하여 북한측 학자들의 명함이 동이 날 지경이었다. 북측 참가자중 홍일점이었던 최영옥(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부교수)은 당연히 히로인이 되었고, 세련된 매너를 가지고 능란하게 응대했던 자성남(군축 및 평화연구소 연구사)도 인기를 누렸다. 두 사람은 모두 35세라고 하는데 엘리트라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자성남은 이번에 참가한 인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몇 차례의 해외여행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도 상당한 실권을 가진 인물로 보였다.
우리들은 (팔자, 박명규교수, 김현영 국사편찬위 연구사) 다행히 이들과 제일 먼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얘기도중 나이를 비교해 보니 자성남, 초영옥, 박명규, 김현영 네 사람은 동갑이라서 즉석에서 동갑계를 만들었고, 나는 고문(?)자격으로 끼이게 되었다. 이후 이들과는 계속 친하게 지냈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져 다른 사람들의 시샘을 받기도 하였다. 또 역사부회에 유일하게 참가한 김세민씨와도 공동관심사가 많았던 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7월 31일 마지막날 저녁에는 폐회 만찬 후 북한측 학자들이 묵는 방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면서 많은 대회를 나누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간 진로소주(종이팩) 7개와 고추참치, 훈제오징어 등을 가지고 갔고, 북측에서는 개성인삼주를 내놓앗다. 우리는 인삼주를 마시고 북쪽 사람들(김세민, 자성남, 최영옥, 리철룡등)은 진로소주의 마셨는데, 나중에는 소주와 인삼주를 섞어 즉석 ‘통일주’를 만들어 마셨다. 밤이 늦어 리철룡, 최영옥 씨가 나간 뒤 마침 원광대학교의 김도종, 김갑동 교수가 합석하게 되었다. 술잔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첫날의 다소 어색하고 경직된 태도는 사라지고 인간적이고 솔직한 견해들이 오갔다. 우리들은 즉흥시를 읊고, 노래를 같이 부르며 춤을 추었다. 요즘 북한에서 유행한다는 ‘휘파람’이라는 노래를 배우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껴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통일은 바로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우리들은 식민지와 분단으로 점철된, 민족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고난의 세기인 이 20세기를 통일로써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으며, 그것은 앞으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해야할 사명이라고 서약(?)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남북자유왕래가 실현되었을 경우 서로가 가장 먼저 초대하거나 상대방 집을 방문하자고 다소 막연한 약속을 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앞으로 이런 모임이 있을 때에는 북측에서 보다 많은 학자들이 참가해줄 것을 권유하였고, 김세민씨와는 내년북경에서 개최되는 조선학 학술대회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헤어질 무렵 우리는 그들에게 선물로 가져간 전주부채를 주었는데, 김세민씨는 자신의 은사인 홍기문선생께 그리겠다고 하여 부채에 ‘홍기문선생님게 남한의 후학들 올림’이라고 써서 주었다. 자성남은 나에게 준 「평양」이라는 선전책자에 ‘하우봉형님께 동생 성남 올림’ 이라고 서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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