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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0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우리에게 월남전은 무엇인가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
박현국․자유기고가 (2004-01-29 15:46:40)
인류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류에게 있어서 전쟁은 늘 있어 왔다. 지금도 지구의 어느 구석에서인가 전쟁과 살상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전쟁과 더불어 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에 친숙해 있다. 그러나 누구도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지만 명분과 실리를 위해서 지금도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전쟁이 있다면 그 것은 월남전쟁이다. 이 전쟁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하얀전쟁’(안정효 원작)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한 소설가이다. 이 소설가는 몸으로 겪은 월남전을 소설로 작품화하고 있다. 이 글쓰기의 과정 속에서 주인공이 겪는 갈등이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글쓰기를 통하여 이 전쟁을 영원히 장례지내려 한다. 주인공은 글쓰기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수시로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시공을 넘나든다. 단편적인 넘나듦이 일회분의 작품이 된다. 과거의 경험은 월남전에서 겪었던 전투상황, 내무생활, 그리고 그 주변에서 보아왔던 것들이다. 그러나 월남에서의 경험은 그것만이 독립되어 등장하지 않고 소설가인 주인공의 문제의식, 한국의 현상황(영화에서는 박정희대통령사망 뒤의 계엄치하임), 그리고 월남전의 상처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변일병의 행위 등이 오버랩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은 결과적으로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 월남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소설가인 주인공은 월남전을 경험한지 십년 쯤 지난 뒤 친구의 부탁으로 전쟁경험을 소설로 쓰고자 한다. 그는 결혼하여 아이가 하나 있으나 지금은 이혼하고 가끔 그 아이를 만날 뿐이다. 그는 허름한 아파트에 칩거하면서 글쓰기를 시도한다. 그의 의식은 헬기의 둔탁한 기계음(이 기계음이 액자기법의 액자에 해당된다고도 볼 수 있음)을 신호로 월남의 정글로 향한다. 이러한 글 쓰기의 일부가 지상에 발표되자 그의 전우였던 변일병이 그에게 전화를 건다. 변일병은 월남전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고 그것을 거짓 외압에 의해 진술한 뒤 정신병을 얻는다. 변일병의 생각은 온통 월남에서 같이한 전우의 생각 뿐이다. 변일병이 주인공에게 권총 한자루를 준다. 이 권총은 소대장이 마지막 귀국시 가져가기로 했던 유일한 물건이다. 그러나 소대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소대원은 귀국을 앞둔 마지막 전투에서 거의 전사한다. 그런데 이 소대장의 권총을 변일병이 가지고 있다가 주인공에게 준다. 주인공은 여러 번 변일병에게 주려고 했었으나 변일병은 주인공에게 보관하고 있으라고 한다. 끝에서 주인공은 그 권총으로 변일병을 쏘아 변일병이 항상 찾아나서는 전우의 곁으로 보낸다. 전쟁은 명분이나 실리를 위해 치러진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군인은 한사람의 연약한 인간이다. 한 인간으로서 군인은 한 자연인을 적으로 간주하여 그를 짓밝고 총을 겨누어 죽여야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기에 그런 비정한 논리에 복종해야 하는가. 이 비정한 논리에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다가 몸으로 뱉어낸 것이 변일병의 정신병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글쓰기 역시 몸이 아닌, 몸을 극복하여 정신으로 승화시키려는 몸부림이다. 두 인물 모두 월남전의 아픔과 월남전이 준 상처에 괴로워 몸부림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월남전의 참전이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지만 나는 내 한 목숨 부지하기도 너무 힘들었다고 주인공은 주장한다. 그러나 지휘관은 한 소대병력이 거의 몰살한 전투 현장을 방문하여 이 전투는 적을 유인하기 위한 계략이었는데 너무 장렬히 싸우다 죽었으며 소대원 모두에게 훈장을 상신하라는 말을 남긴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기에 그들은 파리처럼 목숨을 버려야 했으며 그네들에게 훈장이 주어진들 누구를 위한 훈장이겠는가? 월남전 파병이 일본육사 출신 박통에 의해 시작되고, 그곳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빈약한 한국경제의 초석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군인의 호전성이 발동하여 한 나라 젊은이의 피와 목숨을 팔아 밥을 얻어먹은 꼴이다. 그 밥이라는 경제도 현시점에서 그 젊은이의 핏값에 값하는 눈물겹게 고마운 것이기보다는 몇몇 재벌의 돈놀음에 지나지 않기에 한없이 서글퍼진다. 이러한 예는 단지 이것 뿐이 아니다. 일제시대 민주에서 상해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애쓰던 독립 투사나 그의 가족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단칸방조차 얻기 어려워 고생하는데, 민족 비극의 원흉인 이완용의 증손되는 자가 이제사 나타나 몇 십억 아니 몇 백억 되는 조상의 땅을 찾고 있다니 한심스런 노릇이다. 또한 조그만한 땅덩어리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미군을 불러들여 상전대접하고 있는 마당에 다시 외국에 평화유지군(일명 PKO라고도 함) 파병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이 작품은 월남전을 배경으로 쓰여지긴 했으나 결코 전쟁 소설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에게 월남전이 무엇이고, 왜 우리의 젊은이들은 명분없이 무고한 사상자를 내야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답이 주어지지 않고, 참전용사들에 대한 분명한 자리매김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서 월남전은 아직 끝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월남전이 월남인과 무관하게 이데올로기의 명분 아래 살상무기와 중화기로 치뤄진 싸움이였다고 한다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월남전은 전우의 주검과 피를 잉크 삼아 승화시켜나 가는 글쓰기로 이뤄지고 있다. 글 쓰기는 작가의 고통이 잉태하는 새로운 창조와 부활의 과정이며 객관화의 작업이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의 단세포적인 시야를 한단계 높여주는 진실의 마당이다. 현실의 월남전이 인간의 피와 가식으로 이뤄졌다면, 글쓰기를 통하여 이뤄지는 진실은 죽음 앞에서 흰 상복을 입듯이 현실의 허위와 가식을 벗겨 감동과 위안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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