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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0 | [저널초점]
비록 콩을 심었어도 팥이 되기를 부탁한다.
윤덕향․발행인 (2004-01-29 15:48:59)
지난 해에 이어 금년 여름에 갑오동학농민전쟁에 관련한 시민강좌를 마련하였다. 작년과는 달리 동학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주최로 열린 강좌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는 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강좌에 참가한 이런저런 사람들의 높은 열기는 무더위를 몰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젊은 층의 참여가 극히 저조하여 적잖은 아쉬움이 남는다. 애초에 강좌를 준비하고 기획하면서 우리의 문화와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이 참여할 것으로 기대하였었다. 그러나 그같은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으며 그 이유를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되었다. 물론 준비의 소홀과 홍보의 부족이 큰 이유일 것이며 수강료도 적잖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같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국립전주박물관의 문화강좌에도 예상과는 달리 젊은 층의 참여가 많지 않았다. 그 강좌는 비교적 널리 홍보되었고 수강료도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찾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문화와 역사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주체적인 민족의식에 입각하여 정통성을 부르짖는 구호는 대학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 반미, 반일의 구호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젊은 그들의 목소리는 매일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게 참신한 충격으로 전달된다. 그들은 부조리와 모순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으로 이 시대의 양심이어야 한다. 물들지않은 순수함으로 이 시대의 양심이어야 한다. 그리고 비판해 마지않는 기성세대를 일깨우는 선구자적인 자세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 비록 그들의 주장이나 목소리가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탓으로 이상적이고 설익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현실이 아닌 이상을 쫓는 무리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 그들의 외침이 건강할 때 우리의 미래는 장밋빛이라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따라서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더라도 미래의 주역들이 올곧은 모습에서 빛을 보는 것이다. 이번에 마련된 강좌만이 아니라 우리는 곳곳에서 젊은이들의 행동양태에 대한 걱정의 소리를 듣는다. 세계가 하나의 생활권이다시피한 마당에 우리의 정당한 자리매김은 주체적인 민족문화에 자리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속좁은 국수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민족이란 개념은 배타적인 성향을 가지는 것이다. 남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공동체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이 민족인 것이며 공동체의식은 구체적으로 문화라는 양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의 독자적인 문화가 있는가? 일본이나 미국의 청년문화와 구별되는 문화를 우리의 청년들은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그들이 내건 정치적 구호나 목표에 대하여, 민족공동체의 올곧은 번영을 위하여 제시되는 견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민족문화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피상적이고 오히려 외래문물에 젖은 소비형태를 꼬집으려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차림이 그토록 비판해 마지않는 일본풍이라는 것을 트집하려는 것도 아니다. 입으로는 반일을 외치고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고자 하면서 정작 노래방이나 일본풍의 출판문화에 젖은 이율배반을 말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또 동백 시민강좌만이 아니라 동백기념사업에 젊은 층의 참여가 저조한 것이나 박물관의 우리 문화에 대한 강좌에 관심이 낮은 것을 서운해 하거나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같은 양상이 나타나도록 부추긴 기성세대의 끝없는 반성을 촉구하려는 것이다.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 층의 행위양태는 기본적으로 흑백논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 나름의 논리를 확립하고 그 외의 지식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예 그같은 일에 가치를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다라서 동학이전 우리 문화건 간에 이미 확립된 틀속에서 접근이 되거나 거부하는 몸짓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같은 흑백논리는 어쩌면 젊음의 특권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타파되어야할 논리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이를 벗어나도록 하는 노력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아니 지금까지의 우리 교육은 객관식 시험이라는 형태를 통하여 흑백논리를 강요하고 그에 입각하여 공부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사지선다형이나 오지선다형의 경우 주어진 지문은 맞거나 틀리거나 둘중의 하나이며 그 지문중에는 반드시 정답이 숨어있다. 정답이 둘인 경우도 없으며 반만큼 맞는 답은 완전히 틀린 것과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 주어진 해답외에 다른 해답이 있는 경우는 전혀 없으며 오직 모든 지문은 맞거나 틀린 둘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객관식 교육이었다. 원리를 꼭 알 필요도 없으며 단지 맞거나 틀린 것을 고르는 실력으로 학교 성적이 자리매김되었다. 이제 그들은 동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이, 우리의 역사에 관심을 지니는 것이 자신에게 당장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해답을 찾으면 된다. 동학이 지니는 의미를 자신이 아는 이상으로 추구하여 논리의 혼란을 일으키려하지 않는다. 그같은 일은 지문을 선택하는데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다. 하나의 사건에 하나의 견해만을 알면 그뿐인 것이다. 또다른 선택이 있다는 것은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교육은 그 대상이 인간이라는 점에서 시행착오나 실험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의 대학입학시험은 변화해왔다. 흔히 말하듯 국가의 백년대계라는 교육은 10년앞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변하여왔다. 이제 대학 시험방법을 바꾸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는 객관식 사고가 아니라 주관식 사고를 측정한다고 한다. 발전적이며 획기적인 착상인 것처럼 말해진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객관적으로 시험한 것은 잘못이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미 오랜 기간 잘못이 있는 평가방법에 맞추어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 그리고 아직도 새로 시행된다는 시험에 적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흑백논리를 교육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바로 기성세대이다. 그리고 지금 기성세대들은 우리 젊은이들의 흑백논리를 소리높혀 비난하고 있다. 그들의 피상적인 사고와 게으름을 질책하는데 모두가 한 목소리이다. 콩밭에서는 콩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콩을 심어놓고, 콩으로 키우고서 팥의 결실이 부실하다고 야단이다. 앞으로 시행될 대학입학시험은 또 얼마나 지탱될지 모르겠다. 또 잘못이 있으면 즉각 고치겠다는 지극히 오만한 변명을 얼마나 들어야할지 모르겠다. 다만 한가지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을 더 이상 교육이라는 명목의 실험대상으로 삼지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수선한 이 세상을 외곬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보다 폭넓은 시야로 조망할 수 있도록 교육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미 자의와는 달리 어쩔 수 없는 교육을 받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비록 콩을 심었어도 팥이 되기를 부탁한다. 난마처럼 뒤엉킨 정치판에 분개하거나 노래방에 가는 것을 궁리하는 한편으로 휴거라는 집단최면 현상이 있는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청소년, 그들이 장래 우리 사회와 민족의 중추가 될 것이니 말이다. 비록 선생이 ‘바담풍’ 하더라도 ‘바람풍’ 하는 용기와 노력을 기대하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바담풍’으로 지내는 사회일 수만은 없지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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