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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7 | 연재 [교사일기]
교사와 강냉이깡
정용문(2004-01-29 15:49:20)


“얼마나 기다렸던 발령인가!”
대학을 졸업한지 3년반
전교조 교사의 대량 해직으로 교단이 시끌벅적한 89년 8월 말경, 발령예비교육 통지서 한 장이 시골집으로 날아들었다. 날아든 통지서를 쥐어들고 제일 좋아하시는 분은 바로 어머님이셨다.
교육받으러 가는 날 아침, 양복이라도 한 벌 맞춰 입어야 할 것 아니냐면서 장롱 속에 감춰둔 꼬깃꼬깃한 만원짜리 한 웅큼을 쥐어주면서 울먹이시던 말씀이 아직 생생하다.
“인자, 선상질 하면서는 데모하지 마라, 응-”
아마 당신의 생각으로는 내 발령이 늦어진 이유가 대학시절의 데모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발령대기 상태에서 노가다, 신문배달, 계란장사, 공장 생활 등으로 겨우 생계를 연명하던 자식이 모습을 보시면서 홀로 많이 우셨던 어머니. 그렇게도 당신을 울리셨던 자식이 이제 넥타이를 맨 어엿한 선생이 된다니 아마 당신 일생의 최고 소원을 달성하신 셈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좋아 날뛰시던 통지서. 그러나 나에겐 선배교사들의 대량해직으로 얼룩진 교단으로 끌려가야만(?)하는 고통스런 통지서였다. 3년반 동안의 기다림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길로 열릴 줄이야 꿈이라도 꾸었을까!
첫인사말을 어떤 내용으로 하지.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티 없이 맑은 눈동자들을 대한다고 생각하니 설레임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황토바람 불어오는 시골들녘을 가로질러 첫 부임지 시골학교에 도착했다. 운동장 여기저기서 뛰어 노는 아이들, 그들의 거짓없이 맑은 눈동자. 그렇다! 벌거숭이 임금님에게 세상모두가 폐하의 옷은 금 비단 보다도 아름답다고 감언이설로 아부할지라도 ‘당신은 벌거벗었소’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눈동자. 이런 진실의 눈동자를 오염된 사회로부터 보호하는 파수꾼의 역할이 참스승의 길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교문을 들어섰다.
시골촌뜨기 시절에 언젠가는 꼭 앉아 보리라고 다짐했던 회전의자가 즐비하게 늘어선 교무실을 들어선 순간 나의 가슴은 마냥 설레기 시작했다. 그토록 바라던 선생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회전의자에 앉게되었다는 사실이 그토록 감회 깊을 수 없었다. 모일간지에 실린 교사 십계명을 생활의 신조로 삼겠노라고 다짐하면서, 그것을 하숙방 벽에 거는 이로부터 나의 첫 교단 생활은 시작되었다.
대학시절의 야간학교 교사경험은 교단생활에서 봉착하게 되는 많은 문제들을 쉽게 해결해주는 훌륭한 교과서였다. 아이들이 지도대상인 교육의 객체가 아니라 그들의 이성과 감정수준에 걸 맞는 세계를 살고 있는 당당한 교육의 주체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의식이 대전환도 바로 당시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사실이다. 나의 이런 사고가 제도교육 속에서 최초의 실험대에 오른 것이 학급실장 선거였다. 두 명이 입후보 한 학급실장선거는 일주일간의 선거기간 만큼이나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주먹세계를 주름잡는 한 후보는 반 협박을 통해 반아이들의 득표를 유도했는데, 주먹세계를 주름 잡는 후보의 분위기가 압도적인 것처럼 보였다.
담임이 영향력을 행사해주길 은근히 바라는 아이들도 있었고, 실장선거를 우려하는 선생들도 있었다. 나도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판단은 언제나 옳았다는 경험과 아이들의 자율적 자치활동 보장 없이 진정한 교육은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시종일관 중립적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모든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결과였다. 반협박을 득표의 수단으로 삼던 아이에게 득표를 한자리 수치라는 치욕을 안겨줌으로써 아이들 스스로 학급의 당당한 주체임을 입증해 주었다. 그리고 학급실장 선거를 통해서 참민주주의를 배우는 계기가 외었다. 금권, 편력에 우롱당하는 어른들의 선거세계와는 너무나 딴판인 아이들의 선거세계. 그래, 너희들은 나의 참 스승이노라!
학생을 교육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보는 교육관. 그것은 나의 첫 실험대를 통해서 변할 수 없는 명제로 자리 잡았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라는 말은 아마 여기에 가장 적당한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현장에서 다른 교사들과 의견접근이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점이다. 학교 현장의 답답함을 바로 여기서 느낀다. 어른들은 얼마나 바로 살 길래 아이들에게 이러쿵 저러쿵 입방아질을 해댈 특권을 가졌는지. 사회에 널린 모든 비리는 바로 우리 어른들의 탓이 아닌가!
설레임으로 교단에 첫발을 디딘지 어언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아이들과 함께 나뒹굴며 많은 것들을 배웠던 나날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여름 방학때 땀범벅으로 오른 지리산 천왕봉, 반 아이네 집의 공동 벼베기 작업, 선배 학년들을 제끼고 준우승한 체육대회, 모든 일들이 즐거움으로만 남는 것은 아닐지언정 추억거리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몇 달 전에는 지역교사들의 권익을 쟁취하기 위한 일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일에 공동대표로 나섰다. 좀 더 질 높은 교육을 위해서는 교사들의 근무여건을 개선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이다. 교사들이 겪고 있는 고충이야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숙직업무만은 폐지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일숙직개폐모임의 공동대표로 나선 것이다. 국가 공무원법위반, 집단행동금지위반 운운하면서 협박해대는 높은 양반들의 험상궂은 표정들도 일숙지개폐를 위한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지워지지 않는 한….
일숙직페지 교사모임의 공동대표로 나섰다는 말을 집사람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신혼 3개월만에 엄청난 사건(?)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며칠을 망설이다가 입을 떼었더니 집사람 왈,
“그렇지 않아도 숙직 때 혼자 잘려니 무서웠어요. 꼭 싸워서 이겨요”하면서 열심히 활동해야 한다는 충고까지 곁들였다. 정말 백만대군을 얻은 심정으로 아내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그 일로 두 달동안은 무척 바빴다. 저녁상도 같이 못 나눌 때가 하다했고 밤이면 지역교사들과 일숙직페지건에 대한 논의를 위해 공음으로, 심원으로, 대산으로 뛰어다녀야만 했다. 늦은 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설 때에는 강냉이 깡 하나를 사들고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여보, 이거 참강냉이깡 이라네” 하면서. 앞으로 얼마나 더 아내에게 미안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의 맑은 눈빛과 아내의 관용(?)을 믿기 때문에 바른 교육이 뿌리내리는 데 가장 깊숙한 곳에서 거름이 되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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