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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0 | [교사일기]
우리 학교 우리 아이들
이덕순․전북맹아학교 교사 (2004-01-29 15:49:37)
1983년 늦겨울-그 이듬해 봄. 아직도 찬바람이 들어서는 강의실에서 시각장애자이신 교수님 한분을 만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가 본 장애인이라곤 경증의 지체장애인 뿐이었는데, 그분의 강의를 듣는 내내 서늘한 감동을 느꼈다. 그후로 나는 늘 꿈꾸어 왔던 것이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창이 많은 넓은 교실에서 잘 보이지 않는 우리 아이들에게 나의 대학 시절의 지도교수인 시각장애자 교수님과 정상인들을 제치고 장학금까지 받으며 대학 시절을 보냈던 그들의 선배들에 대해서 희망을 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1987년 겨울. 임시로 발령받아 근무했던 공립특수학교인 부산맹아학교. 바닷가가 눈앞에 펼쳐지는 그곳에서 근무하는 4개월동안 교실마다 설치되어 있는 수도, 필요하면 지급되는 교재교구, 일주일에 적어도 2-3시간은 바닷가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갈 수 있었던 그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체계, 이런 모든 것들은 대학에서 배웠던 특수교육의 실질적인 요구를 충분히 충족시키는 것들이었다. 보조교사 없이 6명의 시각장애와 2명의 학습지진아를 교육하기는 무리였지만 그래도 특수교육의 장애를 대체하는 교육적인 환경이 어느 정도 구비된 학교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그리운 시기였다. 아이들의 바닷가를 떠도는 해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필요할 때 마다 지급되는 교재교구로 공부하고, 마음껏 뛰놀수 있는 넓은 교실이 있던 곳, 내가 얼마나 꿈꾸던 학교였던가! 1988년 가을. 누런 단풍잎이 을씨년한 학교만큼이나 삭막한 가슴을 안고 이 학교로 발령받아 왔다. 도서실이 딸린 뒷교실에서 먼지를 걷고, 커텐을 치고 앉힌 아이들은 내가 가르치고 싶은 대학시절의 맹인교수님을 연상하게 하는 해맑은 시각장애아가 아니라 언어장애와 정신지체까지 수반한 중복장애아에다 무엇보다도 온통 결핍된 시설아동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한겨울에 신는 검은 고무신은 그때부터 나를 늘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고, 교사로서 가장 기본적인 나의 의무인 교육보다도 그들의 허기를 채워 주기에 급급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그 겨울을 보냈지만, 그해 겨울방학이 끝나고 대구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반 아이 하나는 죽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봉숙이는 죽었어”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한 것이 그 아이 죽음의 전부였다. 그 아이가 기거하는 시설의 원장이 교장선생님의 어미니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장선생님은 담임인 나에게 그 죽음에 대해서 한마디도 없었다. 결핵과 영양실조가 그 아이를 죽인 것인 뻔한데, 우리 어른들의 무관심으로, 죽지 않아도 될 아이들이 그렇게 부질없이 죽어가는 그 외진 곳에서 나의 절망감은 정말 하찮은 것이었다. 그 해는 눈이 참 많이 왔다. 눈이 좀처럼 오지 않는 소백산맥 너머 대구에서 온 나에게 이리는 눈만 와서 펑펑 쌓이는 그런 적막한 도시였다. 그후 몇 달동안 그 아이가 환각으로 나를 따라 다니며 괴롭혔다. 그리고 나는 학교가 끝난 저녁마다 그들의 생활처인 원으로 수시로 드나들었다. 단지 같이 있어 주고, 주린 배를 채워줄 과자와 빵 몇조각이 이런 모순과 절망을 짓이겨 주리라 생각하면서 밤늦게 석암동에서 오는 버스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었다. 그리고 1989년 봄. 나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그동안 말한마디 못했던 직원회의 석상에서 아이들의 교육환경과 고무신과 허기에 대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지금도 끝이 없는 그 싸움에서 매번 가슴이 멍들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지금은 한결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 할줄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은 길을 걷는 해적교사인 남편과 산토끼 노래를 부르면서 힘찬 팔구호를 내치는 3살난 딸이 있기에 번번이 용기를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여전히 4평짜리 교실에서 자주 아이들의 허기를 느끼고,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명절날마다 사주는 쵸코파이 몇상자와 무엇보다 몇년동안 엄청나게 변한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학교를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그 세월동안 눈의 초점들이 살아나고, 말을 하지 못하던 아이들의 말문이 교사들의 노력으로 서서히 열리고, 영양상태도 조금은 좋아지고, 아이들은 졸업해서 나가고 새로운 아이들이 다시 학교를 더듬거리면서 그 자리를 채워 나갔다. 쉬는 시간이면 우리 교실에는 자주 초등부 아이들로 발디딜 틈이 없게 된다. 내 책상에 와서 선생님 물건을 한사코 만져보는 아이, 뒤에서 내 머리카락을 만지기도 하고 냄새도 맡아보는 아이, 잠시라도 일어서면 내 의자에 앉아서 장난치는 아이, 비록 장애를 지니고 그로인해 부모로부터 대부분 버림받은 아이들이지만 이 아이들은 어느새 콩나물 자라듯이 쑥쑥 자란다. 선생님 주머니에서 나오는 줄도 모르고 시도 때도 없이 “간식시간은 언제해요?”라고 졸라대는 아이들이지만 작년여름 우리반 5학년 아이들이 없는 용돈을 걷어 졸고 있는 나에게 사준 아이스크림으로 인한 눈물 만큼이나 풍요로움도 줄줄 아는 아이들이다. 1992년 9월 추석 이틀전. 원대정신병원으로 가는 메마른 언덕길을 오르면서, 그곳에 얼마전에 입원한 우리반 아이를 찾아가면서, 가져간 닭고기를 허겁지겁 먹는 그 아이의 손을 한없이 잡고 있는 양호교사의 애처로운 손길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눈물을 삼켜야 했다. 아이가 아파 몇 달이나 입원해 있어도 아무도 찾아봐 주지 않고 돌보지 않는 그런 시설에 사는 우리 아이들, 그곳에서 우리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특수교육은 무상, 의무교육 이어서 국가에서 모든 교육비가 제공된다는 우리 학교, 엄연히 공교육 기관이지만 기득권을 가진 사립학교 이기에 행해지는 이 눈에 보이는 우리의 잘못된 교육제도 대문에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도 장애를 지닌 것도 부족하여 언제까지 버림받은 아이들이어야 하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되는 것일까? 우리반 아이들은 중복장애를 지닌 특수교육 대상 아동이기에 시각장애만 지닌 우리학교 중등부 아이들보다 일반학교 특수학급처럼 다양한 학습 교재교구가 필요한데…. 이 숨막히는 4평짜리 교실보다 얼마든지 뛰어 놀게 할 수 있는 넓은 교실이 필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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