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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1 | [사람과사람]
시인 이병훈 세상의 막막함과 답답한 것들에 대한 치열한 도전
김은정․편집위원 (2004-01-29 16:14:44)
‘내 시쓰기는 세상살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군산 선착장은 늘상 술렁인다. 항구로서의 제면모는 빛을 바랜지 오래인 듯 싶은데도 가을 한낮, 즐비한 선착장 횟집은 살아있음을 확인시키는 투명하고 원색적인 몸짓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작별 한다. 선착장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번져 나오는 비릿한 바다냄새는 어느새 선착장 사람들의 몸짓이 되어 흔들리고, 그 흔들림이 오늘은 막다른 길목마다에서 들고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다. “세상살이가 다 그런것인가봐요. 난 여기만 오면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내 젊은 시절을 만나곤 해요. 이제는 저기 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는 선착장 사람들의 생생한 몸짓들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지만 그래도 내게는 이곳이 여전히 추억으로 남아 있어요” 시인 이병훈선생을 만나러 간날, 잠시 선착장을 찾았던 선생은 횟집 주인들의 황망한 손님맞이(?)에 당황해 하면서도 그 골목을 돌아 돌아 되짚어 나오는 길에서 자신의 추억속에 고스란히 들어 앉아 있는 선착장 풍경을 쏟아 내는일로 기뻐했다. 시인이 되돌아보는 과거의 선착장은 아름답다. 그러나 선생이 선착장의 추억에서 돌아 오기까지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이병훈선생은 지난 주말에 소백산의 가을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단풍진 산의 숨소리를 듣고 왔지. 소백산은 넉넉한 아름다움이 있었어. 산이 나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는데 나도 끝없이 &#51922;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어요. 허, 내게도 아직 그런 감정이 남아 있었는가 싶어 신기했어.』 그의 얼굴에 단풍이 지고 있었다. 그 단풍진 얼굴을 보면서 문득 이병훈시인의 한시집 발문에서 후배시인이 써놓았던 말이 떠올렸다.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는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이나 운명에 대한 보상행위는 결코 못된다. 화려한 보상이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이나 운명에 대한 절망적 도전일 경우가 더 많을 것이고 우리는 이병훈시인의 시편들을 통하여 사를 쓰는 일이 그러한 치열한 도전임을 실감한다.」 그랬다. 이병훈시인의 시 쓰기는 언제나 막막함과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에 대한, 심지어는 아름답고 혹은 슬픈 것들에까지도 치열한 도전으로 서 있다. 자신의 말처럼 그의 시는 곧 세상살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인바, 그는 작인으로서 세상살이를 갈고 가꾸어 거두어 들이는 일에 항상 열정적이다. 그 창작의 열정은 치열한 도전을 딛고 서 있는 셈이다. 이미 여덟권의 시집을 펴냈고 아홉권째 시집 발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는 열심히 쓰고 열심히 발표하는 왕성한 창작의 시인이다. “아무리 재앙이 많고 아픔이 커도 꼭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있는 일은 농사 일이다. 그 응어리가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그렇다. 농사일은 멈출수도 미룰수도 없으며 거를수도 없다. 나의 경우에 있어서 시 쓰는 일 또한 이와 같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있어 시 쓰는 일은 곧 살아가는 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땅과 그 역사에 갖는 애정은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과 같은 연상에 놓여 있으며 세상살이의 구석구석에 섬세한 촉각을 세워두고 있는 그의 시 쓰기는 철저하게 자기 체험을 드러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이병훈시인은 어렸을적부터 문학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문학은, 시를 쓰는 일은 그의 체험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삶의 한 방법일 뿐이었다. 1925년 옥구군 옥산면 당북리 백석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신식 교육보다는 오랫동안 이어온 서당생활에서 문학에의 감수성을 싹틔웠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집안형편으로 전주사범에 합격하고도 입학하지 못했던 그는 당시의 우울함을 책 읽는 일로 씻어 냈다. 그때 읽었던 수많은 책이 없었다면 그의 글쓰기는 오늘까지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그가 대처로 나와 신문사 기자 생활을 시작했던 때가 20대 후반, 1950년대였다. 이때에 교분을 맺었던 문학인들은 그가 시인의 길에 들어서게 하는데 가장 적극적인 지원자가 되어 주었다. 그중에서도 가람 이병기선생과 신석정선생은 그를 문학판에 발들여놓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 스승이었다. 59년 석정선생의 추천을 받아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한 그는 일정한 틀에 의해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는 일들이 진정한 문학을 만나는 일과 무관하다는 생각을 했었으므로 등단이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갖지는 않았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석정선생님이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껏 글쓰는 사람으로서 서있지는 못했을 거예요. 삶의 무게를 실어내지 못하는 어떤 다른 일에 눈을 뜨고 있었을 터이지만 아무래도 여지껏 시를 쓸 수 있다는 기쁨만큼 더큰 위안의 삶은 얻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가장 큰 문학적 영향을 받은 문학인을 든다면 예외 없이 석정선생을 꼽는다. 등단이후부터 석정선생이 작고 하기전까지 자신의 문학이 늘 석정 선생의 그늘에 놓여 있었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그는 문학이 시대의 올바른 정신을 지키는 건강한 자기소리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그때 석정선생의 영향으로 굳혀 놓았다고 한다. 누구보다도 석정선생의 문학을 깊게 이해하고 있는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석정선생의 문학이 재조명되어야 한다는데 굳은 믿음을 갖고 있다. 이병훈시인은 등단 11년만인 70년에 첫시집 「단층」을 펴냈다. 그 첫시집은 석정선생의 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담겨 있고 따뜻하면서도 희망적이다. 「병훈은 단층에 뿌리를 받고 자라 온 갈대이기에 그 단층에서 여름과 가을을 나고, 오래 머물다가는 겨울을 나지만, 끝내 돌아오는 붐을 그 단층에서 맞이 할 수 있었다.」<석정선생의 서문글중에서> 석정선생은 그의 시가 답답한 현실과 고통속의 체험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 가지는 힘차게 희망을 향해 뻗어있다는 인식을 새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첫시집 이후 또다시 11년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 「下浦길」(81년)이나 그뒤에 이어지는 <어느 흉년에(3인 공동시집)>, <멀미>, <달무리의 作人들>, <녹두장군>, <눈뜨는 下弦>, <찬물한대접 떠놓고> 등 그의 삶의 궤적이 촘촘히 엮어진 여덟권 시집은 늘상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긍정적 세계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긍정적 세계관은 우리가 발딛고 서있는 오늘의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형태로서가 아니라 그 현실을 올곧은 시각으로 비판하고,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고통과 황폐함을 치유해 내는 바탕위에 서있음으로써 더욱 큰 힘을 거두어 들인다. 그는 농촌의 정서를 문학적 형상화로 거두어내는데 자신의 역량을 맞대어놓고 있다. 대부분의 시들에서 절대적인(?) 주제로 드러나고 있는 이 농촌의 정서는 86년에 펴낸 <달무리의 作人들>에 응축되어 있다. 황폐한 농촌의 소작인들이 겪는 가난과 허기, 끊임없이 더해지는 노동의 고단함, 그리고 그네들의 살의 아픔을 긴밀하게 담아낸 이 시집을 정양시인은 「더 자라보아야 아무 소용없는 새순으로 돋아나 우리 농경사에 얼룩진 허기와 허탈과 절망을 극명하게 형상화 함으로써 함부로 사회의식만을 앞세우고 있는 요즈음 우리 농민시의 방향을 바로 잡아주는 구실을 넉넉히 수행해내고 있다」고 평가한다. “<달무리의 作人들>은 나의 소년시절에 체험했던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농민에 대한 수탈, 자기땅에서 남의 나라 소작을 부쳐먹는 농투성이의 뒤끝, 그냥 묻어 놓기에는 너무도 아픈 그 참상들을 진실되게 그려놓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병훈씨는 농민에 대해 애잔한 그리움의 정서를 때로는 고난의 아우성으로, 때로는 희망의 아우성으로 물결지어 놓으면서 마침내는 민중의 살아있는 숨결과 생명력을 영원한 구원의 대상으로 세워놓고 있다. 「그는 풀을 많이 먹고 살다 갔으므로 죽었으되 죽은 것이 아니라 한다 눈 가리고 잠시 쉬는 것이라 한다 그는 풀이 살 듯 살 것이므로 때되면 저 언덕 저 들에 풀들이 과밀하게 나와서는 것이라 한다 아우성으로 일어설 것이라 한다」(「아우성」) 그는 농촌과 땅에 대한 정서를 치열한 역사의식으로 발전시키기도 한다. 그가 우리의 역사를 찾고 뒤적이며 땅을 헤맸던 그 세월에 만난 작품이 바로 서사시 「녹두장군」이다. “동기야 어떻든 쓰고 싶어 쓴 것이고 쓰는데 많은 시간도 들였어요. 나는 짧지 않은 동안이 왜곡된 역사의 그늘을 찾아다니면서 ‘내가 남의 나라 지주의 소작인의 후예’였음을, 그리고 ‘농민들의 피를 내려 받은 농민의 아들’임을 뼈저리게 확인한 것만으로도 소중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 역사를 만나고난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문학도 일정한 몫을 해내야한다는 인식을 다시한번 다지게 됐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역사의식은 오늘을 바라보는 지렛대로 작용한다. 일제 36년이 우리 민족에게 가져다준 참담한 비극의 역사와 그 소용돌이 속에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고유한 민족정서는 이제 그의 시편들에서 가뿐 숨을 쉬고 있다. 한동안 시 쓰는 일에만 전념했던 그는 지난 86년 군산문화원이 문을 열면서 원장으로 취임, 군산지역의 문화를 일구어내는일에 열정을 풀어내고 있다. 자신이 태어났고 성장해온 이땅의 정서를 지켜내는 일이 앞으로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군산시가지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월명공원에 올라가는 길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즈음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시의 힘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합니다. 내 살아온 지난날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저기 내려다보이는 내고향의 땡내음과 바람과 그 역사를 담아내는 일을 촘촘히 챙겨나갈 생각입니다” 그가 지켜온 세월의 아우성(?)은 이제 더큰 생명력으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가. 시인이 앉아 있는 나무의자 뒤 멀리 보이는 서해바다에 눈부신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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