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2.11 | [문화저널]
넉넉했던 교우촌 지금은 쓸쓸함만 남아 원바실 공소
최진성․남원여고 교사 (2004-01-29 16:15:19)
오전에는 날씨가 좋았는데, 막상 산외면에 도착하니 제법 빗방울이 커지기 시작한다. 이번의 목적지는 정읍군 산외면 종산리에 있는 원바실(원전)이다. 남원에서 가려면 순창에서 섬진강을 따라 갈담저수지를 끼고 올라가는 것과, 전주에서 칠보, 산외면 직행을 타고 가는 방법이 있다. 이번에는 모처럼 가을 정취도 구경할 겸 순창에서 저수지를 따라 가면서 새보안(용암)과 능교 공소를 들러 원바실에 도착하니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 원바실 공소는 옛날에 지어진 오래된 공소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공소 건물이 같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사진1 참고> 마침 공소 회장인 오정길(60세)씨를 만나 원바실 공소의 형성시기, 공소건물의 가옥구조, 그리고 신자들의 사는 모습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셨다는 회장님의 눈길이 마을 앞 감나무 가지에 자주 머무르신다. 먼저 이 공소의 형성시기에 대해 알아보았다. 전에 필자가 조사했던 설문조사 자료에 의하면 1850년대에 이 공소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래된 공소를 조사하던 중 그 천정에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상량문이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데다가 창고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을음을 없애는데 애를 먹었다. 그 글귀는 ‘&#33752;禎紀元後 四周申歲在 丁未 二月二十八日 戊寅 入住 三月初入日 丁亥 申時 上樑’이라고 적혀 있었다. 즉, 숭정 1년인 1628년으로부터 4번째 정미년인 1907년에 상량했다고 해석되므로 이 공소건물이 1907년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이렇게 큰 공소 건물이 조선시대 말에 지어졌다면 이미 훨씬 전부터 꽤 규모가 큰 교우촌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회장님도 이말에 적극 동의하신다. 그렇다면 병인박해(1866~1871년)를 전후해서 형성된 교우촌이라고 보여진다. 임실군을 비롯해 정읍, 순창군으로 이어지는 길목인데다가 병인박해 당시 잡혀온 신자들의 거주지에 임실군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공소의 가옥구조를 살펴보았다. <그림 1>은 오래된 공소 건물의 평면도다. 일반 가옥의 평면도다. 일반 가옥의 평면도와 비교하면, 첫째, 방1이 방3의 옆에 마련되어 있다. 십자가 상과 묵주 및 교리책들이 많이 발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미사를 하기 위한 도구들을 보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1> 둘째, 집의 규모에 비해 문이 많고, 방3, 방4, 방5 사이에 여닫이 문이 있다. 그 이유는 많은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최대한 방을 이용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유교의 관습이 남아 있던 흔적이 방들 사이의 여닫이 문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미사할 때는 방4나 방5에 여신자들이 문을 닫고 참여하였다. 그래서 이 여닫이 문들은 많은 신자들을 수용하면서도, 남녀 신자들을 구분 함으로써 남녀 유별의 유교적 관습을 지키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성당의 경우에도 나타나고 있다. 원바실 공소와 비슷한 시기(1906년)에 지어졌던 나바위 성당(益山郡, 華山聖堂이라고도 함)의 경우, 성당에 제대를 중심으로 입구까지 좌우로 나뉘도록 나무로 칸막이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미사 전례를 할 때, 남녀 신자들이 서로 볼 수 없도록 하였다고 한다. 넷째, 부엌이 넓고, 앞으로 많이 나와 있다. 이것은 신부와 많은 신자들에게도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기존의 부엌을 넓게 고쳐 썼기 때문이다. 공소는 종교적 의식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참여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리고 되도록 많은 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옥 구조가 크게 바뀐 이유가 된다. 이런 노력들이 신자들로 하여금 공소 주위에 되도록 가깝게 취락을 형성하게 만들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원바실 공소도 공소 건물이 주변보다 약간 높으며, 마을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중앙형’이다.(사진 2 참고) 마지막으로 이 공소의 경제생활을 살펴 보았다. 이 마을은 앞뒤로 산이 막혀 있어 외부와의 통로라고는 산외면에서 들어오는 길 밖에 없다. 하천 차수(stream order)에 의하면 1:50,000 지형도에서 1차수에 해당되므로 최상류에 위치하며, 지형분류상 ‘산지 입지형’에 속한다. 이런 지형적 불리함 때문에 좁은 경지를 가지고 화전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인구가 늘면서 생계가 어려워지자 신자들이 도시로 떠나기 시작하면서 1960년대 초에는 20가구이던 것이 지금은 12가구로 줄었고, 빈 집도 3가구나 된다. 이 와중에 신자는 5가구만 남았고, 이웃한 원종산에 3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이 곳과 가까운 화죽리의 농골, 당골 및 목욕리의 송장골과 내목, 외목 등의 교우촌 신자들도 모두 떠났다 한다. 남아 있다 하더라도 젊은이들은 얼마 없고 노인들만 남아 농사를 돌보기 어려워 집집마다 한봉을 하면서 쓸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현재 사용하는 공소 건물은 1945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비가 오면 물이 세고, 마루도 썩어서 보수를 해야 한지만 운영자금이 따로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겨울이면 난로를 하나 피우더라도 신자들 몇몇이 돈을 내어 기름을 사서 쓴다고 한다. 과거에는 일요일이면 50여 명이 넘게 공소예절을 하였는데, 요즈음에는 7, 8명이 고작이라고 한다. 인근 공소에서는 가장 규모가 컸다는 공소의 형편이 이 정도이니 다른 공소들도 대략 짐작이 간다. 비는 그치지 않고, 이미 날은 어두워져 저녁이나 먹고 떠나라는 회장님을 뒤로하고 전주에 도착하니 벌써 7시가 넘었다. 어데가나 인정이 넘치지 않으련만 바가지에 담아 주시던 감자 맛이 남원에 올때까지 생각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