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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1 | [특집]
누구를 위한 시민회관인가
김화숙․원광대교수․현대춤 (2004-01-29 16:22:54)
“무용은 시간과 공간의 예술이다.” 라고 표현할 수 있듯이 무용에서 공간은 신체를 수용하고 움직일 수 있는 곳이다. 인간의 신체는 무용의 도구이며 신체의 움직임. 즉 형태화된 동작은 표현의 재료가 된다. 무용의 재료인 동작은 공간안에서 존재하며, 공간은 무용가에게는 위치와 범위의 가능성을 뜻한다. 이렇듯 무용공간은 작게는 신체움직임의 무한한 가능성까지를, 크게는 무대전체나 극장자체가 작품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무용공간은 반드시 실내에서 무대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체육관이나 광장, 혹은 거리나 바닷가의 모래사장에서, 또는 건물옥상까지를 무용공간으로 활용하여 공간의 개념을 더욱 확대시켜 나가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들의 삶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공간속에 존재하듯 시간과 공간은 무용에서도 신체와 함께 중요한 기본요소가 된다. 1971년 필자가 첫 개인발표회를 준비할 때만 해도 서울의 공연장은 <명동예술극장>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이 외국에서 초청한 무용단이나 클래식 음악인들, 그리고 가수들의 대형공연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 이후 장충동에 <중앙국립극장>이 들어서고, 70년대 후반에 <세종문화회관>, 그리고 80년대 초에 동숭동에 <문예대극장, 소극장>에 이어 최근에 <예술의 전당>이 문을 열었다. <예술의 전당>은 음악전용극장, 국악당, 소극장, 전시실, 서예관, 자료관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으며 내년 봄 축제극장까지 개관하게 되면 흔히 얘기하는 문화공간이 형성되어 서울 시민들을 위한 바람직한 정서공간으로 자리잡을 것 같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몇십개의 소극장들이 문을 열어 젊은 무용인들에게 실험무대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동숭동 대학로는 대극장과 소극장, 전시실, 거리의 화가, 야외이벤트 등 근사한 카페들이 밀집해 있어 감상공간으로서 뿐 아니라 놀이터, 쉼터로서의 역할까지도 담당할 수 있도록 변모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전북은 어떠한가? 전주에 <학생회관>과 <전북예술회관>, 그리고 이리, 군산, 정읍이 각각 <시민문화회관>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극장으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 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극장공간 만을 확보한 채 무대에 관한 전문인이 정작 부족한 것은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무대에 관련된 전문인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공연을 치루기 위해서는 부족한 장비와 조명 담당자를 다른 지역의 전문인으로 충당해야 하며, 때로는 무대감독과 무대보조까지도 동원시켜야 하기 때문에 극장의 미비한 조건으로 작품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서울에 비해 몇배의 공연경비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최근에 개관된 <정읍사 예술회관> 소식은 무용인들에게 매우 즐거운 소식이었다. 얼마전 군산의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가진 적이 있었다.(현대무용단&#8228;사포, 1992. 9. 29) 그곳의 시설은 기존에 있는 조명시설을 다 사용할 수 없을만큼 고장나 있었고, 음향시설 또한 엉망이었다. 그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국민학생을 입장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7세 이하가 아닌데 무슨 이유로 입장시키지 않느냐는 필자의 항의에 극장의 내규로 정한 법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설득력 없는 답변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민학생들이 실내를 더럽히고, 뛰어다니고, 시끄럽게 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니 그렇다면 교육은 왜 시키는가? 어릴때부터 음악이나 미술을 감상하여 정서를 순화시키고 또한 극장에서는 작품을 감상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들이 해야할 일이 아니었던가. 시민회관은 과연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 영국의 시인이요 미술비평가인 허버트리는 교육에 있어서 예술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다. 예술교육이야말로 사회의 일원으로서 더욱 인간답게, 더욱 창조적으로 또한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자녀들의 손을 잡고 어머니가 작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는 모습은 구라파의 어느 곳에서나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 유명한 루브르박물관도 국민학생들의 학습장처럼 느껴질만큼 자유스럽게 공개되고 있다. 캔버스를 직접 들고와서 스케치하는 학생들,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느 순간 미술품보다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현대의 인간은 고도의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해 날로 황폐화되고 있다. 인간은 물질만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누구나 좀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자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살찌우게 하는 것은 사물을 아름답게 느낄줄 아는 미감을 키우는 일이다. 예술적인 환경 즉 문화공간의 확보와 아름다운 자연환경이야 말로 인간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필수조건이 아닐까? 차로 5분만 달리면 넓은 들판이 바로 내곁에 있고 아직까지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와 자연이 우리곁에 함께하며 그리고 빈 공간이 아직 남아있는 이상 이곳 전북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차 있다. 도로의 확장만을 염두에 둔 채 전주의 첫 인상으로 남아있는 “호남제일문”을 하루 아침에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는 그런 행정만을 하지 않는다면….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세련된 행정가들이 가능성으로 가득 차있는 전북의 빈 공간을 우리들의 미래와 자라나는 새싹들을 위해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해본다. 문화공간은 창조적 실천으로 꾸려져야 한다 임승택&#8228;전북대예대교수&#8228;목공예 예향 전북에는 건강하고 밝은 문화, 예술활동을 진작시키기 위한 관 또는 만간주도의 몇 개의 문화공간들이 있다. 이들 문화공간들은 현실로 부딪치는 부정적 조건의 극복과 외부로부터 오는 문화적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 그리고 물질적 가치관에 의한 경제적 어려움을 한결같이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고유한 취지와 목적을 갖고 자유정신을 고양하면서 전북의 문화위상을 일정 수준으로 이끌어 온 것이 사실이다. 과거 전북의 찬란한 예술적 토양이 오늘에 이어지기를 고대하는 이웃들과 함께 문화, 예술에의 욕구를 달래가며 얼마간의 정신적 풍요를 가져다 준 것이다. 문화공간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는 공연장, 전시장, 복지회관, 문화전수회관, 문화원, 도서관, 박물관 등이 있다. 문화의 지방 분산화가 고창되는 시대에 살면서도 행정부의 문화정책이라는 것이 현실적 적용에 까지는 턱없이 거리가 먼 실정이긴 예향 전북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시민의 입장, 문화의 수용자의 입장에서, 간과하기 쉬운 문화공간에 대해 몇가지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공간의 기획가 운용에 있어서 예술활동이 흔히 대중의 문화욕구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다수의 의사를 표방한 소수의 의견에 부합된 점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그것이 특색없이 같은 내용으로 획일화되어 있을 경우에도 우리의 문화의식은 제한되고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기획집단 몇사람의 생각에 따라 필요한 문화행위만을 선별 운영함으로써 자칫하면 그들 몇사람의 홍보수단으로 전락될 소지가 전혀 없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각종 형태의 일과성 행사가 예술가의 권익을 위해 공정하고 건전한 창작 발표로 연결되지 못하여 예술의 창조적 활동을 약화시키는 즉, 창조의 소외현상을 부추기는 결과로 작용된 부분은 없었는지도 반성해 보아야 한다. 또 시설의 이용과 관리부분에 얼마만한 노력과 배려를 하고 있는지도 현재로서는 아쉬움이 많을 뿐이다. 문화시설은 문화활동의 거점이어서 문화인구의 저변화와 더불어 그들이 우수한 창작의 결과를 접하기에 용이해야 하고, 또 역량있는 예술가들의 창작물의 실험성과 독창성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부대시설의 이용과 확충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주어야 한다. 특히 관급의 문화공간들은 건물만 덜렁있는 하드웨어로의 구실에만 집착하지 말고 기존 공간들의 효율적 이용과 관리에 있어서 무엇을 위한 시설인가 하는 자문과 함께 독자적 소프트웨어의 개발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지속적인 재정적 투자도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문화예술의 창작물은 앞으로 얼마든지 쏟아져 나올 것이고 그럴수록 필요한 것은 이를 제대로 수용하고 소화를 해내는 능력이다. 창조가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수용자의 체험가치이다. 우리들의 문화공간에 있어서 가장 결핍된, 가장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용자의 체험가치를 존중해주는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는 점에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화랑은 소수의 배짱 맞는 작가를 중심으로 장사를 하는 곳만은 아니다. 기성 미술인들의 나태나 세속적 흐름을 제어하는 문화의 파수꾼과 같은 구실과 젊은 지역작가의 창작의지를 보듬어 안아야 하는 사명감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렵기는 하지만 우수작품의 수집, 보존, 연구조사와 국제교류, 인접예술분야와의 접목활동을 통해 전문 문화공간으로의 본래적 역할을 예향에 산다는 사람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공간이 그 자체에 대한 부단한 도전을 통해 체질개선을 시도해 나가야 하는데도 현실안주적 고착상태로 유지될 수 밖에 없는 환경적 소외가 지방문화공간의 곤혹스러움을 더할 것이다. 하지만 우선 이러한 몇가지 부정적 측면을 배제한다면 예향전북의 문화공간은 창조의 실천적 행위를 넉넉히 그리고 색깔있게 수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문화공간을 운용하는 사람의 몫만 아니라 문화행위를 하며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로 공유되어져야 마땅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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