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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2 | [문화저널]
사람에 얽힌 글자풀이
황안웅․향토사학자 (2004-01-29 16:26:49)
세상의 만물은 그 모습부터가 천차만별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 그 맡은 일도 다르고 활동하는 범위도 각각 다르다. 예를 들면 날개있는 짐승은 하늘을 날을 수 있고, 네발 달린 짐승은 뛸 수 있고, 땅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초목은 움직일 수는 없지만 움직일 수 없는 그대로 한군데 가만히 서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그것도 저것도 아닌 흙이나 돌맹이들은 생긴대로 혹은 깨지고 혹은 뭉쳐지며 오랜 세월을 그대로 버티고 있다. 만물의 어느 것 하나 같은 게 없고 그 모습이 천차만별로 각각 다르다는 사실은 참으로 묘하고도 묘한 일이다. 그러나 그토록 모습이 다른 만물을 서양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광물로 크게 구분하였고 일단 사람도 동물의 일종으로 분류했다. 이런 분류법에 따라 서양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사람에 대한 정의는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라는 기본적 관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예로부터 동양사람들이 만물을 구분지어온 분류법은 무엇이며, 그 속에서 사람을 어떻게 정의지어 왔는가? 우선 살펴 보기로 하자. 예로부터 동양인들은 일단 만물을 유정물(有情物)과 무정물(無情物)로 구분하였고, 유정물을 다시 세갈래지어 “옆으로 기어 다니는 것(橫生)”과 “위로 솟아 자라는 것(縱生)”, 그리고 “두발은 땅을 딛고 머리는 하늘로 향해 살아가고 있는 것(立生)” 이렇게 나누었다. 물론 여기에서 “橫生”은 동물을 말하고, “縱生”은 식물을 말하며 나아가 즉 사람을 동물의 일종이라 정의지은 뒤 동물은 동물인데 “생각하는 동물” 또는 “만들줄 아는 동물”이라고 동물에 토를 달아 설명하는 것보다 아예 생각할 줄 알고 만들 줄 알 수밖에 없는 그 까닭까지를 모습 그 자체에서 먼저 찾아 내었다는 사실은 훨씬 사람이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본 게 아니랴? 그래서 “人”은 두발을 땅에 딛고 하늘을 향해 있는 사람을 사람이 제대로 바라본 모습이요, “立”은 땅위에 두발을 굳게 딛고 팔을 활짝 벌린채 머리는 하늘을 받히고 있는 사람의 모습, 바로 그 것이다. 즉 동물이나 식물과는 달리 엄연한 현실위에 두발을 딛고 아름다운 이상을 머리로 그리며 끊임없이 닥치는 운명을 손써서 개척하는 인간의 참모습, 바로 그런 모습이 “立生”이니 이미 “立生”이라는 정의속에 인간에 관한 모든 정의가 함축되어 있지 않을까? 동물은 네발로 뛸 수 있지만 손과 발이 따로이 없고, 식물은 땅속에 깊히 뿌리박고 선채로 자랄 뿐이지만 사람은 하늘에 뿌리박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아 나간다. 그렇기에 아무리 사납게 뛰는 놈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머리써서 그것을 잡을 수 있었고, 아무리 깊히 뿌리박힌 놈이라도 사람은 손써서 그것을 뽑아 버릴 수 있었지 않았던가? 아무튼 사람은 그 모습에서부터 만물의 영장일 수밖에 없었음은 자명한 일이 아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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