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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2 | [문화저널]
모 베터 블루스
김원호․전북노문연 의장 (2004-01-29 16:29:24)
『모 베터 블루스』(Mo. better blues)라는 영화가 있다. 『옳은 일을 해라』라는 영화를 만들어 미국내 인종문제를 그 무더운 여름의 영상만큼 리얼하게 그려낸, 탁월한 흑인 영화감독인 「스파이크 리」의 작품이다. 이 영화에는 그야말로 흑인 음악인 블루스의 모든 것이 나온다. 이 영화는, 대를 이어 어릴때부터 트럼펫 훈련을 받아 상당한 수준의 연주가가 된 주인공이 재즈 블루스 팀을 조직하여 클럽에서 연주활동을 하면서 벌어지는 사랑과 우정을 배경으로, 음악적 성취와 좌절을 그려내고 있는 단순한 줄거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매력과 감동은, 음악으로서의 블루스를 단지 소재로 하여 어떤 사람의 일대기를 그리거나 1930년대 미국의 어두운 사회분위기를 추억조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흑인들이 누대에 걸쳐 압박받아왔던 삶이 만들어내는 그네들만의 애환어리고도 건강한 그 독특한 ‘삶의 블루스’의 깊이를 보여준데 있다. 영화중간에 나오는 연주곡인 「모 베터 블루스」는 16마디 정도로 된 단순한 곡조인데, 그 연주도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드럼을 바탕으로 트럼펫과 소프라노 섹스폰이 요란스럽지 않게 교대로 간단하게 애드립하는데 그것이 주는 정서는 아주 무거운 슬픔과 무언가 간단하게 설명해낼 수 없는 휴매니티한 것을 자아내게 한다. 그 한 곳에 영화의 전부, 나아가 흑인들의 미국 강제이주사가 통털어 만들어낸 그들만의 정서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음악적 깊이, 아니 ‘음악의 생애’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할 정도의 역사-사회성을 가지고 있다. 음악 속에 묻어있는 그 삶으로서의 서정의 응축이 만들어낸 깊이를 이 영화감독은 연출하고 있고 우리에게는 동병상련(同病相憐)으로서의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 여럿 있는데, 주인공이 악기없이 구음과 손연주 흉내로 혼자서 연습하는 장면에서는 그 자체로서도 훌륭한 음악이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음악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가까우면서도 재미있는 것인가하는 것을 보여준다. 내놓는 정서의 성격은 다르지만 우리의 구음(口音)살풀이와 비슷한데 그 자유로움의 직접성이 뛰어나서 재미있다. 그리고, 어두운 밤 차들만 요란히 달리는 다리 난간에서 주인공이 트럼펫을 불어대는 다소 낭만적인 장면은 참 쓸쓸하면서도 따뜻하다. 주인공이 클럽을 둘러싼 어두운 손길에 의한 걱정, 그리고 애인의 변심과 그것이 우정과 얽히는 등 복잡한 가정을 혼자 조용히 트럼펫 가락으로 드러내는데 이것이 3류적으로 비치지 않는 이유는 그 쓸쓸함이 주인공의 생활과 정서가 복합된 심정을 수준높게 음악적으로 승화시켜내기 때문이다. 이 블루스가 현재까지도 흑인의 서정 속을 살아나가고 있다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첫 장면에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적으로 좌절된 주인공인 어린 아들에게 엄격하게 트럼펫을 훈련시키는 그 대물림이 자신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아들에게는 아들의 생활을 인정해주는 그 세대인식의 발전이 역사-사회적으로 희망적이다. 어두우면서도 끈질기게 살아온 것만큼의 흑인들의 생애와 그 블루스의 생애가 대물림되어 발전하는 것을 음악적 열정과, 그 음악과 삶의 어두움과 쓸쓸함, 밝음과 건강함으로 충실하게 그려낸 이 영화는, 서정성과 사회성의 수준높은 자연스러운 결합, 그 진지함이 만들어내는 나름대로의 희망의식이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리에게는 굿거리가 있다. 우리에게도 민중이 그 험난한 사회적 질곡 속에서도 고통과 즐거움과 어두움과 건강함으로 삶 속에서 벼려낸 그 서정적 혼(魂)이 면면히 구체적으로 배어 있는 음악이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그러나, 그 굿거리의 생애가 지금 당대에는 없다! 주지하다시피 굿거리는 민속악의 중심 가락이다. 진양조는 늘어지는 것 같지만 오히려 꽉 짜여진 긴장을 주는 엄격한 위주의 형식이 강조되어 그리 편하지 않고, 중머리는 여러 가지의 정서를 유장하고 힘있게 담아낼 수 있는 중추적 역할을 하지만 그 역시 호흡의 분절이 고지식하여 그 깊이가 다소 점잖다. 자진머리 이하의 빠르기는 ‘선율적인 맛’이 제거되고, 한번 던져지면 제어할 수 없이 그 자체의 관성으로 발전하다가 소멸하는, 음이 만들어내는 서정의 논리가 깊지가 않아 생명이 짧다. 편하게 비유하자면 국악의 랩음악 같은 것이다. 굿거리는 일단 허투르다. 그렇다고 짜임새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가락으로서의 임기응변력이 강조되고 보다 밖으로 열려진 가락의 성격이 도드라져서, 그래서 오히려 호흡이 긴, ‘맞아떨어져가는’ 짜임새를 갖고 있다. 즉 독특한 성질을 가진 자유로움과 그것이 내용-형식적으로 제어되며 조화되는, 스스로 움직이고 살아나가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 힘이 바탕되지 않고는 사실 마구잡이로 허투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외 다른 악기와 어울리지 않고 독주 리듬만으로도 하나의 정서나 어떠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가 있고, 연주자와의 교감 수준이 형식보다는 내용이 우선된다는 점, 다른 악기와의 조화가 각각 제 소임의 소리를 분명하게 들리게 하면서도 어우러져 눈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길이로 그려진다는 점, 열채와 궁편이 조화되는 맛이 도드라지고, 특히 징이 파묻히거나 곁다리가 아니라 그 자신의 소리를 제대로 들려주는 것은 이 굿거리 속에서일 때뿐이라는 점등은 굿거리만이 갖고 있는 유일한 독특함이다. 그러나 그 짜임새는 음악적 형식에서보다는 오히려 풍부하고 생생한 현실 정서의 전유능력, 즉 내용의 자신감에 바탕된다. 생산 현장의 희노애락을 담아내며 숙성된 세마치류의 노래와 보릿대춤이 승화된, 심지어 말투까지도 엇비슷이 담아낸 폭넓음이 주는 낯익음과 그 풍부함을 바탕으로 성숙된 자연스럽게 질높아진 길이가 항상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정서를 만들어낸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스러움이 허투름을 자연스럽게 보장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굿거리는 음악적 짜임새에서만 그 기능과 소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적 자짐이 보다 현실공간과 공명하는, 즉 생활과 익숙하게 넘나들 수 있다라는 것에 그 탁월한 생명력이 있다. 그런데 흑인의 블루스만큼 우리의 굿거리는, 나아가 민중적 서정의 전통은 그 대물림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불행중 다행으로 근래에 들어와 전통과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나 그 실내용은 사실 당대성을 가져나가지 못하고 있어 점차 다행중 불행이 되어가고 있다. 아직도 우리 것이라는 주장의 대부분은 그저 ‘서양적인 것’에 죽어라 반대하며 우리 것은 무조건 우월하다는, 똥고집스러운 이분법적 편가르기 의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유아성만큼 당연히 비교 내용이 고만고만 치기어릴뿐더러 그 내용도 과거의 것에 그치고 있다. 이것이 오히려 우리의 그 풍부한 문화유산을 당대에 제대로 전유해내려는 진지한 시각과 노력들을 협소하게 만들고 있다. 알량한 사이비 민족우월의식은 그 ‘우리’의 현실성을 책임감조차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우리’라는 의식은 지금의 현실성, 즉 당대성을 획득해야만 의미롭다. 진정한 ‘우리’ 의식이라는 것은 당대적 민중성을 이르며, 현실의 변화에 냉철하게 적응, 변화되어 ‘살아나가는’ 의식만이 그를 이루어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은 독점자본의 물신(物神)의 미학이 사람들을 자본-유토피아 환상으로 점차 내몰고 있으며, 의미판독을 요구하지 않는 이러한 문화현상 속에서 대중적 감수성은 점차 ‘화려하게 밝아지는 절망’ 속으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냉철하게 직시해야 한다. 유아적 편가르기나 압구정동을 도덕적으로 개탄만해서는 현실을 전혀 읽어낼 수가 없다. 이제 진정한 ‘우리’의식은, 문화산업의 현실 속에서 부단히 감수성이 왜곡되어 나갈지라도 그 허와 실을 직시하며 우리가 갖고 있는, 의외로 멀쩡하고 진지한 자기 성찰의 능력을 발견해내고 발전시켜내야 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트라비에게 갈채를』이란 영화는 舊동독의 모든 것을 나름대로 명쾌하게 보여준다. 트라비라는 것은 동독의 인민이 신청해놓으면 7,8년을 기다려야 살 수 있는 자동차인데 이것이 또 고물인 것으로도 유명한 모양이다. 동독을 거의 상징하는 이 자동차는 어찌나 유명한지 영화속에서도 서구사람들이 줄서서 돈내고 한번씩 타보는 신기한 관광꺼리로 나온다. 이 영화는 동독의 한 국어교사가 여름휴가를 동독의 한 국어교사가 여름휴가를 얻어 부인과 딸을 데리고 달구지라는 별명의 이 트라비를 몰고 이탈리아로 여행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질박하게 그리고 있는 재미있는 영화이다. 교사인 그가 좋아하는 괴테가 오래전 여행한 그 코스를 따라가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중간중간 그가 낭독하는 괴테의 시도 절묘하고, 서독에 사는 친척이 그 가족, 아니 동독을 대하는 태도가 오히려 서독의 정신적 빈한함을 말해주기도 하는데 진짜 재미있는 것은 이 가족 성격들의 건강함, 특히 그 딸의 멀쩡함에 있다. 그의 딸은 요즘 우리 나라에서도 유행하는 찢어뜨린 청바지를 입고(엉덩이쪽은 속옷까지 보일 정도로 찢었다), 동네 어른들앞에서 바지를 함부로 벗어 그 튼튼하게 생긴 엉덩이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보여주기도 하며 록음악을 귀에 달고 다니는, 어른들이 보기에는 못말리는 문제아(?)이다. 동독 멸망이전에 서독의 텔레비전 광고방송이 그 세대를 그렇게 만들었을 그 경지를 대변하는 것 같은 이 딸은 이탈리아에 가서도 근사한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 청년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예의 그 좌충우돌적 성격을 보여준다. 괴테의 시를 읽을 때 이외에는 트라비에 대한 사건과 걱정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고지식하고 근면한 아버지가 어느날 트라비의 바퀴가 없어진 것에 대한 화를 딸에게 퍼붓자 즉시 가출해버리는데 그 트라비에 대한 아버지의 극진한 애정을 익히 알고있기 때문에 길에서 노래를 불러 돈을 모아 그 자동차 바퀴를 사가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 로마에서 아버지를 놓치고 나서 어머니와 단둘이 있을 때 그 어머니의 뒤늦은 임신에 대해 어른스럽게 다독거려주는 장면등에서 보여지는대로 의외로 멀쩡한 구석을 갖고 있는 인물이 이 딸이다. 사실 그 멀쩡함이라는 것은 사물과 삶에 대해 진지한 이해일터이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문제아적 현상만 보고 있지 이러한 멀쩡함에 상당히 닫혀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해준다. 우리는 우리의 웃세대에게서 이미 그 꾸밈없는 근면함을, 벌써 아랫 세대에게는 그 꾸밈없는 자유로움을 배우고 있다. 우리 세대는 혹 무엇을 억지로 꾸며대고 있어서 현재의 ‘우리’의식이 사물과 삶을 스스로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자충수에 갇혀있지 않나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새삼 당대적으로 멀쩡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리고 가는 경로는 인간의 본질상 참으로 단순하며서도 그 성취 과정은 어렵다. 고도의 문화산업적 지배가 점차 새로운 욕망의 지형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 무정부적 문화 현실 속에서도 자기정화 능력이 있는 인간의 자기 성찰 욕망을 통해 사물과 삶에 대한 진지한 이해를 확충시켜나가는 것이 그 멀쩡함을 보장해준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굿거리’도 이러한 멀쩡함과, 그리고 대물림의 블루스가 만들어내는 삶과 천착된 희망 의식, 이것들이 쌓아가는 희망의 나이를 가져나갈 때 「모 베터 굿거리」의 생애를 살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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