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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2 | [문화저널]
석정의 문학세계와 매창의 한 - 부안지역 답사를 다녀와서 -
유순옥․주부 (2004-01-29 16:32:54)
풍요로왔던 황금들녘은 농민들을 거리로 내몰은 채 가을을 정리하고 있다. 추곡수매문제로 매년 이맘때면 몸살을 앓아야하는 우리 농촌현실은 소시민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조차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을 바라보며 시정에 젖을 여유를 주지 않는다. 차창 안에서는 막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결혼이후 욕심(?)을 부려 참가한 백제기행이건만 초행길이라서 그런지 모든 것이 낯설고 서먹서먹하기만 하다. 약방에 감초처럼 백제기행 떠나는 날이면 만사를 제쳐두고 나오시는 분들이 많은 듯 마이크 다루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부부로 처음 참가하신다는 송선생님 내외를 비롯해 모두가 전라도의 소리와 문학과 역사를 사랑하는 또 멋을 아는 분들 같아 모든 것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상대적으로 위축됨을 느꼈다. 버스는 김제를 벗어나 부안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석정선생님의 고향인 선은동. 고등학교 졸업이후 시 한 편 제대로 접할 수 없었던 까닭에 시인의 고향을 돌아보고 시의 세계를 논한다하니 괜히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뛰었다. 이윽고 도착한 석정선생님의 생가. 지금은 낡고 초라한 것이 여느 시골집과 다름없으나 예전엔 집 뒤로 강이 흐르고 앞으론 산이 펼쳐져 그야말로 명당자리였다 한다. 이 집은 1926년 석정선생님이 혼인한 후 상경, 불교전문강원에서 1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어머님의 병환을 핑계로 귀향해 어머니 별세후 1933년 새롭게 마련한 것으로 청구원(靑丘園)이라 일컬을 정도로 시인의 대단한 애착이 담긴 곳이란다. 이곳에서 처녀시집 「촛불」을 문단을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그는 고향의 자연속에 묻혀 암울했던 시대상을 시로 승화시켜 나갔으며, 1940년대 일제의 최후발악으로 말 그대로 암흑기에 처한 문학현실 속에서도 시작(詩作)을 멈추지 않았다 하니 그의 뜨거운 민족애로 가슴이 뭉클했다. 김민성님의 생가에 얽힌 얘기를 듣고 돌아서는 길에 문득 생가를 지키고 있을 석정선생님의 후손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어 물으니 석정선생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다며 20년이 넘도록 이곳저곳을 고쳐 옛자취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이곳에 객들이 찾아와 기웃대니 기분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로 오히려 방문객들을 난감하게 했다. 생가를 뒤로 한 채 돌아서는 가슴 언저리에 웬지모를 서글픔과 미안함이 자리잡는는다. 우리 일행은 서림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 늦가을 정취를 물씬 풍기는 그곳에는 황진이와 더불어 여류 시인으로 손꼽히는 매창의 시비가 있었다. 고을의 아전이었던 이양종의 서녀로 태어나 관기가 되어 당대의 명기로 이름을 떨쳤던 매창은 가무는 물론 거문고도 잘 탔으며 시조․한시에도 능한 타고난 예술인이었다 한다. 부안의 이름난 곳이면 발길을 멈추어 시를 읊을만큼 고향을 사랑했던 여인. 그러한 매창이 마흔을 채 넘기지 못한 서른 여덟살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하니 극복될 수 없는 신분상의 한(恨)때문이었을까! 그가 간지 3백 63년, 부안유지들의 열정으로 시비를 세워 그를 기리니 역사의 뒤뜰에 묻혀있기는 하나 영원히 외롭지 않으리란 생각을 하며 서림공원을 내려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식당을 향한 발길들이 빨라졌다. 따끈따끈한 우족탕에 깍두기를 말아 훌훌 먹고나니 한기가 풀리는 듯 했다. 일행은 곧 석정시비가 있는 벽산 해창공원을 향했다. 백제기행 자료집을 읽느라 밖에 비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어느새 한방울 두방울 꽤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내 드넓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더니 말끔히 단장된 석정시비가 눈앞에 들어왔다. 오로지 고향과 시문학을 위해 애써오신 분의 시비가 최근에 와서야 그분이 사랑하시던 고향에 세워진 것이 의아해 여쭈니 석정선생의 6.25전후 행적때문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그 행적이란 6.25때 주민들의 추대로 잠시 인민위원장을 지냈던 것이다. 민족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벌이던 그때 가들을 억압하고 친일하던 사람들이 해방후에도 버젓이 기득권을 누리며 활보하는 마당에 정치가도 아닌 시인의 시비 하나 건립하는데 과거의 행적이 그토록 국가안보에 누가 되는건지. 모순토성이인 이 나라 정치현실이 개탄스럽기만 했다. 날씨관계로 강의는 다음 장소로 미루고 기념촬영을 마친 뒤 우리 일행은 조각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특별히 다듬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속에 놓여진 이 작은 예술공간은 지나는 객들에게 잠시 농촌현실을 잊은채 초야에 묻혀 세속의 짐을 벗어버리고 작품세계에 몰입했을 작가의 여유를 시샘케 한다. 인물중심의 사실모사가 주를 이루고 있는 이곳은 작품의 예술성을 말하기 이전에 작가의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어린아이를 위해 작가가 손수 마련한 듯한 그네며 미끄럼틀이 그러했고 작가의 구상인 듯 잘 설계된 현대식 조형물에 기거하면서도 한켠에 잘 보존한 옛집이 그러했다. 또한 바쁜 일손 중에도 자식의 작업공간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을 아버지의 정성도 담긴 곳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 일정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일행은 이국적 건출물등이 늘어서있는 모항의 한켠에 자리를 잡고 얘기보따리를 풀었다.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석정선생님으 삶과 문학세계를 좀 더 깊이있게 알기 위해 정양선생님의 말씀에 모두 귀를 모았다. 서정적 시어를 빌어 시대적 어둠을 끊임없이 담아냈던 민족시인 신석정. 식민지적 시대상황속에서의 이러한 음모(?)는 그에게 있어선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목가시인 또는 전원시인으로 불리우는 그이지만 결코 그가 순수한 전원취향에만 몰입할 수 없었던 역사적 관심을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그의 첫시집「촛불」에서의 촛불은 석정의 뜻에 충분히 접근하기 위해 그 말속에 부여된 의미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촛불」은 단순한 서정적 의미만을 담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극히 작은 부분 밖에는 비추지 못하는 이기적인 개념으로 시인의 소시민적인 삶에 대한 자책감에서 고안된 용어이며 당시 감상적, 자위적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있는 지식인들에게 안일한 인생태도에서 벗어나 시대의 고통에 정면도전할 것을 촉구하는 의미인 것이다. 그는 결코 역사앞에 나약하지 않았다. 비장한 각오와 질긴 애정으로 이땅에 새벽이 오게 하기 위해 끊임없는 시작(詩作)활동을 이어 왔던 것이다. 그저 전원시인, 목가시인 쯤으로 알았던 석정선생에 대한 왜곡된 시각들이 하나 둘 허울을 벗어던지고 편협된 나의 사고를 환기시키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역사의 질곡 속에서 소외되고 왜곡되어 전해져 왔을까 생각하니 사회전반에 걸친 조심스런 재조명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정양선생님의 강연에 이어 이병훈 군산문화원장님의 석정선생에 대한 회고담이 있었다. 모든 문학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술과 담배를 좋아했던 시인, 그러나 절도를 잃지 않았던 민족시인. 그의 민족애를 가슴에 새긴채 즐거운 술마당이 벌어졌다. 술 한 잔에 서먹함을 녹이며 얘기꽃을 피워갔다. 구성진 권주가까지 곁들여져 발갛게 상기된 얼굴마다 흥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어둠이 우리를 찾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어둠에 쫓겨 마지막 여행지인 내소사에 발을 디뎠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로 이뤄진 가인봉에 안기어 그 영기를 받으면서 자리잡은 내소사는 탈속의 장엄한 분위기로 우리를 사로잡았다. 선덕여왕 2년 혜구두타라는 중이 창건해 소래사라고 불렀던 이 절은 처음에는 대소래사와 소소래사의 두 절을 지녔다 하는데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소소래사의 모습이라고 한다. 보물 제291호인 대웅보전, 제277호인 고려청동종, 제278호인 법화경절사본 등을 간직한 내소사는 고난을 뚫고 역사를 달려온 고고한 자태를 유적함속에 드러 낸 채 어둠속에 묻히고 있었다. 세속의 때를 씻어내기라도 하듯 비에 흠뻑 젖어버린 우리 일행은 암울했던 식민지시대 속에서도 소시민적인 삶을 거부했던 석정의 시세계와 매창의 한을 부안에 남겨둔 채 귀착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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