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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2 | [서평]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박일문, 1992, 민음사)
전북청년문학회 (2004-01-29 16:34:49)
전북청년문학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시중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을 선정하여 ‘화제작 토론’이라는 것을 한다. 그 자리에서는 주로 창작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작품의 가치나 유용성을 따지는 일을 하는데, 그것은 결국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착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화제작’ 이라는 것의 기준을 대중성과 작품성으로 놓고 볼 때 그 두가지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점을 감안하고라도 권위있는 문학상 수상작이나 기적적인 베스트 셀러는 어쩔 수 없이 화제작 후보로 추천되기 마련인데, 바로 그런류의 대표적인 작품인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웬일인지 화제작 선정에서 제외되었다. 더욱 의아스러운 것은 그렇게 된 것에 대해 회원 누구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매우 적극적인 무언의 동의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잘 팔리고 말도 많은 화제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문학회의 화제작으로 오르는 데는 실패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다. 먼저 이 책에서는 우리가 취해야 할 가치보다 버려야 할 가치가 더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고, 이미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목소리들이 이 책을 단죄했으므로 우리까지 나서서 수고로운 노력을 들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이다. 또, 그렇지 않아도 심사사 뒤틀리는 화제의 베스트 셀러를 우리까지 화제작으로 선정하여 그 책의 명성(?)을 드높이고 책이 한 권이라도 더 팔리게 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적극적인 의미도 들어있다. 이쯤되면 청년 문학인들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해 얼마나 단호히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제꺽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구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는 문화권에 살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비애’이다. 추측컨대, 『살아남의 자의 슬픔』이 백만부 팔렸다면 그중의 반절 이상은 ‘분노와 비애’의 독자들 손에 쥐어져 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분노」(출판동네 17호)를 토로한 어떤 독자는 “나는 작가의 뒤에 무엇(!)이 있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어린 사람들을 유혹하기에는 적당한 소설이다. 몇 년 전의 상황을 잘 모르는 어린 사람들은 진짜로 믿어버릴 수가 있다. 그리고 허무주의에 빠져 버릴 수도 있다. 사실이 그렇다면 몰라도 완벽한 허위에 싸여서 말이다. 더 큰 문제는 학생운동에 애정을 가진 민주시민들이다. 이 소설이 연극으로까지 공연된다는데 여간 걱정이 아니다. 사실을 알고 읽어야 함정에 넘어가지 않을텐데.”라는 말을 통해 분노와 안타까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변혁운동에 애정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을 것이다. 운동권 문제를 다루는 것은 80년대를 지나온 작가들이 손쉽게 누릴 수 있는 ‘프리미엄’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실로 운동권에 몸담고 투쟁과 패배 속에서 승리와 좌절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도 그럴듯하게 운동권 냄새를 풍길 수 있는 글을 써낼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한 글들에서는 한결같이 허무와 냉소의 냄새가 짙게 풍겨나온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자들에게서 풍기는 냄새 말이다. 따라서 그들-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세대 포스트 모던 작가들-이 작품에 그럴듯한 무게를 싣고 균형감각을 시위하기 위해 ‘운동’을 ‘양념’으로 쓰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꼬치꼬치 들추어 내면서 그들의 허위를 지적하는 것은 우리의 지나친 진지함일 수도 있다. 애초에 그들에게는 자기의 작품을 통해 뭔가 뚜렷한 가치를 독자들에게 제공해 주겠다는 의도가 없는 것으로 보이며, 혼란한 사고를 현란한 표현력으로 포장하는데 온갖 정열을 쏟고 있을 뿐인 것 같다. 작가 박일문은 작품 속에서 당당히 <나는 플롯이나 갈등, 묘사나 서술 같은 소설의 정공법은 모른다>고 사뭇 해탈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지만, 정말로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고상한 변명을 할 수가 없는 법이다. 모르면 그만이지, 플롯, 갈등, 묘사, 서술 따위의 단어를 동원해서 자신의 현학성을 과시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내친김에 이러한 현학성-현학성과 삶의 고통에 맞서 피흘린 자들이 갖는 진지하고 신선한 비유나 표현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할 때-을 좀 더 들춰 보자면, 주인공의 거의 신기에 가까운 독서체험과 박식한 문화지식이 작품 내용과는 상관없이 독자들을 주눅들게 만드는 현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마르쿠제나 알튀세르부터 「철저한 변비 퇴치법」까지 꿰뚫고 있는 사람, 렛잇비에서 그루터기를 지나 라흐마니노프까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배우와 영화를 연결짓지 않고 감독과 영화를 연결짓는 탁월한 문화적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주인공(나)이다.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종국에는 고트프리트 벤이 옳았다고, 중얼거릴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로 결론을 내릴 때, 고트프리트 벤을 모르는 독자들은 순간적으완전히 무시당하고 만다. 적어도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작가는 젊은 세대의 혼란과 허위, 그리고 욕심 많은 감성의 ‘허’를 얄미울 정도로 명확히 찌르고 있다고 보여진다. 주인공의 삶은 대단히 치열하거나 자유롭고 우아하며 거의 신비에 가깝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몇 사람은 다 그렇다. 어머니가 그렇고 라라가 그렇고 디디가 그렇다. 그들의 대화는 매우 수준 높고 발랄한 지성이 번득이는 것처럼 보이며 그들의 행동은 자유를 향해 거침이 없다. 이토록 매력적인 주인공은 어떠한 삶의 이력을 가지고 있을까? 그의 입을 통해 이력을 듣다보면 우리는 또 놀라고 만다. <학생운동, 그리고 졸업. 노동운동, 그리고 해고. 그리고 감옥. 출옥 후, 출판문화 운동, 그리고 저술노동자 생활. 그리고 수배. 그리고 종교운동&#8943;&#8943;> 그야말로 운동과 그의 삶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스스로 그렇게 주장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사람을 변혁운동에 몸바쳐 살아온 사람이라고 흔쾌히 믿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적어도 우리가 느끼기에 그는 운동의 가장 큰 원칙을 상실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운동이 시작된다고 할 때 그가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지독한 냉소는 도저히 운동적 관점으로 해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설 밖으로 뛰쳐 나와 독자에게 보내는-독자도 인간이니까-냉소에서 느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우리시대의 5.18세대에게 이책을 바칩니다.>라고 책머리에 밝혀 놓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책을 받아들일 5.18세대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또한 ‘애국적 사회진출로의 글쓰기’를 하기 위해 소설가가 작품 끄트머리의 발언은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뻔 했다. 여기까지, 다소 거칠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화제작으로 될 수 없었던 이유와 우리의 비판적 태도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았다. 어쩌면 이 글은 서평이라기 보다는 젊은 문학인들의 사소한 ‘의견’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의견을 끝까지 들어준다면 마지막으로 작가에 대한 애정고백(?)도 곁들이고싶다. 『말』지 11월호에 실린 작가 박일문의 태도에서는 비판에 대한 겸허함과 삶을 내팽개치지 않는 자의 성실함이 엿보인다. 작가는 스스로도 자기 소설이 불러일으킨 반향에 놀라고 있으며, 의도하지는 않았다고해도 일말의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반성을 통해 보다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킬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가 그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보다 건강한 대열로 뛰어들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전혀 새로운 전략과 전술로 이 싸움에 기꺼이 내 몸을 던질 것이다.”는 그의 말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가 과거에 운동권이었는가 아니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그가 앞으로 어떠한 길을 걸을 것인가에 우리는 주목할 것이다. 오욕 속에서 살아남은 자는 ‘슬픔’을 통해 변화한다. 모든 슬픔은 힘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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