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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2 | [문화저널]
정령치 마애불상군
한수영․전북대 고고인류학과 조교 (2004-01-29 16:35:55)
1. 들어가는 말 지리산을 끼고 있는 남원군 산내면에는 마한 때의 궁궐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 궁터로 달궁이라는 지점이 구체적으로 거명되고 있다. 달궁의 주변에서는 옛적 마한시대의 전투에서 사용된 돌화살촉이나 돌칼이 나오고 있고, 마한때의 장군인 정장군의 초상이 정령치에 있으며 그것을 모시면 복을 받는다는 전설도 있다. 남원 문화원장 노상준 선생은 정령치에 있는 정장군상으로 일컬어지는 불상을 책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1991년 들어서 이 불상의 존재가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고 이를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조사가 있었다. 이 조사는 남원군에 있는 구룡암 주지스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져 그 결과 이 마애불상군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불상군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행정구역상 남원군 산내면 덕동리 산 215번지에 속한다. 해발 1100~1200미터 높이의 정령치에는 최근에 개설된 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고개마루에는 넓지않은 광장이 있어 주차공간과 간이 휴게소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 구릉은 해발 1304미터 높이의 고리봉을 거쳐 세걸산으로 이어지는데 마애불상군은 고리봉과 정령치 고개마루의 사이에 있다. 즉 정령치 고개마루에서 고리봉쪽으로 1km남짓 산길을 따라가다보면 산마루에 높은 바위들이 들어서 있으며 이 바위들의 아래로 산의 경사가 완만한 줄기를 이루며 덕동부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애불상군은 산마루에서 급경사를 이루며 동쪽으로 내려오다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경계부분에 있는 바위면에 자리하고 있다. 불상군이 있는 주변은 이미 말한바와 같이 경사가 급하지 않으며 비교적 넓은 대지를 이루고 있다. 또 이 대지에는 2개소에 자연샘이 있어 작은 골짜기로 흘러들고 있으며 이 자연샘을 중심으로 불상군의 주변을 포괄하는 넓은 범위에 걸쳐서 기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하고 있다. 이같은 유물은 정령치 고개 마루에 있는 간이 휴게소에서부터 고리봉에 이르는 산마루와 그에 접하는 산기슭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산재하고 있다. 다만 불상군이 있는 주변에 보다 많은 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어 불상군을 중심으로 유구가 존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또 불상군이 있는 지역의 위쪽 산마루를 따라서, 즉 정령치의 고개마루에서 세걸산을 잇는 산마루에는 토성과 같은 성격의 방어시설이 존재한다. 이는 이 산마루를 따라서 서쪽으로 산사면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그 경사가 자연적인 곳도 있으나 인공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분명한 곳이 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이 방어시설로 여겨지는 유구는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고 부분적으로 자연지형으로는 취약한 부분만을 보완하는 형태의 것이다. 이 시설이 북쪽으로 어디까지 이어지는진 분명하지 않으나 이 산줄기의 서쪽에서 운봉들판을 둘러싸고 있는 이백면-운봉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에는 산봉우리마다 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점에서 운봉들판을 둘러싸는 산줄기를 따라서 방어를 위한 시설이 마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운봉들판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들은 대체로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이들 산성이 있는 주변 지역에 가야계의 고분군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에서도 분명하다. 따라서 이 정령치와 세걸산을 잇는 방어시설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며 산마루와 그 주변 등성이에서 출토되는 삼국시대 토기들은 이 같은 방어시설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마애불상군 마애불상군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높게 있는 바위에 조각되어 있으며 주불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동향하는 주불상은 분리된 두 개의 바위면에 각기 1구씩의 불상이 조각된 것이며 이 2구의 주불상의 주변과 주불상이 있는 바위면의 측면에 크기가 작은 불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북쪽에 있는 불상을 제1주불로 하고 남쪽의 주불은 제2주불로 하여 설명하겠다. 1) 제 1주불 바위면이 고르지 않은 탓으로 조각된 불상의 윤곽이 분명하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바위면의 결락이 심하지 않아서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불상은 윗면이 약간 좁은 사다리꼴 입면의 바위면 전체에 걸쳐 조각되어 있으며 바위면의 요철을 적절히 이용하였다. 불상의 상호는 타원형을 이루며 미간사이에는 백호공이 있으며 귀는 길게 늘어졌으나 상호자체가 긴 타원형인 탓으로 턱 부분에서 끝나고 있다. 코가 특히 크며 바위면에서 밖으로 크게 돌출되었으며 콧날개가 뚜렷하며 높다. 코에 비하여 입은 작으며 좁고 가늘고 긴 눈에 눈썹 부분이 뚜렷하게 조각되었다. 두손은 가슴부분에서 모두어 잡았는데 통견의 옷자락이 그 손위로 흘러내리도록 되어 수인은 분명하지 않으며 옷무늬도 뚜렷하지 못하다. 손위부분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이 앉아있는 자세의 부처 발까지 이르며 옷자락 바깥으로 드러난 부분에는 발가락이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하여 큰 머리와 상호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코부분이 특이하여 상대적으로 손과 발은 작은 편이다. 불상의 좌측 상단부분에는 위에서 아래쪽으로 ‘世田(?)明月智佛’이라는 6자의 명문이 있다. 2) 제 2주불 제 1주불의 남쪽에 있는 것으로 윤곽이 더욱 흐릿하며 다만 코부분이 뚜렷하게 드러날 뿐이다. 바위면의 결락이 심한 편이며 음각된 선도 깊지 않은 탓으로 전체적인 형상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바위면은 삼각형에 가까운 입면을 보이며 바위면을 따라서 불상의 신체를 조각하였으며 아랫쪽에 또다른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부처의 하단부는 더욱 분명하지 않다. 상호는 타원형을 이루며 코가 얼굴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상대적으로 작고 좁은 입과 가늘고 긴 눈이 얕게 음각되었다. 옷무늬는 분명하지 않으며 손은 옷주름 때문에 수인을 확인할 수가 없으며 가슴부분에서 모아진 손위로 흘러내린 옷자락이 앉아있는 부처의 무릎부분까지 내려뜨려져 있다. 바위면의 제약 탓인 듯 얼굴과 어깨부분이 좁으며 상대적으로 무릎부분이 옆으로 넓다. 우측에 ‘비로자나불’로 기명되어 있으나 명문이 얕아서 분명하지 않다. 3)제 1주불 북측 협시 제 1주불의 발 아래부분 북측에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코가 크며 상호는 타원형을 이룬다. 왼손은 손가락을 굽힌 상태로 가슴부분에 놓여 있으며 오른손은 어깨부분으로 들어올린 형태이다. 어깨가 수평으로 당당하며 앉아있는 부처로 좌대는 연화좌대이다. 연화좌대는 간판이 있는 연화판을 배치한 것으로 연화는 끝부분이 좁아드는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측면으로 갈수록 연화의 폭이 좁아들고 있어 원형 연화좌대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여진다. 4)제 1주불 측면 좌불 제 1주불이 있는 바위면은 남쪽 끝부분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어가고 그 옆으로 제 2주불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소불은 제 1주불이 있는 바위의 남쪽 끝부분이 안쪽으로 들어간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상호는 타원형이며 두광과 신광이 음각선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코가 크고 뚜렷하다. 옷은 우견편단이며 손은 앉은 자세에서 배부분에 놓여 있으며 선정인을 결하고 있다. 발은 무릎이 옆으로 넓어 좌대에 앉은 것처럼 안정감이 있는데 무릎의 아래부분 바위면이 약간 앞으로 돌출되어 좌대같이 기능한 때문으로 여겨진다. 5) 제 2주불 하단 좌불 제 2주불의 발아래 부분에 있는 부처로 크기는 주불에 비하여 작으나 전체적인 조각 양상은 같다. 코가 크며 상호는 타원형이며 손은 가슴부분에서 약간아래쪽에서 선정인을 결하고 있다. 6) 제 2주불 하단 소불 제 2주불 하단 좌불의 우측 아래쪽의 바위면이 일부 떨어져 나갔으며 이 떨어져나간 부분은 심각형의 작은 바위그늘을 이루고 있다. 이 소불은 이 바위그늘 부분에 조각되어 있으며 좌불이다. 전체적인 형상은 분명하지 않으나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 상호에 코가 크고 뚜렷하다. 손은 선정인을 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옷자락 무늬가 일부 남아 있는데 우견편단으로 보인다. 7) 제 2주불 측면 불상군 제 2불상이 조각된 바위의 남쪽 측면에 3구의 불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제 2불상이 있는 바위의 측면은 윗부분이 넓고 아래로 좁아드는 삼각형이다. 이 삼각형을 보이는 바위면의 윗단에 1구의 불상이 있으며 그 우측 약간 아래로 또 하나의 불상이 있으며 나머지 1구의 불상은 2번째 불상의 좌측 아래 부분으로 이 부분은 주불이 있는 정면쪽으로 치우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불상들은 모두 좌불로 상호는 타원형을 이루며 코가 전체적으로 크게 얕게 음각되어 전체의 형상이 분명하지 않다. 손은 가슴에서 약간 아래 배부분에 모두어 잡고 있으며 좌대는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으나 무릎이 옆으로 넓어 안정감이 있다. 3. 고 찰 이 불상의 조성시기나 그 조성에 따른 연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天隱寺寺蹟記’에 정령치에 개령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개령암이 이 마애불을 중심으로 하여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은사사적기에 의하면 개령암은 신라 헌강왕 1년(서기 875년) 도선국사에 의하여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같은 기록은 마애불의 주변에 통일신라 시대의 토기로 볼 수 있는 유물이 산재하고 있으며 그보다 앞서는 시기의 유물도 있어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상의 조성연대는 그 형식상 후술할 바와 같이 고려시대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이 기록을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같은 사적기의 기록과 달리 이 마애불상을 정장군의 초상으로 보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산내면과 주천면 주민들 사이에 전해지는 구전이나 남원지에 수록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옛적 마한시기에 이 지역에는 황장군과 정장군이 있었으며 그들이 성을 쌓고 나라를 지켰다고 한다. 달궁은 그 당시 마한의 왕이 사용한 이궁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황장군이 지킨 곳을 황령치, 정장군이 있던 곳을 정령치라고 한다고 한다. 또 산내면 부운 마을에는 황장군이 전투를 벌여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는 개선동, 이들에 의하여 죽은 적군의 시체가 무더기로 쌓여있던 곳을 ‘층층대’라고 한다. 다시 이들이 나라를 위하여 노력한 것을 기려서 이들의 초상을 바위에 조각하고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구전의 내용은 얼마간 서로 다르나 대체로 이들 마애불중 주불 2분을 정장군과 황장군으로 인식하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것 같다. 구전에서는 이들 마애불을 불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장군의 초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마한 때의 일로 전한다. 인근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구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조선 중기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남원지의 기록도 그같은 구전을 근거로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추정이 타당하다면 남원지의 기록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이 마애불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 마애불을 불상이 아닌 장군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불상을 불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이를 장군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이 마애불상군을 중심으로 조성되었을 암자가 이미 없어졌고 혹 그같은 암자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 마애불상군을 불상으로 모시던 관념이 남원지의 기록이전에 거의 없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애불상의 조성시기는 장군상으로 이를 잘못 인식하기 훨씬 이전에 이루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이 마애불상군은 형식상 좌불이라는 점과 상호에서 특징적으로 크고 넓은 코가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손의 모양은 이미 살펴본 바와같이 명확하지 않으며 수인을 통하여 불상의 종류를 추론하고 이를 통하여 조성시기를 추론할 수도 없다. 또 그 조성이 양식적인 특징을 가지는 것도 아니나 손과 발, 그리고 머리의 비례에 의하면 이 마애불이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또 제 1주불 측면에 있는 협시불의 좌대에서 드러난 연화문의 양식은 통일신라의 중심적인 연꽃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연화문의 양식은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유행하는 양식으로 추정해볼 수가 있다. 이 연화좌대를 갖춘 협시불이 이 마애불상군의 조성연대를 대표할 수 있느냐하는 점이 우선 검토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마애불사군의 불상들은 양식상 서로 상통되는 면이 많은 점에서 일단 동일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이며 적어도 그 조성에서 시기차이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마애불상군은 구도에서 2구의 주불을 중심으로 일견하여 무질서하다고 할 정도로 작은 불상들이 조성되어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2구의 주불이 이미 추정한 바와같이 동일한 시기에 조성되었거나 적어도 동일한 시기에 예배의 대상으로서 모셔졌다면 이를 이불신앙의 유행과 관련시킬 수도 있다. 즉 응신불과 법신불의 개념, 또는 과거불과 현세불의 대응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유행하는 이불신앙과 관련하여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점에서 불상의 방향을 생각하면 이들 주불이 동향하는 바위면에 조각되어 있으며 비로자나불, 세전명월불이라는 명문을 지니고 있는 것이 검토될 수 있다. 즉 사방불 개념에 의하여 동향하는 부처를 일단 아미타불로 상정할 수 있는데 이 경우는 이불이 있다는 점외에도 각기 아미타불이 아닌 부처로 인식하여 명문이 남겨져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 명문이 불상의 조성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지고 이를 모시던 사람들이 명문과 같은 부처로 인식하여 신앙하였다면 비로자나불과 석가세본신앙이 뒤섞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한편으로 비로자나불의 특징적인 수인을 볼 수 없는 점이나 석가세존으로 추정되는 제 1주불의 명칭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 불상의 조성이 지방 세력에 의하여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다. 2구의 주불외에 7구의 작은 부처를 배치하고 있는 구도는 특이하여 유례를 찾기 어렵다. 얼마간 차이가 있으나 불상들의 모습이 동일한 양상을 보이며 높고 큰 코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천불천탑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운주사의 석불을 생각할 수가 있다. 정령치 마애불상이 9구의 불상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점이나 그 주변에 열을 지은 불상군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운주사의 석불군과 상통되는 요소로 생각될 수 있다. 또 그 불상의 조성양식이 운주사의 석불과 공통되고 있어 양자간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조성시기는 그리 큰 차이를 드러내지 않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4. 맺는 말 지금까지 정령치에 자리하고 있는 마애석불군을 간단히 소개하고 그 조성연대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이 석불군의 조성연대를 운주사 석불과 양식상 같은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11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연대 비정이 타당한 것으로 입증되기 위하여서는 앞으로 보다 조사가 필요하며 지표상의 관찰만으로는 판단할 수는 없다. 또 이 석불들을 중심으로 주변지역에는 삼국시대 이래의 유적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유적들이 남원지방의 고대사 뿐만아니라 전남북 지방의 고대사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이 지역이 전남북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의 하나였다는 점에서 고대 역사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을 지역으로 추론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달궁을 둘러싸고 전해지는 전설의 실체에 대하여서도 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마애석불과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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