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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2 | [저널초점]
「휴거」파문과 「즐거운 사라」 우리사회의 건강성을 회복시키는 일
윤덕향․발행인 (2004-01-29 16:38:56)
휴거는 실현되지 안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휴거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겠지만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다.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은 천지창조론에 입각하여 천지창조의 시간을 계산한 바가 있다. 그중 죤 라이트후트는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9시경에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하여 정확한 날짜와 시간까지를 제시하였다. 또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루터는 천지창조가 기원전 4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하면서도 4032년, 4004년, 3949년, 3946년으로 그 연대를 확정하지 못하였다. 이번 휴거 파동도 그같은 계산에 다름 아니다. 신의 시간은 인간의 지혜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이며 이를 인간이 계산하고 파악하려할 때 종교는 이미 종교로서의 기반을 상당부분 상실하게 된다. 이제 또다른 휴거론자들이 등장할지 모른다. 그들은 신의 섭리를 인간이 파악하고 예단할 수 있는 것으로 그들 주장의 근거를 삼으려는 방자함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종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고 미칠 수 없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보아야할 일이다. 즉 종교를 빙자하여 신의 섭리를 훔칠 수 있다는 오만함과 방자함에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뉘우쳐야만 되는 것이다. 그 경우에 비로소 신으로부터 진정한 휴거의 대상으로서 선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언사로 순진하고 어린 사람의 심지를 흐리는 것, 그것이 신으로부터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여기에서 때지난 휴거론을 거론하려는 것이 아니다. 휴거론에 동조하였던 사람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휴거론의 진정한 신봉자들과 지상 논쟁을 벌이려는 의도도, 그럴만큼 확고한 신앙도 없다. 휴거론이 이 땅에서 위세를 떨치던 양상이 흡사 19세기말의 천지개벽론과 유사하다는 지적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보다 근원적으로 우리 사회 집단이 휴거론에 많든 적든 귀 기울이고 불안에 싸여 있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집단 자살에 대비하여 많은 치안유지병력이 동원되고, 호기심이든 혹시나 하는 얼마간의 불안을 안고 적잖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텔레비전에서는 이를 방영하는 것같은 일이 일어난 사회집단을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어른스럽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이런저런 바람을 일으켜 우리 사회의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 것같은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얼마전 모 대학교수가 죄명은 분명하지 않으나 음란 표현물 배포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그후 그 교수의 소속학교에서는 직위해제를 하였다고 한다. 손발이 척척 맞아들어가는 느낌이다. 해당학교의 인사에 대한 규칙이 어떤지를 알 수 없으니 왈가왈부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구속된 피의자는 무죄로 간주된다고 하니 구속된 것이 직위해제를 할 하등의 사유가 될 법하지 않다. 죄 없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나 규칙은 없을 것이니 말이다. 아마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학교의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명분으로 직위해제를 하였을 것으로 생각해 둘 수 있을 것 같다. 이때 해당행위, 즉 ‘즐거운 사라’인지 ‘가자, 장미여관으로’인지를 집필, 발간하여 사회에 해악을 끼친 행위가 지탄의 대상인지 아니면 무죄인지도 모르는 구속이라는 사유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것인지 모호하다. 해당 학교에서 책을 발간한 것 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가 뒤늦게 검찰에서 구속하고 그것을 빌미로 직위해제를 한 것으로 보면 구속으로 인한 사회적 물의가 직위해제의 원인인 것 같다. 즉 직위해제의 사유는 형식논리상 언론에서 크게 다룬 구속이 되는 셈이며 만약 무죄 판결을 받는다면 직위해제는 분분했던 언론보도 탓이다. 작자가 구속된 후 책들이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그토록 요란스러운가하는 호기심에서 구해보았다. 문학과는 거리가 먼 탓으로 바가 무엇인지도 알 수도 없었다. 그런 한편으로 왜 구속을 하여 문학과는 거리가 있는 소시민의 호기심을 부추겼을까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예술은 사회의 문화적 역량에 의하여 성장하고 소멸하는 것이다. 예술이란 집단이 오랜 시간을 두고 자신들의 정서에 맞지않는 것은 버리고 정서에 맞는 것은 선택하는 것에 의하여 축적되는 것이다. 예술을 포함한 문화는 유기체와 같아서 사회적 통념과 거리가 있거나 적절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건강한 사람이 얼마간의 병균을 물리쳐 건강을 유지하듯 건전한 사회는 건전한 것을 선택하여 건전한 문화를 형성한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한 환자에게는 때로 외부로부터의 보호와 치료가 요구되듯 자력만으로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때로 위대한 예술활동이 당대에 평가되지 못하는 것은 그 작품이 작가의 천재성에 의하여 당시의 문화적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 어느 순간 한줌의 쓰레기로 처리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시간과 사회집단의 엄정한 취사선택을 통하여 예술은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한 작가, 음악가, 화가의 활동은 공권력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다룰 수 있을지 모르나 그 활동에 대한 평가는 오랜 시간의 검증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예술활동에 공권력의 개입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이같은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고 생각된다. 이에 반하여 공권력은 사회집단의 자체 정화능력으로는 건강을 회복할 수 없으며 외과적인 수술이 요구된다는 판단인 것 같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일단 사법부에 넘겨져 그 추이가 주목된다. 우리 사회에 우리의 청소년에게 음란퇴폐물이 ‘즐거운 사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한 음란 퇴폐물이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런 모든 것들을 걸러낼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이다. 그리고 그에 대신하여 올곧은 문학과 음악, 무용, 그리고 미술 등 예술을 우리 사회에 튼실하게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 뿌리가 흔들리고 병들 때 공권력의 의도와는 달리 ‘즐거운 사라’는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하며 청소년 모두가 필독해야 될 위대한 작품이 될 수도 있다. 휴거파문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뒤이은 ‘즐거운 사라’ 사건은 흔들리는 문화적 역량에 대처하는 공권력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금 흔들리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본질적이고 시급한 것은 우리 문화의 뿌리를 튼실하게 세우는 것이다. 그 뿌리가 올곧게 자랄 때 휴거나 즐거운 사라는 찻잔속의 미풍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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