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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 | [서평]
『매월당 김시습』 (이문구․문이당․1992)
정철성․편집위원(2004-02-03 10:20:35)
요즈음 역사적 인물들을 작품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이 상당수의 독자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있음을 본보기 삼아 쏟아져 나오는 이런 소설들은 대개 한 인물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많이 팔리는 물건이 반드시 좋은 물건은 아닌 것처럼 많이 읽히는 소설이 좋은 소설인 경우도 드문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이런 인물소설이 독자수를 늘린 것 만큼 예술적 성취도를 높였는가를 물으면 그 대답이 아니라는 쪽으로 기울고 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인물소설은 즉석 식당의 인스턴트 음식처럼 먹기 쉽게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이문구의 장편소설 『매월당 김시습』은 어쩌다 인물소설이 기세를 올리는 가운데 나왔다. 그래서 『매월당 김시습』의 표지와 마주친 독자가 이 또한 그 중의 하나가 아닌가 의심하는 것도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작가 이문구의 이름으 f들어 알고 있고 그의 『관촌수필』이나 『우리동네』 연작을 읽어본 독자라 할지라도, 세태가 세태인지라, 이런 의구심을 서둘러 덮어버리기에는 어딘지 찜찜하다. 그러나 의구심은 속표지를 넘겨 ‘작가의 말’을 지나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여 본문을 예닐곱 쪽 읽을 무렵이면 말끔하게 가시고 만다. 『매월당 김시습』은 줄거리의 전개에서 흥미를 찾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매월당에 대한 관심이 “선생의 생애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빚어진 비극의 일막이 아니라, 스스로 흐름의 본류에 뒤섞여 흐르기를 거부하고 독창적인 삶과 문학을 창출함으로써, 역사에 또다른 흐름이 있게 한 문학적 비판 의식의 효시”였기 때문에 발동했노라고 쓰고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한다. 이는 역사적 인식이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를 해석한 결과이고, 따라서 역사는 끊임없는 재해석의 축적위에 쌓은 또 하나의 재해석이라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서의 역사는 우리의 인식 범위 밖에 있고, 우리는 과거를 재구성하기 위하여 기록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성종 24년 계축년 정월 초이레 아니면 초여드레 그날 매월당의 뇌리를 스치던 사념들을 오늘 우리의 인식체계 속에서 다시 증폭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매월당 김시습』을 읽어야 한다. 세조의 찬탈이 당대의 사대부에게 떠넘긴 부담은 컸다. 이 사건은 단순히 인간적인 의리의 수준이나 도덕적 의무감의 차원에서 해결할 성질의 사건이 아니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 왕조의 권력은 문벌귀족이 장악하고 있었고, 고려말에 이르러 외세 즉 원나라의 세력에 편승한 권문세가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시흥사대부는 권력의 재분할을 꿈꾸게 된다. 그들은 고려의 근간을 이루었던 불교를 배척하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로써 주자학을 받아들이는 한편 이성계를 핵으로 하는 군벌과 결합하여 혁명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룩한 역성혁명은 그들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모순이다. ‘하여가’와 ‘단심가’의 일화는 그들이 처한 진퇴유곡을 보여준다. 뒷노래의 주인공 정몽주는 죽어 선죽교의 핏빛이 되었고 앞노래의 이방원은 살아 왕이 되었다. 사대부들은 그들의 적이었던 정몽주를 충신으로 높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들의 왕을 비판할 수도 없었다. 아니 그들은 스스로 비판을 삼갔다. 대신 이른바 양시론이 이러한 논의에 슬그머니 등장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세조의 찬탈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나타난다. 우리는 사육신이 누구누구인지 알고 있다. 이들이 피해자라면 가해자는 세조이다. 피해자는 역적에서 충신으로 복권되었지만 그러나 가해자의 위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말년에 세조가 등창이 나서 오대산 계곡물에 씻으러 갔을 때 문수보살이 나타나 고쳐주었다는 전설 같지 않은 전설은 가해자에게 남아있던 일말의 양심마저 의심케 한다. 게다가 가해자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소설의 첫머리에서 매월당의 잇 끝에 갈려나오는 정창손, 김질, 한확, 권남, 홍달순, 홍윤성, 신숙구, 정인지, 한명회 등의 훈구대작들을 대면해 보라. 이들의 행위에 대하여 우리는 아는 바가 적다. 매월당은 그들의 말과 행동이 서로 다름을 신랄하게 증언한다. 그들이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렸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이조의 건국 이념을 스스로 무너뜨려 부위영화를 누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조정의 신하에게는 없는 이론과 실천의 정합성이 매월당같은 야인에게서 발견되는 역설은 매월당 역시 체제의 유지에 반대방향에서 공헌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 매월당은 세조에 대하여는 대놓고 욕하기를 삼간다. 이문구가 그리고 있는 매월당은 유교적이다. 그의 매월당은 향화-사당의 향불-을 잇지 못함에 죄의식을 느끼는 인물이다. 불필요하다고 느껴질 만큼 길게 다루어진 소동라라는 기녀와의 사건도 어떻게든 자식을 두어 조상의 제사는 모셔야한다는 의무를 매월당이 잊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물론 장삼을 입고 절에 기거하며 불경류뿐 아니라 도교의 서적도 뒤적이는 모습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문구의 매월당은 유교적이다. 이는 이문구 자신의 성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는 유불선의 혼합이 낯설지 않은 풍토에서 매월당이 당대의 다양한 이념체계들을 어떻게 수용하려고 했는가에 대하여 명확한 결론을 유보하고 있다. 이 소설에 인용된 한시(漢詩)만을 대상으로 살피더라도 예술가로서의 매월당, 시인이자 소설가로서의 매월당은 결코 유교의 이데올로기에 묶인 선비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당대 사회의 허구를 꿰뚫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왕을 갈아치울 계책을 세우지는 못했는가를 묻는 것은 신분의 구별이나 왕정의 질서를 의심하지 않았던 매월당에게는 무리한 주문이다. 설사 매월당이 그런 음모를 꿈꾸었다 할지라도 성공의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여하튼 주류를 이루었다고 자부했던 당대의 벼슬아치들에게 그들의 통치방식이 비논리적인 체계에 근거하고 있음을 반어적으로 보여준 점이 매월당을 매월당으로 보이게 만든다고 평가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의 체제에 대한 반항이 주로 시를 매개로 이루어진 점은 전통적으로 현실에서의 직접적인 참여가 불가능함을 깨달은 지식인이 후일을 기약하는 방식의 하나로 취하는 술책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제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른바 한글세대가 『매월당 김시습』을 읽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첫째로는 일상언어와 유사하게 보이면서도 막상 읽어보면 전혀 감칠맛이 다른 이문구 특유의 요설 때문이다. 둘째로는 한자어의 사용이 빈번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보다 한자의 사용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예컨대 지금은 뉴스라는 뜻으로 쓰이는 소식(消息)이 ‘천지의 기운’으로, 깨끗하고 건강함을 뜻하는 위생(衛生)이 ‘삶의 보호’로 풀이되는 것을 보면 용법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번역문이 앞서기는 하지만 서너쪽 건너 한편 꼴로 인용된 한시들도 익숙치 못한 독자에게는 걸림이다. 그러나 “청산은 다가오며 어리석다 웃지만, 저 달은 누가 나누어 옹달샘에게 던졌다”와 같은 구절을 곱씹어 보고 어느날 맑은 새벽 찬 샘물에 이따금 가볍게 흔들리며 떠 있는 달을 찾아보라. 그러면 매월당의 시심이 가슴에 한방울 낙수쳐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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