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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 | [문화저널]
내 군대생활과 광주의 합작품, 『발굴』
이 병 천․소설가․ 편집위원 (2004-02-03 10:43:13)
요즘 시덥잖은 남자들은 둘러 앉았다 하면 승용차 얘기들을 하는 모양이다. 배기통이 어쩌구 안전율이 다른 차종에 비해서 어떻다는 둥, 나같은 사람들은 아예 대화에 끼어들 여지조차 없는 그런 화제 말이다. 생각해보면 내게는 그 주제가 그야말로 무슨 신달들, 그러니까 구두나 장화, 운동화, 워카, 실내화, 농구화, 축구화, 등산화, 고무신, 가죽신, 나막신, 쓰리빠, 게다짝, 발싸개 등과 같이 지저분하고 가치없는 얘기들을 한도 끄도없이 계속해대는 일만큼이나 지루할 뿐이다. 물론 모르겠다. 나도 차를 울전하게 된다면 그때는 남들보다 더 <신>나게, 내 특유의 화법대로 승용차에 대해서 너스레를 늘어놓게 될는지는… 그렇다면 차가 이렇게 보급되기 전에는 남자들이 도대체 무슨 화제들로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대화를 유지했을꼬, 나는 생각해본다. 아내와 자식? 직장? 증권? 땅? 여자? 아마도 틀림없이 그런 것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기 전에는 또 무슨 화제가 우리를 지배했을까? 연애였던가? 아니면 서른세살의 예수? 군대? 그렇다. 군대였다. 지저분하기로는 남이 신다버린 신발보다 양말보다 더 못할게 없었던 군대생활! 남자들은 군대를 제대하면서 흔히 무슨 선언처럼 군대가 있던 쪽으로는 아예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말들을 한다. 말의 의미상 설사 그쪽이 훤히 트인 길거리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럴 법한데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그 비슷한 다짐을 한 적이 실제로 있었다. 똥오줌의 문제가 아니라, 군대를 배경으로 해서는 절대 작품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조금 더 흐르면서 나는 그 삭막한 세월속에서도 소롤 피어나던 향수와 간은 것이 있어서 우선 놀라기는 했지만 두어 작품을 쓰고 말았다. 사실 그 향수란 군대 자체는 추호도 아닐 것이고 오직 내가 함부로 뿌려버린 젊은 날이며 그 날들속의 몇몇 삽화같이 언뜻언뜻 스쳐지는 풍경들일 것이다. 그 하나가 바로 『발굴』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따금 박윤(朴潤)이라는 친구와 그의 여동생 승희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럴 때마다 거의 폭발적으로 그들을 그리워한다. 소설속에서는 우윤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윤은, 광주 출생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이미 작고하셨던 그의 부친이 바로 전주사람이었고, 더더군다나 내가 졸업한 학교에서 오래 전에 근무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녀석은 나와 송천동의 군대에 한날 하시에 같이 입대를 했던 것이며 어쩌면 거의 병적으로까지 나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녀석은 틈만 나면 자기 여동생을 자랑하기도 했다. 자신만만한 녀석은 동생에 대해서 궁금한 것은 무엇이나 물어보라고 자신있게 말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내가, 글씨는? 하고 물어보면 녀석은 직접 제 동생의 편지를 보여주기도 했고 문장은? 하고 물을라치면 아예 그 편지들을 내게 며칠씩 맡겨두기도 했다. 내가 주저하면서 얼굴에 대해 묻자 녀석은 자신있게 제 가족사진을 꺼내어서는 찬찬히 뜯어보도록 하기도 했다. 그런데 녀석은 내게 항의하기도 했다 왜, 단 한번도 자기 동생을 소개시며달라고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녀석은 순전히 나를 위해서 자기 가족들을 면회오도록 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그 눈부신 날의,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서있던 승희를 기억하낟. 그러나 나는 그날, 녀석이 내 멱살을 잡아끌고 자기 가족앞으로 데리고 가려던 걸 끝내 거부하고는 화생방 교육장 근처를 맴돌았다. 녀석은 실제로 당황했고 싸가지없는 애새끼라고 나를 욕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곧 다시 친해졌으며 전반기 교육을 마치고 제각기 자대배치를 받아 떠나고 말았다. 그러면서 녀석이 아주 효과있는 제안을 했는데, 승희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 주소를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랬다. 그리고 그걸 빌미로 나는 그 우울한 3년동안 내내 승희와 편지들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남의 편지를 훔쳐보기 좋아하는 군대의 속성 그대로, 어느 해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 경연대회가 열렸을 때 나는 그애가 보내준 카드 한 장으로 포상휴가를 얻기까지 했다. 완전한 여성? 그래서 내가 그런 표현에 마주치면 지금도 승희를 생각하게 되는 것인지…. 우리는 79년 7월에 군대를 제대했다. 내가 다시 윤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는 광주로 돌아갔을 것이다.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꼭 10개월 전의 상황이었다. 나는 물론 승희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몹쓸 살육의 광풍이 광주에 몰아닥친 것이다. 나는 6년의 방황 끝에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해 있을 때였다. 나는 그들이 무사하기를 빌고 또 빌어었다. 자료에 의하면 시민군중에서도 군대를 막 제대한 예비군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져 보였다고 한다. 나는 몹쓸 놈이다. 찬으로 내가 왜 그랬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내 자신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나 자신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나는 그 뒤로도 3년의 세월이 더 흐른 다음에야 내가 그때도 기억하고 있는 광주시 학동의 그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던가? 그들은 몇 번 이사를 거듭한 끝에 81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광주에서는 암매장된 시체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바람에 사람들이 땅을 파기를 주저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 식구들 전부가 이민을 갔을까? 누군가를 잃어버린채 찾지 못하고 남은 식구들만 떠난 것일까? 나는 그래서 실제로 미국의 한인회에 그들을 찾아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찾을 수 없다는 간단한 연락만을 받았던 것이다. 소설 『발굴』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위의 얘기는 하나도 틀림이 없는 사실들이다. 나는 다만 작품을 쓰면서 얘기의 화자가 그 십년 뒤 대학교수, 그것도 고고학과 교수가 돼서 우윤을 찾게 되는 과정을 담았을 뿐이다. 「발굴」이라는 제목이 그래서 나왔고 , 그래야 그 무렵 암매장됐던 시체들과 화자, 그리고 어쩌면 죽었는데도 이민으로 처리됐을 가성의 우윤 식구들과도 연관성이 있게 된다. 『발굴』은 지난 90년에 발표된 것으로 미 오래됐다. 그러나 내 의혹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순박한 영혼이었던 박윤과 승희를 찾는 내 개인적인 작업도 어쩌면 평생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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