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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 | [문화가 정보]
가세발 공소를 찾아서
최 진 성․남원여고 교사(2004-02-03 10:44:46)
이번 호에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 있는 가세발 공소를 찾아 보았다. 가세발 공소는 전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진산면까지 가는 직행버스로 약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17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봉동읍, 고산면, 운주면 및 대둔산 정류소에서 잠시 쉬었다 갈 때마다 제법 많은 손님들이 타고 내린다. 노령산맥 주변의 산지에서 생산되는 봉동의 생강, 고산의 곶감, 운주의 대추와 인삼 등이 유명하여 소비지로 많이 반출되기 때문이란다. 남한의 금강이라 불리는 대두산을 뒤로 하고 충남과의 경계인 해발고도 약 300m의 고개를 넘으니 종전까지 드문드문 보이던 인삼밭이 이제는 많이 눈이 뜨인다. 진산면 면소재지에서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왔던 길로 조금 되돌아가서 우회전하면 논산군과 연결되는 지방도가 나온다. 이를 따라 약 20분 정도 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에서 우회전하면 목적지인 지방리 가세발에 도착한다. 새로 포장된 길이라서 전처럼 먼지를 뒤집어 쓰지 않아도 되었다. 금산군은 1963년에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었는데 이 글의 시점은 주로 그 전이므로 전라북도에 속한 지역으로 삼았다. 이런 배경에서 이해되는 진산면은 전라도(1894년 이전에는 전라북도와 전라남도가 분리되기전이었음) 뿐 아니라 우리 나라 교회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전라도에 천주교가 전파되었던 발원지(origin)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진산면에 살았던 윤지충(尹持忠)이 천주교에 처음 접하여 입교한 때가 1784년 경이면, 윤지충과 함께 전라도 초기 전파자였던 전주의 유항검(柳恒儉) 등은 친인척의 양반은 물론이고 중인과 양민 그리고 노비들에게 개별적인 접촉을 통한 전염전파(con-tagious diffusion)의 방법으로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다가 1791년에 일어난 진산사건 때문에 윤지충이 먼저 순교하였는데, 진산사건은 윤지충이 조상 위패(位牌)를 없애버림으로써 일어났던 전라도 최초의 박해였으며, 동생인 윤지헌이 운주면 저구리로 피신해 살며 교우촌을 형성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 이후 연속된 박해, 즉 신유박해(1801년) 등이 있었고, 특히 기해박해 때는 가세발 바로 옆 마을인 진밭들에서 붙잡힌 신자들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이 때에는 이미 진산면에 여러개의 교우촌들이 형성되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김대건 신부와 같이 사제가 되었으나 더욱 오랫동안 전라도와 충청도 및 경상도 등을 돌며 활동한 최양업 신부가 1856년 경 진밭들에 들렀던 기록이 보인다는 점에서도 확실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형성된 교우촌들 가운데 파악된 것으로는 가세발을 포함하여 막현지(막깁이), 오항동(오항골) 및 남이면의 개직이(개직골) 등이다. 지금까지 가세발을 중심으로 진산면 일대의 교우촌들의 형성 과정에 대해 알아 보았다. 필자의 분류에 의하면 가세발 공소는 이용되는 건물이 마을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외부형’이고, 지형분류에 의하면 금강 최상류에 분포하는 ‘산지 입지형’이다. 그리고 교우촌 형성 전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종교 경관인 교우촌, 공소 및 성당을 건축하기 전에 전라도 천주교의 전파 발원지였기 때문에 이렇게 분류하였다. 몇 년 전부터 가세발 공소를 포함한 주변 마을들 대부분의 논과 밭 그리고 산들이 대전을 포함한 외지인들에게 팔리고 있다고 한다. 일부 부유층들의 전원생활을 위한 별장과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서란다. 그래서 대전으로 이사간 신자들이 많다고 한다. 또 하나의 공소가 오늘도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을 보니 씁쓸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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