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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 | [문화칼럼]
여성의 생애사를 통해 본 가부장적 담론의 효과
김진명․전북대 교수․인류학 (2004-02-03 10:48:40)
생애사에는 한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이 표현되는데,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지배적 권력’에 의해 억압되었던 소외도니 사람들이 자신의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노년층의 여성들이 지나온 삶을 자신의 말로 엮어내는 과정에서 나타내는 자신 또는 타인드르이 삶에 대한 해석과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표출하는 불평과 몸짓, 억양, 웃음, 울음 등을 통해서, 權力과 연합한 담론에 의해 女性들의 주관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생애사는 자료로서의 가치 외에도 지나온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속한 생활세계를 구성하는 문화적 공리(公理)를 끌어낼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보로 수 있다. 그런데 생애사 수집과정에서 연구자의 편견과 선험적 이해가 이야기를 유도하거나, 수집된 자료의 편집과 해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읻. 그러나 조사대상자와 같은 시대, 같은 민족에 속하는 女性이 또 다른 女性의 생애를 듣는 방법은 개인적 편견 및 취향에 따른다기보다는 전통이라 불릴 수 있는 이해와 상호기반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피조사자의 내면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고 생각된다. 사례1 : 이갑순 할머니(78․가명)는 22세에 딸 하나를 낳고 혼자가 되어 이제까지 55년간을 수절하면서 살아왔다. 황가 나거나 외로울 때마다 남편 산소를 다녀서 ‘산소로 향하는 길이 반들반들 닳았으며, 과부로 수절하여 살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남편 산소로 찾아가 무덤 밑의 풀을 쥐어 뜯어서 지금도 무덤의 윗부분에만 풀이 있다’고 한다. 그녀는 시어머니와 외딸과 함RP 셋이서 항상 한 반에서 생활하고 잤으며,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서 밤새 논에 가서 물을 퍼부어서 가뭄 때도 할머니댁의 벼만 잘 자라서 자기네만 쌀을 먹었던 적도 있다. 이 할머니는 “내가 이렇게 외로운 인생을 살았어도 사람같이 살았기 때문에 친정에 가서도 시댁에 가서도 대우받고 산다”고 한다. 이 할머니의 손녀딸(28)조차 시집가서 대우받고 남편한테 큰소리친다. 손녀딸의 시댁에서는 이 할머니의 수절을 높이 평가하여 훌륭한 집에서 며느리 얻어왔다고 자랑스러워 한다. 할머니는 죽게 되면 집안 사람들이 ‘비석과 열녀문을 세워 줄것’이므로 그것이 수절해 온 보람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자신이 죽은 뒤 3년간 딸이 제사지내준 뒤에는 산지기가 시사 지내주기로 되어 있는데, 그것 또한 자신이 재혼(再婚)했으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떠돌이 귀신이 되었을 뻔 했는데 시사까지받을 수 있으니 영광이라고 했다. 이 할머니가 자주 후렴식으로 되풀이하는 말은 “내가 이렇게 외롭게 살아왔소, 사람같이 살아왔소”이다. 이 할머니가 젊었을 때는 동네 사람들이 예뻐서 혼자 못살 것이라고 예상했었다고 한다. 반면 이 할머니는 특별히 대우받고 살고 dLTdj서 집안 사람들이 먼곳에 다녀오면 특별히 담배 한 질씩 사다준다. “아마 자신이 불쌍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한다. 이 할머니는 지금 세상은 “망할 놈의 세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산 남편 두고 시집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례2 : 박순녀 할머니(85세․가명)의 남편은 면서기를 했고 자신은 농사도 짓고 보따리 장사도 하면서 아들과 딸(현재 60세)을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첫 딸을 낳고 나서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녀 스스로가 남편에게 과부를 소개시켜 아들을 낳았다. 현재 전문직에 종사하여 가끔 이 마을을 찾아오는 60세의 딸은,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아들을 낳지 못해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 자신을 아버지랑 같이 묶어 놓고 무당의 굿을 하면서 때리기도 하였다고 말한다. 지금도 그녀는 그 생각을 하면 무섭고 갑자기 정신이 들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자 첩이 낳은 아들과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평생을 통하여 친딸네 집은 가본 적이 거의 없고 아들에게는 “시집간 누나가 무슨 상관이냐, 네가 제일이다”라고 말한다. 친딸에게는 “네집에 가서 돈 달라고 하거나 투정부리면서 같이 살 마음이 절대로 없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첩이 낳은 아들에 대해서 “배만 빌려 낳았지 마음속으로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녀의 딸은 자신의 어머니를 “대를 못이어주는 여자는 죄인이므로 종자를 퍼뜨리게 하지 위하여 남편에게 여러 여자를 소개시켜 주어 남편 사망 이전에 임무를 완수한 아량있는 여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다른 동네 여성들도 남편이 ‘첩 얻는 꼴을 못보는 ’사람을 ‘못된 여자’ 또는 ‘개인주의적’이라고 평가하였다. 실제 이 마을 여성들은 이 동리를 떠난 딸만 낳은 할머니(80세)의 사례를 자주 등장시키면서 ‘집안 망친’여자라고 평하고 있었다. 사례3 : 일성 할머니(68세․가명)는 남편이 6․25사변시에 납치된 후, 40여년을 수절하면서 시부모를 옛날 종이 상전 모시듯이 받들고 살아 온 여성이다. 그녀의 외아들은 20대 때 사망하였고 시동생의 부인이 남매를 남겨 놓고 죽자 시부모를 받듦과 동시에 이 남매들을 친자식처럼 교육시켰다. 또 죽은 아들의 유복녀인 손녀를 혼자 키우고 있다. 매우 빈한한 그녀에게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파출부로 취직하라고 권하자 “절대로 식모 노릇은 안한다. 또 아이들 놔두고 어딜 가느냐”고 오히려 호통을 쳤다. 그녀의 이러한 자부심은 이웃의 첩으로 시집온 여자와 사회적 교류는 물론 마주쳐도 말도 거의 안하고 기피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즉 그녀 자신도 스스로 정조를 지키고 사는 ‘장한 여자’로 인정하고 있음이 이 마을에 ‘되깎이’(기혼녀인데 댕기머리를 땋고 미혼인 것처럼 위장한 여자)로 시집온 여자와도 접촉을 꺼리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실제 마을에서 가장 빈한한 그녀이지만 마을 사람 누구도 그녀를 박대하지 않았다. 위의 사례 1,2,3이 청상과부로 ‘정절’을 실천해 간 여성의 사례라면 다음의 경우는 ‘정절’의 기준에 의해 여성을 평가하는 사례이다. 사례4 : 김갑중(67세․남․가명) : 씨는 젊은 시절에 너무 가난해서 부인과 딸을 남겨 놓고 일본으로 돈벌이 하러 갔다. 해방 이후에 귀국해 보니 부인은 사망하고 난 뒤였다. 그는 다시 처녀와 재혼을 하였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여 점을 치니 큰 마누라 대접을 잘 못한 탓이라는 괘가 나와 본처의 묘를 이장하였다. 무덤을 파헤쳐 보니 그녀의 시신은 ‘청춘에 죽어서 원귀가 된다’고 하며 동네사람들이 팔뚝에 쇠사슬을 묶어 엎어서 높은 채로 였는데 그녀의 남편이 쇠사슬을 풀면서 “너와 내가 고생 많이 했는데 누가 쇠사슬을 감아 줬는가, 한을 풀고 딴 데로 가거라”고 하면서 울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아이를 못 낳자 땅 7마지기를 처녀에게 주고 세 번째 혼인을 하였다. 그리고 또 불임으로 판명되자 다시 첩을 얻게 되어 3명의 여성과 함께 살았다. 세 여성이 싸우면 남편이 가죽혁대로 때려서 그 집의 ‘가죽혁대’는 인근마을까지 알려져있다. 이렇게 지내다 재혼한 첫 번째 부인이 40세 가까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남자는 일본에서 이상한 병이 든 사람으로서 남자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또 그 부인이 시내에서 어떤 남자와 숙소에 들어가면서 마을 사람에게 “이번 한 번만 들어간다”고 말하고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소문이 나자 남편이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 6개월간 찾아 다녔는데 제일 처음 이야기한 사람이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사라져 버렸다. 남편은 소문을 낸 사람이 도망간 것을 보니 ‘그릇된 낭설’이라고 일축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누구도 이 남자의 말을 믿지 않고 있었지만, 그냥 인정해 주고 있었다. 사례5 : 이순녀씨(75세․여․가면)는 한문을 잘 익힌 양가집의 규슈였지만, 그녀의 사주팔자가 시집가면 남편이 죽을 팔자라고 해서 친정 아버지가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후처로 임순필씨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녀는 전실 아들이 낳은 손자를 7세 때까지는 귀여워하다가 8세가 되면서 미워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아이가 8세가 넘으면서 자기가 누구(계모할머니)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손자가 고등학생일 때 한밤중에도 전기불이 켜진 상태에서 할머니에게 매를 맞다가 뛰쳐나가곤 해서 밤이 되면 사람들이 구경할 정도였다. 그녀는 시집와서 딸만 셋을 낳았기 때문에 전처 소생의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당시 아들은 사업한다고 서울에 가있는 상태여서 그녀는 전실 며느리와 손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임순필씨는 30년 전에 군수를 지낸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마을 내에서 부유한 편이었다. 이순녀씨는 남편 사망 후에 남겨진 논들을 전실 아들에게 주기를 꺼려해 고의적으로 재산을 탕진했다. 심지어 부잣집 살림의 상징인 무수한 장독조차 자신이 죽은 뒤에 전실 아들 집에 남는 것이 싫어서 서울 딸네 집에 오르내리면서 된장, 고추장, 장아찌 등 담가간다고 가져가서 집에는 장롱과 쌀 뒤주만 남겨 놓고 말았다. 그녀가 시집올 때 가져온 장롱도 전실 며느리에게 물려주지 않고 그녀의 시중을 들던 처녀가 시집을 가게 되자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물려 주었다. 그녀는 장롱을 전실 며느리가 중요시하지 않게 될 것이므로 그렇게 처리했다고 한다. 집안에 재물이 넉넉한 20년 전만해도 따링 방문하면 왕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시중드는 사람이 세숫물을 방안에까지 떠다 바치는 등의 환대를 하였으며 방에는 서울에 가서 살고 있는 딸들이 어린 시절에 그렸던 그림을 ‘8세작, 9세작’ 등과 같이 표제를 붙여서 벽 전면에 펼쳐놓고 있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재산을 타진한 계모에 대하여 며느리는 ‘꼼짝 못하고’ 받들었는데 이는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또는 “법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지나치게 공손하므로 마을 사람들도 그 영향을 받아 모두 그녀에게 극도로 공손하게 대접하였다. 그녀 스스로도 ‘어른’으로서 행세하고 있어서 말할 때도 큰 기침을 곁들여서 했다. 이렇게 지내던 그녀가 서울에서 사망했다는 전갈이 오자, 전실 며느리는 마당에 멍석을 펴고 머리를 풀고 정화수를 놓고 “어머니! 어머니!”를 부르며 슬피 울었다. 실제 그 며느리는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자신의 자녀들을 미워한 시어머니를 싫어했는데도, 외면적으로는 자기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녀의 사망시 구슬피 울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남들에게 욕을 먹기 때문이다. 그녀의 전실 딸조차 평소에 계모를 방문해서 어미니 안부가 궁금해 친정에 왔노라고 하면서 큰 절을 하는 등 그녀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시했다. 그녀가 이와 같은 사회적 위세를 누린 이유는 ‘양가(良家)에서 처녀’로 시집온 여자이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그녀 또한 생시에 자신이 ‘양가에서 온 처녀’임을 자주 화제에 올렸고, 또 이로 인해 그녀의 인품과 관계없이 사회의 공식적 구성원으로 인정됨과 아울러 사회적 위세를 누렸던 것이다. 위의 사례들에서 ‘일부종사’하는 여성들과 달리 남성들은 필요에 따라 재혼, 삼혼 또는 축첩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이들은 재혼을 하는 경우에 여성이 혼인경험이 있느냐에 따라 ‘헌 여자’ 또는 ‘새 여자’로 구분하며 ‘새 여자’의 경우라도 신분에 따라 사회적 차별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규범에 입각한 동일한 원칙이라도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주변적 위치에 있는 그대로 담론으로 작용되나, 중심적 위치에 있는 남성과 여성은 이와 무관하다. 이는 농촌의 60代 이상의 여성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40대 여성들은 이와는 반대로 사회적 위치와 무관하게 ‘再婚’한 여성들을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기존이념에 대한 해석상의 변화는 사회, 문화적 변화와 더불어 가속화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농촌에서는 농업이 주요 생계기반이기는 하지만, 농업행위가 비하되고 있고, 경제, 문화, 교육 등 제반사항에 걸친 도시에의 의존성이 심화됨으로써, 이제까지 마을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해 왔던 전통적 담론의 효과가 약화되고 있다. 이것은 다양한 양상으로 표출되어, 과거에는 시댁의 억압적 상황에 견딜 수 없어 자살을 택했던 여성들이 최근에는 ‘재가(再嫁)’를 하거나 경제적 독립을 시도하기도 하고 여성들 상호간에도 ‘얌전한’여성보다는 ‘돈을 잘 버는’ 여자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데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부장적 체제에 대한 저항적 진술의 출현도 중요하지만 이런 형태의 진술이 다른 진술들과 연결되어 어떠한 양식으로 작용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20, 30년 전에는 남편과 시모의 학대로 죽음을 맞이한 여성이 있는 반면, 최근에는 경제활동을 하게된 젊은 여성이 시모를 ‘재수없다’고 하며 시모가 사망하리라 믿고 수의를 만들어 놓았는데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에서 새로운 권력자로 부상한, 전통시대에 피억압자에 해당되던 며느리가 약자인 연장자를 억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평범한 가족관계에서 과거 현재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은 가족구성원간에도 권력(權力)을 행사하는 자와 이의 지배를 받는 자로 구분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표면상 침묵하거나 온화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남편 또는 시모가,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하위자였던 여성의 경제적 활동에 의존하며 심리적 좌절을 겪다가, 경제권을 획득하면 또 다시 군림하게 되는 예세서 권력지향적 인간의 면모를 확인해 낼 수 있다. 단지 현재에 와서 변화된 것이 있다면 과거의 토지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 경제행위와 이에 입각한 지주 등의 지배층의 권력 및 이를 정당화하는 가부장적 담론이 새로운 방식의 경제적 이익추구 행위와 함께 또 다른 방식의 저항적 진술들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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