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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2 | [한상봉의 시골살이]
들판 위에 쓰는 겨울 편지
김유석 / 시인 (2004-02-03 11:17:39)
바람을 맞으러 하루 들판ㅇ르 갑니다. 녹았다가 얼고, 얼었다간 다시 녹는 땅의 진물에 마치 어디로든 데려다 달라는 듯이 한사코 발바닥을 놔주지 않는 부석부석한 길으 까지발로 찍거나 길섶의 풀포기를 겅중거중 밟아갑니다. 돌멩이나 풀뿌리보다 무겁고 단단하게 박혀있는 바퀴자국엔 따그랭이처럼 끼어있는 살얼음, 밟으면 눈매 서늘한 짐승의 가쁜 숨소리가 드려우는 그 위에 햇살은 멍에형상으로 얹혀있고 누군가의 마음을 몹시도 언잖게했을 몇 줌의 나락이 산문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들판, 기워도 기워도 다시 새는 우리들의 자루. 작년엔 유난히 참새들도 많아 여름내내 살아있는 허재비가 되어 한숨처럼 긴 들길을 내달리던 어머니는 이삭 한모가지에도 발이 걸려 넘어지곤 하였지. 어거리 풍년인 걸요 어머니, 매번 그렇지만 그래도 이삭 몇 모가지쯤은 기러기 몫으로 남겨두어야지요 아니란다 얘야, 아까운 것은 기러기가 아니란다 참말로 아까운 것은․․․․․․ 아무리 도두보려고 애를 써도 마음 밖의 풍경만을 쓸쓸하게 몰고가는 이 들판, 낮게부는 바람 뿐이지만 군데군데 살처럼 돋은 보리밭이 놓여있는걸 보니 아직은 사람이 살고있나 봅니다. 잔기침 몇 개로 살아있는 사람흉내를 내며 논두렁을 꺽어지면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논둑풀들이 바람에 머리채를 잡혀 일어섭니다. 그토록 서슬퍼런 낫을 맞고 독한 제초제에 뼈가 문드러지곤 하였건만 악착같이 다시 일어서는 귀찮은 저것들은 농투사니들과 땅의 근성으로 닮아있습니다. 온 몸으로 땅의 힘줄을 끌어올리다 이제는 뿌리의 힘 하나로 땅을 붙잡고 삼동을 나는 풀꽃들, 날카로운 삭풍의 톱날도 허리를 분지르지 못하고 즈려밟으면 아직도 땡볕과 가을날의 잘익은 노을을 머금던 파란 피톨들이 말간 불씨로 변하여 엽맥마다 고여있는 까닭입니다. 그것을 꺼내어 불길을 긋고 파충류들처럼 낼름거리며 불의 혓바닥에 감기웁니다. 내뿜는 땅의 열기를 온몸 가득 빨아들이면 날아오르는 불티 속에서 오뉴월밤, 재잘거리던 개구리 울음소리, 뙤약볕을 말아태우며 풀깍던 노인의 낫가는 소리, 꽝꽝한 얼음장 밑으로 한겨울에도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바람의 외투자락에 감추어진 검은 혓자국 위에 불씨처럼 뿌리만 남겨놓고 빈 것을 비워가는 아름다운 춤, 참을 수 있는건 목마름이 아니라고 견딜 수 있는건 추위가 아니라고 징소리처럼 일렁거리는 불두렁들, 땅 위에 세운 그림자들을 핥아먹으며 지평선까지 아슴히 달려가 하늘로 옮겨붙어 노을이 되기도 하고 뿌리 밑으로 흘러 아지랑이로 고이기도 하는 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에게도 그으면 타는 그 무엇이 있으리라 중얼거리며 불을 먹지만, 암만 살을 비워도 불은 붙지않고 재가 되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화상을 입을 따름입니다. 아, 뜨거운 갈증 뿐인 이 목숨 등뼈 시린 강마을 속으로 흘러갑니다. 강물보다는 세우러이 더 많이 흘러간 소리죽은 가응로 뒷짐을 진 채 덧없는 겨울잠을 물고있는 마을,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즈런즈런해뵈던 삼십여가호의 마을은 어느덧 새뜬 아홉채로 뎅그마니 흩어져있고 그 중 두채는 짐짝처럼 버려진지 이미 오랬습니다. 주춧돌이 놓였던 자링네 뽑지않은 고춧대만 을씨년스럽게 나래비서서 겨울에도 얼지 않는 강을 건너지 못함은 넓이보다는 깊이, 깊이보다는 물소리 때문이라고 남은자들의 칭얼거리는 잠을 다독거려주는 마을에, 건너지 못하는 이세상 물소리들에 목마름을 벗어두고 돌아와 어둠보다 먼저 등을 켭니다. 들 밖으로 창을 가진 나의 방, 어둠 속으로 두런두런 들려오는 기러기 소리에 묻혀 이겨울 뭐하느냐고 누가 물어준다면 절반은 죽고 절반은 살아, 삶이 죽음에게 죽음이 삶에게 쓰는 몇 통의 연애편지를 훔쳐읽고 있다고, 그 가운데 몇 구절을 표절하여 한 통의 편지를 쓴다고 눈은 오지 않기만 눈이 내린다고 적고싶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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