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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3 | [문화가 정보]
지리산 청학동 신화적 그리움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땅
이 병 훈 / 시인. 군산문화원장 (2004-02-03 14:03:50)
1월 16일과 17일 이틀간으로 예정된 청학동기행 일행은 70명. 예정된 버스 한대로는 일부서서가기도 어려워졌다. 당황한 주최측은 "봉고"한대 자가용 한대에 나누어 태욱 가까스로 출발했다. 문화저널의 백제기행은 그 깊은 뜻이야 다는 모르지만 "있었던 문화" "있는 것"을 그 현장에서 확인하고 자기의식 속에서도 찾아내어 스스로 "있는 존재"로 서려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지리산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慶南 河東郡 靑岩面 黙溪里) 해발 830미터 높이 산중이다. 남원을 벗어나 섬진강의 흐름을 따라 차는 달렸다. 며칠전에 내린 눈을 뒤집어 쓴 산들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 골짜기로 흐르는 섬진강 물은 맑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각기 뚜렸다 제 모습이다. 지리산의 물을 한몸으로 받아 흐르는 것 같이 줄기차고 유연한섬진강은 그날 따라 선명하게 내려 쪼이는 햇빛과 더불어 반짝였다. 눈이 부셨다. 장터로 이름난 화개를 거쳐 하동멀리 멀리 포구를 뒤로 여기서부터 창학동 산길로 들어섰다. "보러가는 것 만나러 가는 것 얻으러 가는 것 찾으러 가는 것" 그 모두가 포함된 기행이라 더욱 설레인다. 좁은 길 더러 비포장길 차는 매우 휘청거렸고 맞은편에서 오는 차를 비켜가며 겨우 빠져나갔다. 길 양편 산기슭은 대숲으로 이어졌다.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활을 위해 심어 가꾼 것이라 한다. 도중 이날 강사로 초대한 박완식(한학자)씨의 청학동에 대한 설명이었다. "청학동은 푸른 학의 개념이고 새는 도교적(道敎的) 상징이라 한다." 그 설명을 듣고 청학동 사람들의 선비적 생활이 떠올랐다. 그리고 분별없이 수용하고 타협하는 지식인의 허약한 점을 은근히 지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차가 멈춘 곳 청학객사(客舍)앞 주차장 이미 관광지화된 것이 얼떨떨했다. 이 객사에서 행사도 벌이고 잠을 자기로 정해져 있었다. 언제나 강의 시간은 중요하지만 그날 따라 그시간은 초만원 이었다. 먼저 그 마을 그러니까 묵계리 장 김상수씨의 시간이었다. 그는 청학동에 대한 풍수지리에 나타난 의미를 주제로 말했다. 풍수지리(風水地理)로 보는 청학동의 고전은 지리산 청학동도(靑鶴洞圖)이다. 이것은 지리산 벽수령(碧嶺樹)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김씨는 이지도에 나타난 풍수지리의 형국을 날개 또는 불꽃이라 비유했다. 그리고 학이라 했다. 그 형국이 학이면 산에는 푸른것 뿐이니 청학이 아니겠는가 했다. 마치 추상화를 보는것 같은 그지도는 말 그대로 타오르는 불꽃이요, 날으는 날개의 형상 같았다. 그 깊고 좌우로 산들이 높게 낮게 에워싼 그 한가운에닥 청학동의 본거지. 앞은 열려 있다. 열려있는 저 및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제각기 있을 자리에 있고 할일은 다하는 자연의 원만한 순환의 지역 재앙이란 아예 덤벼들 것 같지 않은 마을이다. 그래서 이상의 마을이라 하는 지도 모른다. "청학동은 꿈의 땅 즉 이상(理想의 땅이고 운이 돌아 오면 큰 사람이 난다 했다." 큰사람 과연 큰사람이란 좋은 사람이치에 밝고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 이성이 열린 사람 그렇게 정신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 이해 했다. 요새 흔히 말하는 권력을 잡는다거나 돈을 많이 번다던가 하고 큰소리 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했다. "그리고 삼재(三災)가 없는 곳이라" 했다. 오늘의 삼재는 사람 스스로 삼재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피해를 겁내는 현실이다. 그것이 물질문명이다. 극도로 발달된 오늘 사람들은 그것을 자랑하고 과시하며 잘난체 하고 있지만 그 실상은 그로인해 사람 스스로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골병이 들거나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무기가 아니더라도 편리하다고 쓰는 약제나 생활필수품 음식으로 인해 골병들어가고 있다. 공포 분위기다. 모든 생활도구 음식물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이 막다른 실정 그것이 어데서 온 것인가를 적시해 주는 것 같다. 꿈의 세상을 "실상이 아니라"하고 강력히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서 그 꿈의 해석이나 지향하는 바오 갈길의 잘못된 선택때문에 지금 사람은 자기가 만든 무기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다량 살육이다. 피해가기도 힘들다. 그 무기의 위력의 반경이 워낙 넓어서 피해가 봤자다. 싸워야 할 이유도 모르고 싸워야할 대상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어데서 날라온 것인지도 모르는 폭탕에 의해 죽어간 사람 자칫 그런 어처구니 없는 죽음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청학동이꿈의 땅이라는 것이라던가 피난처라던가 하는 말은 이런 현실의 반영으로도 이해가 이해가 된다. 이어 청학동 서당 훈장 이정석씨의 강의다. 그는 대뜸 청학동이 임란(任亂)때 유불선합일갱정유도(儒佛仙合一更定儒道)란 이름의 유도(儒道)의 땅이다. 그러면서도 단군(檀君)으 ㅣ건국신화를 으뜸으로 하고있다. 단군신화는 우리의 신화인 것이다. 그는 그점을 강조했다. 그 목소리는 매우 힘차고 자신만만했으며 줄기찼다. 그는 "정신문화를 강조했다. 지금은 너무나 물질문화가 팽배해 있으므로 사람 그 자체가 물질이 돼가고있다"고 개탄했다. "우리가 지향할 일은 인간시대요 우리가 이루어야할 것은 인간시대의 세상이라"고 주장했다. "사람은 겉 그 자체보다 내용을 중시해야 살아 남는다"고 설파했다. 청학동에서 사는 이자체는 어지러운 현실속에서도 정신은 살아있다는 하나의 실증으로 존재하려 하는 것이라 말했다. 그는 "뿌리의 정립을 내걸었다. 제각기- 뿌리가 있는 것이고 뿌리가 건전해야 싱싱한 가지와 잎을 갖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비로소 꽃피고열매를 맺고 영그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속에 거의 질병처럼 만연하고있는 외세 문화 외세의좀 의식을 개탄했다.이대로 가다가는 자기살성 핏줄의 감동적 정마저 스스로 회석 시키고 자기문화를 스스로 비하(婢下)하여 우리 스스로가 결국은 형편없이.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 것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던져주었다. 그는 이를 바로잡을 방향을 제시했다. 우리의 뿌리는 [단군]이라고 전제하고 "그 건국의 슬기를 줄기차게 번영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어느나라든 건국신화는 있다. 그리고 그 신화적 정서가 필요한 것이다. 신화가 없는 나라 그자체가 비문화적인 나라이자 그를 믿지 않는 백성은 비문화적 민족일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크나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본다. 건국시화를 믿지않으려는 잘못이다 어느때부터인가 외세를 끌어들이고 외세에 의해 외세의 연호를 쓰고 그 복식으로 살아오면서 부터 잘못 들어선 길이 아닌가 한다. 이씨는 "우리에게 있었던 풍부한 신과, 그리고 이야기, 풍수지리, 유불선의 문화, 생활윤리 등이 왜 업신여김을 당하고 스스로 그것을 비하려"는 잘못을 지적했다. "너무나 바깥힘에 의존하고 우리 나라의 생활을 닦아 견고하게 세워내리지 못했지 때문이라"고 강조 했다. 밤은 어지간히 깊어졌다. 그러나 밤이 깊어진 것을 누구 하나 걱정스러워 하지 않았다. 훈장 이씨는 서구 문화와 우리 문화의 장단점을 하나 하나 들어가면서 말했다. 그들의 육식성문화에 대조되는 우리의 초식성 문화를 비교해 설명하기도 했다. 육식성문화 그것은 해부학적이고 총칼로 이룬 문화 또는 기계로 일관한 문화인데에 반하여 초식성문화는 정서의 문화 마음과 글의 문화라 했다. 청학동은 초식성 문화를 주장하고 그렇게 살고 있었다. 밤이 새는 한이 있어도 말을 끝내지 않을 것 같이 그는 쏟아 놓았다. 명절때 찾고자 하는 고향에 돌아갈때 보다 훨씬 진한 그 무엇인가에 이끌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새삼 자기의 모습 지난날의 자기 의 모습 그보다 훨씬 이전 자기의 선대, 그리고 그 선대의 모습을 챙겨보는 것 같았다. 자기안에서자라나는 풀이며 나무 바람과 흙냄새가 나는 것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새삼나는 스스로 외로운 절벽의 소나무로서 있었다. 아찔함 마저 느꼈다. 조재수씨의 대금(大琴)연주가 시작되었따. 자리는 그대로다. 그산속에서의 대금소리 그 울림을 어찌 글로 옮길 수 있을까. 맑은 소리가 그거 물방울이 되어 구르는 것 같았다. 이만치 맑으면 더 바랄게 있을까 감동하지 않은 자가 있을까. 그대로 산메아리가 녹아 흐르는것 같았다. 저 섬진강 물빛이 되어 다시 눈이 부시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술을 앞에 놓고 토론의 자리를 마련했다. 토론으로 따지고 가리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열어놓고 소견을 주고 받자는 자리가 마련됐다. 객사에서 가장 큰 방이었지만 일부는 들어앉지도 못했다. 청학동 동동주맛에 곁드린 이 자리가 끝난것은 자정을 훨씬 넘은 다음날 새벽이었다.산마을의 밤은 고요하기만 했다. 17일 둘째날, 날씨가 유난히 맑았다. 해끝이 따뜻하고 포근했다. 청학동은 양달. 양달은 상생지(相生地)이다. 그러므로 살기가 좋고 좋은 사람이 나느 땅이라고 한다. 일행은 등산채비를 갖추었다. 산이 무색할 정도로 화려한 모습들이었다. 삼신봉(三神峯) 등반길 그리 가파르지 않지만 군데군데 남은 눈 그리고녹았다가 얼은 빙판, 어쨌든 산에는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임해야 헀다. 삼신봉 해발 1240미터 청학동에서는 왕복 세세간의 등반이면 충분했다. 정상에는 제단이 있다. 연에 한번 곡우(穀雨)때 천지대제(天地大第)를 지낸다. 이대제는 단군성조를 모시는 제례였다. 청학동에서는 가장 지엄하고 근엄한 행사로써 음식 하나 하나의 정갈함은 물론 마음다짐이 지극하다. 제복은 한복 또는 선복(仙服)이다. 이는 평화를 상징하는 옷차림이라 한다. 천기가 서린 것으로 믿는 이땅의 이 골 사람들로서는그보다 큰 일이없다. 제례를 통해 하늘과 단군성조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흐트러진 정신을 바로 잡는데에 그 본뜻을 두고 있었다. 정성이 지극한데에 어찌 천긴들 지나치겠는가 싶었따. 일행은 흐뭇한 표정들이었다. 환하게 피어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청학동을 돌아보았다. 옹기종기 모인 작은 집들 이색적이나 낯설지는 않았다 산대로 덮은 지붕 나무기둥 나무문 부엌 모두가 다른 산마을 집이나 같다. 글읽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따. 서당(書堂)은 어려서부터 글을 배우는 청학동 유일의 교육장이다. 학동은 13명 상급수준인 어른들 그리고는 학교에 가기전의 어린이들 방학때를 이용하는 대학생들이다. 어린이 들은 서당에서 배우다가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고 다시 서당으로 돌아와 배우기도 한다. 마을 맨 높은 곳에는 사당이 있다. 여기에는 세계 여러 성인들을 안치했다고 한다. 연에 두차례 제례를 올린다 한다. 청학동 사람들은 25가구에 모두 160명, 성인들은 스스로 도인(道人)이라 호칭하고 있었다. 신화적(神話的)그리움을 안고 사는 이들의 땅이 장차 참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살 때가 올지 곰곰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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