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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3 | [서평]
대중성을 위한 혼신의 노력과 그 가능성 사회평론(1993년 2월 재창간호)
지 역 사 회 연 구 모 임 (2004-02-03 14:06:00)
지난해 11월 통권 제 18호를 마지막으로 잠정적 휴간에 드러갔던 월간 “사회평론”이 올해 2월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간되었다. 이번 재창간호의 ‘새로움’은 가히 전면적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우선 책을 손에 쥐면서 우리는 확대된 판형(4.6배판)을 발견하게 되고, 김영삼 차기 대통령 당선자를 모델로 등장시켜 그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기묘하게 대비시킨 표지 디자인의 변화에 놀라게 된다. 디자인과 색조의 변화는 책 중의 칼라화보 곳곳에서 확인되는데, 예컨대 [경제대전의 빛과 그늘], [93 세계자본주의의 표정] 등이 자본의 화려한 꿈과 그에 짓눌리는 인간의 고통과 분노를 총천연색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또 책을 넘겨가다가 20세기 말 현제의 세계를 얼룩진 핏빛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섬뜩한 파격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다시 목차를 꼼꼼이 훑어보면 이전 보다 훨씬 다양해진 소재 상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뿐 아니라 상식 취미등, 그야말로 잡지(雜誌)로서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이 소재로 포관되고 있다. 응창기(應昌期)배 세계바둑 대회에서 서봉수의 선전이 기보와 함RP 친절하게 소개되고 있고 설날의 가족놀이를 소개하고 있으며 에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수필류의 글들이 여러편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서로 독립적으로 기획된 세 가지 특집(김영삼 차기 정권의 진로를 다룬 [개혁의 큰 길에는 문이 따로 없다], 한국경제의 현실을 다양하게 검토한 [전환기 한국사 회의 진단 1: 93 한국경제의 선택], 여성문제를 재미있게 다룬 [영상시대의 페미니즘]은 이전의 “사회평론”과는 매우 다른 외양을 지니고 있다. 그간 “사회평론”이 다루어 왔던 특집들은 대부분 맑스주의의 위기에 직면한 현실에서 대앉거 사상. 이론의 모색에 치중하고 있었던데 비해, 이번 재창간호에서의 특집들은 모두 현실적(이라기 보다는 대중적인?)주제들을 담고 있다. 또 창간호(91년 5월호)에서 장기표(당시 민주당 정책 위원장)의 인터뷰를 담았던 자리에 영화배우 이혜영이 대신 들어서 있는 점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이러한 형식상의 변화만으로도 재창간호의 ‘새로움’은 어느 정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전혀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용의 변화를 느끼면서부터 이다. 내용상의 변화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가능한 한 다양한 의견을 담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특집:개혁의 길에는 문이 따로 없다]에서는 차기 정권의 개혁 의지를 부각시킨 글 (김교준의 [‘6공’대통령의 신한국 설계도])과 김 당선자의 보수적인 ‘안정 속의 개혁’ 성향을 강조하느 글(오태규, [YS '개혁조깅‘의 걸림돌은?])을 함께 게재하고 있고, 또 다른 특집[전환기 한국사회의 집단1]에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진술의 [중앙관리경제를 시장경쟁질서로]에서부터 자본주의적 불평등성을 지적하는 윤진호의 [이젠 진정으로 ’분배와 평등‘을 고려해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의견을 포관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글의 내용이 짧아지고 평이해진 것을 함께 고려 한다면, 이러한 변화는 보다 대중에게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대중성을 위한 노력은 세 번째 특집 [영상시대의 페미니즘]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여성문제는 어쩌면 이번 재창간호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할 수 있는데 (특집 외에도 남성들이 파견을 다룬 글 2편과 페미니즘 연극을 다룬 글 1편, 그리고 마돈나와 미국 대통령 부인 힐라리를 비교한 글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영상매체를 통해 여성문제를 조명함으로써 대중적 재미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여기에서는 ’원초적 본능‘. ’그대안의 블루‘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들을 통해 여성문제에 접근하고 있으며, 마돈나의 누드집 “Sex"의 ’그나마 덜한 사람들‘까지 곁들여 줌으로써 대중과의 거리 좁히기에 힘을 쏟고있다.이처럼 가치 파격적이 변화 속에서 ”사회평론“ 재창간호가 에전의 이론지향적 성격을 그대로 담고 있는 글은 최장집 교수의 [92대선과 신정부의 성격]이 거의 유일하다고 여겨진다. 이미 알고 있듯이 월간 “사회평론”은 지난 91년 5월, 사회 주의권 몰락의 여파와 신보수주의의 물결이 우리 사회에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던 시점에서 창간되어썼다. 당시 [창간선언문]에서는 우리의 민족 민주운동이 운동의 ‘분산적 경향’과 ‘사상적 좌표의 동요’에서 비롯되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올바른 사상 이론적 좌표를 구축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을 제공”함으로써 모든 진보세력의 “‘전진을 위한 연대’, ‘연대를 위한 전진’”을 위하여 실천적으로 기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애초의 의지가 1년여만에 실패로 돌아간 뒤, 이번 재창간호에서는 재창간의 변을 통하여 남한사회가 “놀랄만한 경제성장을 거듭하여 중진국의” 대열에 진입했음을 인정하고, “건설한 시민사회의 형서없이는 그 어떠한 민주화도 확립될 수는 없다”는 인식하에서 “종래의 비판적 아카데미즘의 틀에서 폭을 넓혀 우리의 구체적삶의 부분부분”에 관심을 두겠다고 함으로써 보다 대주의 삶에 집중하겠다는 변화된 의지를 명시하고 있다. 요컨대 김중배 칼럼[다시 시작해야 한다]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가뜩이나 수척한 민족민주세력”에게 ‘준열한 뺄셈’은 제살 깍아먹기 이므로, ‘관대한 더셈’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이번 재창간호의 근본 취지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의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그 전만이 발기만 한 것은 아닌 듯하다. 무론 “사회평론”을 비롯한 진보언론의 전망이 불투명한 것은 아닌 듯 하다. 무론 “사회평론”을 비롯한 진보언론의 전망이 불투명한 것은 단지 진보언론 당사자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어쩌면 위기는 훨씬 더 깊은 곳에서, 진보언론이 기대하는 대중의 가슴속에서부터 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평론”재창간호에서 발견되는 대중성을 위한 혼신의 노력이 휴간이전 보다 훨씬 많은 독자 대중을 확보하는 데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지는 분명치 않다. 오히려 91년의 창간호보다는 훨씬 줄어든 광고 지면은 이번 재창간호가 다시 험난한 실험대에 올랐음만을 증명해 줄뿐이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세기말의 새로운 (=자본주의적) 어두움 속에서 ‘돌파의 의지’와 그를 위한 ‘살아남기’는 아직 그 타협점을 찾지 못한 것인가. (정리:이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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