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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3 | [파랑새를 찾아서]
수청리 공소를 찾아서
최 진 성 / 남원여고교사 (2004-02-03 14:14:01)
이번에는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위치한 수청리(水淸里) 공솔르 찾아보았다. 이 공소는 전주에서 대전까지 연결되는 17번 국도변에 위치해서 전주에서 대둔산행 완행 버슬르 타면 곧바로 닿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완행이 없어져서 봉동이나 고산까지느 시내벗를 이용하고, 그 이후는 관내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20여 가구 남짓 남아 잇는 조그만 동네이지만 되재성당의 관할이던 수청리 공소가 1942년에 성당으로 승격되었을 때만 하여도 꽤 큰 규모를 자랑하였다고 한다.1944년에는 되재 성당의 담당 신부가 전주에 있는 주교관으로 옮겨가자 되재는 오히려 수청리 성당에 속한 공소가 되었다. 그런데 1950년 6.25로 말미암아 수청리 성당이 파괴되면서 교우촌도 전부 불에 타 자연히 성당이 폐쇄되고 삼례 성당에 소속되었다가, 고산성당이 설립되자 고산 성당의 공소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사진 참고> 수청리 공소가 성당으로습격되었을 때는 운주면의 석장리, 빼재, 구제리, 백석, 안심, 운주,동향, 화산면의 돼재, 미남리, 우월리, 고산면의 소향리, 운문, 비봉면의 청호, 수곡리, 동상면의 한대동, 음수동 등 약 18개의 공소들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그림참고> 수청리 공소는 전라도 초기 전교의 중심지였던 되재 성당이 궁핍한 시골이라는 지리적 불리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공소라는 측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되재 → 수청리 →고산의 순서로 성당이 형성되고 있는데, 이는 화살표 방향으로 갈수록 도시로서의 기능이 큰 중심지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교의 자유를 인정한 1886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수청리에도 신자들이 살아왔겠지만 그 전부터 신자들이살았을 가능성이 많다. 3대에 걸쳐 석장리 공소회장을 지냈다는 박종순(65세)씨도 이에 동의 하신다. 특히 석장리는 1883년에 두쎄 신부가, 수청리는 1888년에 신부가 전교차 들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김진소, 1987, 천주교전주 교구사 연ㄱ자료집 제 1집, 지명조사보고서, 호남교회사연구소 참고) 지금까지 수청리 공소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필자의분류에 의하면 이 공소는 마을 주변의 높은 곳에 위치하여 성소(聖所)로서의 기능을 강조한 '외부형'이다. 지형분류에 의하면 운주로 넘어가는 말골재를 경계로 금강의 지류인 장선천(長仙川)과 만경강의 지류인 가천(佳川)의 분수개를 이루는 곳에 위치한 '산지 입지형'이다. 산지 입지형이라는 것은 산지, 산간분지 및 고원, 구릉지, 그리고 평지로 구분한 지형분류에서 이 공소가 만경강 최상류의 산지에 입지하고 있다느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교우촌 형성 시기별 구분에 의하면 '교우촌 및 공소 형성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교우촌 형성시기를 종교경관의 형성과정으로 보고 교우촌 형성 전기, 교우촌 및 공소 형성기, 교우촌 및 공소 형성기, 그리고 성당건축기로 나는바 있다. 이 수청리 공소 주변이 6.25때 퇴주하는 북한군들의 퇴각로로 이용되어 인근의 여러 교우촌들이 수청리 공소처럼 대부분 불타 버렸고, 몇몇은 부역을 위해 끌려가 생사를 모르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논과 밭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과거에는 담배, 대추, 곶감, 고추농사 등 계절에 따라 소득작물을 바꾸어 가며 생산하였고, 요즘에는 인삼을 대부분으 경작하고 있다고 한다. 산과 물이 맑아 인심도 좋다는 이곳을 뒤로 하고 다음에는 전라도 최초의 성당을 세웠던 되재 공소를 찾아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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