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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5 | [문화저널]
큰 그물과 작은 고기 경제계와 생태계의 비교
김태경/경인여자전문대 교수 (2004-02-03 15:17:35)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어디 쯤 일까?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구분 짓는 일이 환경문제를 다루는 쪽에서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로 제기 되어왔다. 만일 인간이 자연의 뜻에 따라 자연과의 경계가 없이 살아왔더라면 환경문제쯤이야 생기지도 않을 문제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환경문제의 원인을 말해오고 있지만 그것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삶이 자연의 그것과 매우 다른 점에 환경문제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각기 표현방법은 다를지라도 자여의 일부분으로 살고 있는 인간이 자연의 뜻과는 너무나 이탈된 삶을 살고있음에 많은 논자들의 공통된 결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환경문제란 자연의 삶과 인간의 삶간의 갈등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갈등인가? 우선 이 물음에 대해 단적으로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자연과 그 경계를 구분하기 위하여 시도한 노력이 참으로 많지만 자연은 인간에 대하여 특별한 경계를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 경계란 본디 설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 다만 인간의 살이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경계가 설정된 듯이 여겨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본디 경계가 없는 것이라면 갈등은 웬 갈등? 그러나 왕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바로 이 왕 갈등이 우리들이 겪는 환경문제이고 이 갈등 구조를 가장 첨예하게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경제학적 논리와 생태학적 논리의 비교이다. 전자의 경제학적 논리란 바로 지금 현재 인간의 삶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것이고, 후자의 생태학이란 자연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추구하는 가치관의 갈등이다. 우선 경제학의 기본 가치관은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올려야 하는 효율의 논리에 있다. 효율만 올릴 수 있으면 최고이지 여기에 무슨 도덕적, 윤리적 판단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덕적 판단일랑은 경제논리에서는 귀찮은 존재가 되어왔고 이러한 문제는 사회교육이나 도덕강좌 등을 통한 다른 측면에서 별도의 방법으로 충족시켜야 할 문제이지 경제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가 추구해온 삶이 경제적 논리에 의해서 지배 받아 왔기에 우리는 이렇게 별도의 방법을 통하여 교육을 받아왔을 것이 건만 그로 인해서 경제윤리와 도덕까지 실현되어 왔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나 생태계의 삶의 모습이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세계에서도 효율을 추구하되 우리가 추구하는 그런 것이 아니며, 그들의 본질적 가치는 「가능한 한 최대 다수가 다같이 최대 에너지를 수용하기 위하여 발전해 가며 또한 가능한 한 이 최대 에너지 상태를 충족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에너지만 사용한다」하고 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효율이란 내 것 챙기고 거기다가 또 밖에서 더 찾아 와야 자기의 효율이 극대화되는 것으로 알지만 자연계의 효율이란 내 배 부르면 거기서 그만이고 배부른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 또 가질 수 있는 것을 그저 최대로 활용할 뿐이다. 예컨대 먹이에 비하여 구성원이 많으면 반드시 구성원의 일부가 도태되어야 하고 혼자 독식을 하려는 자는 집단에서 유리되어 비참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또 하등한 상태에서 고등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위계질서와 먹이사슬망이 형성되어 모든 생물이 스스로의 범위와 한계를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이러한 노력들은 가능한 한 최대다수가 다같이 살기 위한 방편이고 지혜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절약정책을 쓰며, 그들 스스로의 삶이 그 절약 정신에 이미 동화되어 있다. 그러나 어디 우리사회란 그러한가? 철저한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고 효율 최고주의를 내세우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인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경제법칙을 가장 잘 만족시키는 사람이며 경제학은 이런 사라을 최고로 칭찬해 주고 있다. 둘째는 안전성과 균형의 문제이다. 시장경제체제에서 안정성이란, 수요와 공급의 탄력성으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즉 가격의 변동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 시장체계가 얼마나 균형 잡힌 상태인가?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경제체계에서 가격이란 모든 것이 통제수단이 되기 때문에 이것의 변동에 따라 모든 것이 左之右之되고, 역으로 가격이라 하는 놈이 모든 것을 쥐고 흔들지 못할 때는 시장의 기능이 상실된다거나 다름이 없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아주 사소한 생필품에서부터 원래 가격의 개념이 아예 형성될 수 없는 고도한 부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에 걸쳐 가격의 영향권 안에 들지 않고 살아본 적이 없다. 이렇게 가격의 기능이 심화되다 보니 우리는 자연과의 만남에 있어서도 가격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대하게되고 자연이라는 것은 이미 사고 파는 거래의 수단이 되어있다. 원래 경제학에서도 환경재(물, 공기, 토양등)에 대해서는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이라는 고유의 특성으로 인하여 가격이 부과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오염이 심화될수록 쓸만한 환경재가 점점 희소해가니 이제 환경재가 그저 무한히 존재하고 누구나 쓸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이제 환경재에 가격을 부과하고 환경재를 이용하려면 돈을 내고 이용토록 하게 되었으니 환경오염을 통제한다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가격의 통제 기능이 경제학적으로는 매우 합리적인 것임에 틀림이 없으나, 물과 공기까지 사고 파는 판국에 이르렀으니 이것의 파장효과가 미적, 도덕적 기준으로까지 확대된다면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그러나 이미 이것은 사실이고 현실문제로 부각되었다. 이를테면 효도를 하는 데도 효도관광을 몇 번 보내드렸느냐? 남녀의 사랑을 표시하는데도 일주일에 얼마나 많이 외식과 쇼핑을 하게 했느냐?를 가지고 결정된다면 그 또한 딱한 일일 것이나 경제학에서는 이런 문제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 문제는 사회교육이나, 학교에서의 도덕교육이 담당해야할 별도의 문제로 볼 뿐이다. 경제원리에 온 생애를 지배받다시피하는 우리들은 솔직히 도덕의 문제와 경제의 문제 중 어디에 더 마음을 두는가? 또 무슨 일이 도덕시간 다르고, 경제시간 다른가? 이것이 또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자연 생태계에서 안정성이란 계의 구성요소가 얼마나 다양하고 상호의존적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물론 시장에서도 수요와 공급이 다양하고 상호 의존도가 높을수록 가격에 대한 탄력서이 높아져서 전체적인 안정성은 더 높아진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나 생태계의 그것만큼 사람들 사이의 상호 의존도는 긴밀하지 못하고 개인의 이익에 급급하기 때문에 분배의 불균형, 기아문제, 개발 불균형의 문제들을 초래하게 된다. 또한 생태계의 균형이란 무엇보다도 먹이사슬의 균형이 생태계 균형의 가장 우선적인 과제이다. 즉 먹이사슬의 균형을 빼놓고는 절대로 생태계의 균형을 논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먹이 사슬의 일부분이 급격히 증가했다든가? 또는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면 자연계에 산출된 소위, 순환되어야 하는 물질들은 어느 한 순간에 급격한 정체 상태를 초래, 생태계 내의 최적 배분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자연계로부터 마음껏 폭식을 해대는 인간의 형태는 사막화를 발생케하고 열대의 원시림이 무너져 내리게 하여 먹이사슬에 교란이 생긴다면 인간은 철저히 생태계라는 시장에 독점자본을 형성시킨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명백한 갈등이 아닌가? 셋째, 적정상태 및 지향목표의 차이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적정상태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상태로의 변화되는 것을 말하고 이것을 생태학적 개념과 관련시켜 말하자면 「생산량/생체량의 효율이 극대화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신의 욕망을 최대로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연계가 가지는 생산구조의 양(생산할 수 있는 능력=생체량)을 뿌리채 뽑아내어 최대의 생산량을 올리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제계에서 추구하는 것이 생산량/생체량 효율의 극대화라면 생태계에서 추구하는 적정상태란 반대로 생채량/생산량 효율의 극대화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자연계는 그 스스로의 자원보존과 안전성을 위해서 스스로의 생산량보다도 생체량을 극대화시킬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계로부터의 약탈을 최대한 방지해야 스스로 살 수 있다는 논리인데, 생태계 입장에서는 얼마나 당연한 일이겠는가? 여기서 인간의 과오는 무조건적으로 그들이 필요로하는 생산량을 극대화시키려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연계의 생체량(생산구조)이 지금 어느 상태인지도 구별해 내지 못하는 데에도 더 큰 문제가 있다. 그 상태가 인간에게 자원을 공급해 줄 수 있는 힘센 성인의 상태인지 그런 능력이 전혀 없고 자기 살기도 바쁜 유아의 상태인지 도무지 구별이 없고 힘이 센 자연인지 원래 가냘픈 자연인지 도대체 막무가내이다. 무조건 채찍을 가해 더 많이 토해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생산량을 극대화 시키려하는 것은 스스로의 안전을 위한 생태계의 몸부림인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갈등이다. 결국 말이 없는 자연은 인간의 목적에 무릎을 꿇고, 인간은 이자는 물론이요, 원금까지 착복하려는 심산(心算)으로 눈이 뻘게져 있는 것이다. 한편, 지향목표라는 측면에서도 경제학에서는 인간의 만족을 극대화 하기 위한 한정된 자원의 최적배분에 있고, 생태학에서는 생체량을 최대로 보존하기 위한 천이와 순환의 안정성에 있다. 다시 말하면, 생태계의 경우 그것이 발달되어 가는 과정, 즉 천이라는 것이 그 스스로 더 많은 에너지를 구축하기 위한 그릇을 키우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릇을 키운 만큼 안정을 담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계(=경제계)의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키워야 할 그릇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욕망과 쾌락의 극대화를 위한 「생산-〉분배-〉소비」의 구조를 더 크게 확대시켜 나가는 것이 「생태계의 그릇」과 맞먹을 수 있는 개념일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생태계의 그릇과 유사한 형태의 그릇을 찾는 길이 스스로가 가장 안정해지는 그릇을 가지는 길이다. 이를테면 자연의 그릇에 넘쳐나는 양만 인간이 가져온다면 자연도 스스로 최대한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만족하고 인간도 원금은 항상 은행에 예치해 놓고 이자만 따먹는 꼴이니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이것이 비록 뺏아먹더라도 영원히 뺏아먹을 수 있는 길이니 어느 것이 안정된 그릇을 확보하는 길이겠는가? 우선 더 많이 먹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에 원금까지 빼 먹으려 한 것이 바로 인간의 과오요, 환경문제라는 것이다. 가장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삶은 생태계의 일부라는 点이다. 그러나 이 사실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날고 뛰면 생태계의 일부에서 전부로 위치가 급등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라는 인간적으로 소박한 의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문은 그야말로 인가의 철없는 계산일 뿐이라는 것을 生態學은 너무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생태계의 대원리를 生態學을 통하여 배우면서 날고, 뛰어도 바로 그 안이라는 걸 깨닫고 보니 그 동안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의 삶의 양태를 규정지어왔던 경제계의 논리는 계산상으로는 그럴싸 하지만, 그 이면에 깔린 전제조건이나 개념들이 생태계의 모습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이런 사실에 주목하여 이번 이야기에서는 환경문제의 현실적이면서 본질적인 이해를 위하여 경제계의 논리와 생태계의 논리를 개념적으로 비교, 분석해 보았다. 그런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적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첫째, 경제학의 새로운 모습은 자연적. 생태적 한계를 극복하면서까지 경제적 논리를 확장시키려 하지 말고, 자연의 한계를 일정 정도 경제계 내에 담보해서 생태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경제학이 되어야할 것과 둘째,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가능성을 위해서, 엔트로피 법칙의 지배를 받는 구조적 모습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 엔트로피의 이야기는 다음호에서 하기로 한다. 중국의 맹자는 산에서 나무를 베어 쓰되 때에 맞추어 벌목을 하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목되 코가 성긴 그물만 쓰라 했다. 때에 맞추어 벌목을 하라는 이야기는 큰 나무만 베어 쓰고 어린 나무는 나중을 위해서 보호하자는 말이요, 그물 코가 성긴 것을 쓰자는 말은 어린 고기를 자아 먹지 말자는 말이니 이는 원금을 철저히 보호하고 자연의 이자만을 사용하자는 말이다. 인간과 자연의 경계지점을 현실적으로 잘 나타내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환경문제를 생각하며 너무 이상적인 자연관만으로 자연을 대할 수도 없는 것이니, 현실적으로 때에 맞는 벌목과 성긴 그물로 자연을 대하면 거기가 바로 경계지점인 것이다. 생태학은 타율적으로 강요된 효율의 추구도 없고 개체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효율은 더욱 없으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머리터지는 자본의 싸움도 또한 없다. 현대에 있어 시장경제 한계론자의 관점이란 적어도 그것이 환경문제와 관련된 것이라면 생태학덕 자원의 이용과 관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는 생각의 귀착점을 잃어가게 될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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