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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6 | [문화저널]
무질서의 질서 = 엔트로피
김태경/경인여자전문대 교수 (2004-02-03 15:43:46)
잘 되었다고 하는 영화 서편제에서 떠돌이 소릿군으로 나오는 주인공이 북 못치는 의붓자식에게 말한다. “북이라는 것은 춘하추동과 같은 것이어서 밀어주고 당겨주고, 한번 콱 웅켜줘었다가 풀어주고....하는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 거여....” 사실 판소리에서는 소리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그 소리를 더 감칠 맛 있게 재단해내는 사람이 고수인데 어떻게 재단을 하느냐면 밀어주고 당겨주고 움켜쥐고 풀어줌으로써 그것이 가능해지는데, 실제 북을 쳐보면 잘 느끼어진다. 여기 70도짜리 더운 물과 30도짜리 찬물이 똑같은 양으로 있다. 이 두 물을 섞으면 더운물은 원래 자기 온도보다 내려가고 찬물은 올라가서 합한 물은 50도 정도의 미덕지근한 물이 된다. 그런데 만일 물의 온도차가 혼합되지 않고 그대로 섞여만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거기서부터 세상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온도가 높은 물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에너지가 높고, 온도가 낮으면 그만큼 적은 에너지를 갖기 때문에 에너지의 흐름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야 되고 그 흐른 결과가 바로 50도짜리 물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흐름이 없었다면 공기의 대류나 지구상의 태양열에 의한 열평형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게 되고 따라서, 우리가 살 수 있는 지구상의 적당한 기온의 형성도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다시 말하면 모든 자연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과정속에 있게되고 만일 이 변화가 찰라의 시간이라도 중단이 된다면 거기서 세상은 혼돈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바로 엔트로피 이론의 본질이다. 과학적으로는 소위 열역학 제2법칙 에너지는 고에너지 상태에서 저에너지 상태로 흐른다는 바로 그 개념이다. 엔트로피 이론이 그 동안 위기상황을 암시해왔던 것은 바로 이 흐름의 중단을 암시할 수 있었던 점이다. 엔트로피 이론에 의하면 흐름이란 바로 에너지의 차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지구상의 에너지가 고갈상태에 이르면 에너지 준위의 차이가 없어지기 때문에 혼돈상태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70도의 물과 30도의 물은 서로 에너지의 차이가 있으므로 흐름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이 섞이어서 50도로 되면 그 차이가 없으므로 더 이상의 흐름이 없는 혼단 상태에 빠지게 되고, 아울러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에너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그 에너지가 일을 할 수 있는 그 에너지가 일을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고, 차이가 없다는 것은 그 에너지가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하며, 쓸모 없는 에너지로 전환됨을 말한다. 전 지구상에 온도가 전부 100도로 존재한다면 그에 해당하는 절대적인 양의 에너지는 잇지만 흐름이 일어날 수 없는 상태이므로 무가치하고, 불필요한 에너지가 되는 셈이다. 이를 혼돈 상태라 하는데 그 이유는 에너지가 그 준위차를 가질 때는 질서가 정연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지만, 그 차이가 없어지면 흐름의 원천이 없어진 꼴이 되어, 그야말로 아무일도 할 수 없는 무질서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엔트로피의 증가를 무질서도의 증가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에너지 준위가 높던 상태의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준위차가 없어져서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로 전환되어 가는 것을 엔트로피가 높아진다라고 표현하고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에너지를 소비하며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엔트로피를 높혀가는 꼴이 된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손가락 하나를 움직인다 하더래도 그것은 우리 몸이 가진 에너지를 사용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에너지 준위차를 좁혀가는 꼴이 된다는 말이다. 이같은 논리를 지구 전체차원으로 돌리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에너지는 한정된 것이라면 지구상에 발생된 모든 에너지 소비 행위는 지구가 가지는 힘의 원천을 줄여가기 때문에 결국 에너지 준위차를 좁히고 이는 지구 전체를 혼돈 상태에 빠트릴 수 있음을 암시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숨도 쉬지 말고 가만히 있지 않는 이상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막을 길이 없다. 이를 테면 엔트로피의 증가가 제로가 되는 경우란 순수 결정상태의 원자 구조는 엔트로피를 발생 시키지 않을 수 있는 정말 질서 정연한 구조뿐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아무리 미세한 변화라 하더라도 그것은 곧 엔트로피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변화는 곧 엔트로피다. 이를 환경문제와 관련시키면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엔트로피 다발생구조에서 발현된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된다. 걸어서 다니는 것보다 차타는 것이, 차를 타도 자가용을 혼자씩 타는 것이, 자가용을 타도 혼자 3000씨씨씩 타는 것이 더 엔트로피를 빨리 증가시키는 꼴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 환경문제가 생긴다. 역으로 악화된 환경은 엔트로피를 더 발생시키는 구조를 초래해 내기도 한다. 환경이 한번 악화되면 자연의 자연정화작용으로 깨끗해 질 수 있던 것이 인위적인 처리를 해야 되므로 여기에 동력이 들어가고 이 처리를 위해서 또 에너지를 소비하고..... 하는 식의 일이 꼬리를 물기 때문이다. 공동으로 생활을 해도 사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던 것이 각자 살아야 되고 , 거기다가 이기적인 삶이 더해지기 때문에 우리의 집을 둘러보면 그 중의 어느 것은 이웃과 공동으로 사용해도 될 것들이 있는데 각 집마다 다 있어야 되고 모두 이를 누리고 살아야되고, 그래서 모두가 황제요 모두가 왕비처럼 살아야 잘사는 것이 된다. 원래는 그저 간단히 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 즉 엔트로피가 문제화 될만큼 증가되는 그런 구조를 꼭 인간들이 원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지리산 천왕봉을 올라가 보지 않으면 저기 무엇이 있을까? 하며 궁금해하다가도 한번 다녀오게 되면 가봤더니 별거 아니더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천왕봉에 대한 동격이 있던 상태는 천왕봉과 나 사이에 질서가 잡힌 상태이지만 다녀와서 별거 아니더라 싶으면 나와 천왕봉은 동경의 관계가 무질서해진다. 가지고 싶은 것들이 다 가져지면 그에 대한 무질서가 형성된다. 거기서 또 다른 질서가 형성될려면 그 이상의 것이 아니고는 될 수가 없다. 어차피 인간은 모든 것이 무질서해져 동경도 꿈도 없어져버린 그런 상태에서는 살 수가 없고 또 다른 동경을 만들어내야만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는 어느 것에서나 마찬가지일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는 것이기에 당연하다고 자조해버리기 쉽지만, 문제는 인간의 욕구가 끝이 없다는 원론적인 이해를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형성될 수 있는 질서라는 것이 반드시 무질서를 수반하는 질서, 끝이 없는 일방통행적 질서를 추구해야만 하느냐는 것을 문제삼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질서를 찾아가는 것을 끝없는 무질서를 낳으면서 찾아갈 것이 아니라 뱉아놓은 무질서를 먹이로 삼은 그런 질서가 창출되어야겠다는 것이다. 다시 엔트로피를 따져보면 불가에서 말하는 諸行無常 동양에서 말하는 易이다. 즉 엔트로피란 모든 변화를 말하고 그 변화는 에너지 준위차의 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에너지 흐름구조 그것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자연의 이치에 당연한 것이며 없어서는 아니될 흐름이다. 우리가 에너지를 사용하고 그로 인해 엔트로피가 발생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에너지 사용 없이 어떻게 변화가 발생할 수 있고 거기서 엔트로피의 발생이 왜 없겠는가?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발생된 엔트로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절대 아니고, 시스템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오히려 발생된 무질서는 소진될 수도 있고 또 안 생길 수도 있다. 다만 문제로 제기한 일방통행적 엔트로피는 아무리 과학적으로 당연하더라도 현실적으로 환경오염이라는 엄청난 부산물을 야기하므로 그 흐름이 질서있는 재창조의 흐름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자연의 질서는 무질서를 질서로 이어주는 그런 질서이며, 질서와 무질서가 반복되어 연속적으로 질서가 성립되는 그런 상태이다. 그래서 질서가 무질서요, 무질서가 질서인 구별이 없는것같으면서도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의 질서인데 반하여 환경을 오염시키는 우리들의 질서란 계속적인 무질서를 낳는 일방통행형 질서추구라는 것이다. 이 무질서가 환경오염이다. 그것을 알자는 것이다. 이를 테면 판소리 장단에서와 같은 질서는 충분히 무질서를 먹으면서 질서를 창출해주는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아울러 우리는 미친 듯 일방통행형 장단에 춤을 추지만, 어디 판소리속의 장단만큼 재미있던가? 밀어주고 당겨주고 꽉 잡아 움켰다가 풀어주고.... 다시 밀어주고 당겨주고 움켜주고 풀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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