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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6 | [문화와사람]
그런일에 거, 너무 흥분하지 맙시다 『우리가 할 여성운동』에 대한 몇가지의 단상
오정요/전북여성운동연합 집행위원장 (2004-02-03 15:44:57)
잘 흥분하는 여자들 얼마전 일이 있어 한 대학의 총여학생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마침 점심 직후인 탓인지, 사무실은 꽤나 시끌벅적했다. 그럭저럭 인사를 하고 자리를 잡고보니, 예사의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총여학생회의 사회부장은 여전히 씩씩대고 있었고, 그 자리에 있는 남학생들은 빙글 빙글 웃고, 저 한쪽 귀퉁이에서는 여전히 공방전이 오가고 있고, 이럴때의 상황이란 늘 뻔한 것이었다. 누군가가 지독한 ‘반 여성적’ 인 발언을 했을 것이고, 이에 누군가는 또 그 ‘반 여성적’인 벌언에 대해서 정색을 하고 반발했을 것이고. 이에 패(?)를 오가는 공방전이 오가는, 뭐 매양 벌어지는 그런류의 씨끌벅적함이 한바탕 휩쓸고 있는 판이었다. 그날 그 자리 패싸움(?)의 발단은 〈깨끗한 사무실〉이였다. 점심을 얻어먹겠다고 총여에 들른 한 남학생이 “역시 여자들이 있는 사무실은 다르구나”한마디 던진 것이다. 자기 딴에는 깨끗한 사무실이며, 또 얻어먹을 점심도 있고, 그래 염치도 없고 하면서 던진 말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전운(戰雲)도 흐르지 않는다. 언제나 그 다음의 발언이 비화되면서 싸움은 시작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캐캐묵은 사고 방식이 있으니까. 백날가도 형네 사무실이 깨끗하지 못한 거라구”- 칼을 먼저 뽑아든 것은 사회부장였다. 그 다음의 얘기란 뻔하다. “캐캐묵은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말이다. 어쩌튼 여자가 청소를 잘하는 것은 사실이잖아?” “아니, 누구는 태어나면서 청소를 잘하라고, 삼신할매가 점지라도 해줬단 말야? 청소라는게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나 제 스스로 해야 할 ‘재생산 노동’의 성격을 지녔다는 것 몰라?” “글세, 다 좋다니까, 그렇지만, 여성운동 어쩌구 하면서, 느네는 언제나 꼭 〈현실적인 조건〉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더라구” 이쯤되면 싸움은 둘만의 싸움에서 패를 이뤄 진행되기 마련이다. “방금 ‘여성운동 어쩌구’했어? 하니 학생회의 간부라는 사람이 그렇게 말해도 되는거야?” “사실 그렇지 뭐냐?, ‘여성운동 어쩌구’하는 발언은 사과하지만, 그치만 너희들이 현재 우리의 조건을 너무 융통성 없이 해석하는 것은 사실이잖아” “그럼 형이 말하는 그 융통성이라는게 뭔데?, 순전히 그것은 현재의 조건을 변화 시켜보려는 의지가 없다는 얘기 아냐? 도대체 언제까지 그 〈현재의 조건〉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건데? 저래서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는 거야” “그렇게 확대 해석하면 어떻게 얘기를 할 수 있냐?” “확대 해석한 게 누군데?” . . . . . . . 따지자면, 어느 것 틀린 말 없고 사실 그렇다. 우리 시대에 여성운동을 함에 있어, 혹은 그것을 해석함에 있어 따지고 들자면 어느 하나 틀린 말 없고, 무엇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다. 굳이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면, 분명 나 스스로도 여성운동 ‘어쩌구’하는 데서 10년 가까이 일을 하고 있는 자이니, 여성의 입장에 서야 하겠지만, 그리고 또 간혹 그러한 논쟁에 어쩔 수 없이 끼여 곤혹스러운 전쟁을 치루기도 하지만, 언제부턴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은 “아이구 또 시작이구나”이다. 그리곤 되도록 이면 이러한 싸움으로부터 피해가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 이유는 그렇다. 내가 믿건데, 그러한 논쟁이 아니라 전역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설령 밥까지 굶어가며 일어난다 해도, 근본적인 데에 있어 우리 여성의 현실이 바꿔지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오해없기를.) 또한 그렇다. 그러한 논쟁과 전쟁이 진실로 내가 하는 여성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거나 발전해 나가는데 도움을 준 경우가, 적어도 나에게는 없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내가 하는 여성운동이라는 것이 ‘매앙 남자하고 일이나 나눠하자며 악바리쓰는 일’로 천박하게 해석되는 결과가 있을 뿐이었다. 사실 내가 하는 여성운동은 분명 그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은 우리사회가 〈여성운동〉이라는 것에 들씌어 놓은 교묘한 장난에 힘입어 그렇게 된 탓일 터이지만, 아무튼 결과는 그렇다는 얘기다. 이런 여성, 이런 여성운동은 어떤가? 따지자면 무엇하나 중요하지 않는 싸움이 없고, 어느것 하나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 없건만, 그래서,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아직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논쟁을 앞에 하면 자꾸만 “지금 우리가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는가?”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곤 언제나 그런 논쟁을 듣다보면 생각나는 여성들이 있다. 먼 나라의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내가 말할려고 하는 여성은 ‘알제리의 여성들’과 ‘중국의 여성들’이다. 프랑스로부터의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던 때의 알제리 - 그때 프랑스는 알제리 여성들을 〈베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얼마나 옳은 얘긴가? 아무리 따져보고 따져봐도 우리 여성이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할 만큼 ‘중죄인’이 아닌 바에야 프랑스인들의 처사는 알제리 여성해방운동에 은인이라 할 것이다. 그 해방감에 만족해야 하는 시간이 짧게 지나고, 그러나 알제리의 여성들은 어느날부턴가 〈베일〉을 다시 뒤집어쓰기 시작했다. “여성은 죄가 많아 하늘을 볼 수 없다”는 그 논리에 다시 침잠해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인가? 그 때부터 그 여성들의 〈베일〉은 민족해방운동에서의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해방이 아무리 달콤하다 해도, 그것을 ‘프랑스’가 주는 한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근거였다. 설령 우리가 〈민족성〉을 지키는 길이 ‘지금’가장 중요하다는 그들의 외침 - 사실 그렇다. 그것은 ‘자신들이 할 여성운동’에 대한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해방은 누가 주느냐가 중요하다느 원칙이 새삼 호나기되는 대목이다. 그것이 어찌 〈굴종으로의 침잠〉인가? 또, 중국혁명기의 여성들은 그랬다. 혁명의 한창 시기, 여성들은 ;혁명가의 얼굴‘을 수놓는 일에 대규모로 조직되었다. 물론 스스로 말이다. 우리 시대 여성해방운동의 한 모델을 제시한다 할 중국의 여성해방운동에서 이러한 실천이 있었다는 것은 조금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70년대, 이들은 방문한 프랑스의 한 방문자가 물었다. “여성들이 수를 놓는다는 것은 소위 말하는 〈성별 분업 - 여성의 노동력을 차별하는 것으로의 분업〉을 인정한다는 것인데요?” “그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지요? 실제 우리는 우리의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 우리들이 현재의 조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을 뿐인데요. 우리가 혁명가의 얼굴을 수놓는 것이 우리의 ‘혁명’에 반하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그리고 ‘혁명’에서 요구되는 역할에 충실한 것이 ‘우리가 할 여성운동’에 반하는 일이었단 말인가요?” 우리가 할 여성운동은? 먼나라의 얘기고, 또 시대는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그 변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솔직히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고, 좀 더 원칙적인 면에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렇다. 우리가 할 논쟁, 우리가 할 여성운동은 어쩌면 좀 더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막연하지만 그런 생각이, 그렇고 그런 식의 논쟁이 진행될때마다 드는 것이다. (내가 반동인가? 그러나 사실 따져보자면, 그런 논쟁은 ‘우리가 할 여성운동’에서 빗나가 있는 게 사실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진정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 이 세상에 남자고 여자고 모두 같아져 버린 세상이 아닌 바에야, 또한 지금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이 〈우리를 가르고 있는 성별 분업〉 그 자체가 아닌 바에야 더욱 그렇다. 지금 당장의 문제는 〈우리 여자들이 하는 일 - 그곳이 공장이든, 집안이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지, 결코 〈성별 분업〉그 자체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또 이 말을 ‘청소는 원래 여자일이다’는 말로 해석한다면 다시 또 곤란해지고 말지만 말이다. 단지, 현재 요구된다면 다시 검은 베일을 뒤집어 쓸 만큼 자신있는 여성운동을 할 수는 없겠냐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인데...) 결국 그날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그런 일에 거, 너무 흥분하지 맙시다”가 전부였다. 마친 그날 내가 들고 간 토론 안건은 「쌀싸움」이었다. 주제는 물론 「이 나라 쌀독 - 이제 여성이 지킵니다」였고, 다행일까? “그 입장은 여성이 가사노동의 전담자라는 논리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냐?”라고 묻는 여학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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