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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7 | [문화시평]
새로운 삶의 현실을 향한 창조적 힘 송 만 규 전을 보고
이 영 호/전주 한일신학교 교수 (2004-02-03 15:59:54)
여름에 들어서고 있는 우리들에게 선 듯 다가선 화가가 있다. 조용하지만 밝은 빛을 지닌 연작소설 이야기처럼 펼쳐진 화폭들을 들고 나타났다. 그것은 서울과 전주에서 열린 송만규전의 주인공이다. 한 화가의 우리 ‘숨결 가까기’에 살고 있었던 일을 잊고 살정도로 우리는 오랜동안 각박한 시대를 살아온 것인가? 예향이라 하지만 실은 묻혀버린 전주 이곳에는 손꼽는 화백들이 나름대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들은 왜 우리와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들은 우리들의 삶의 숨결을 듣기에는 너무 먼곳에 서 있다. 어렵게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건강성을 그들은 볼 수 있었는가? 퇴락해가는 전주근교중인리 농촌의 삶에 눈길을 돌렸던가? 백여년전의 몸소 약제처방으로 중생을 건져보려고 증산선사가 자리잡을 수 밖에 없던 용머리고개 완산동 좁은 골목에 사는 여인의 웃음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부활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는 동학농민의 의로운 삶에 마음을 둔 적이 있었는가? 불꽃뒤는 화덕곁에서 쇠를 달구는 노동의 비애와 건강을 화폭에 담을 수 있었던가? 그것은 우리들 민화의 옛 이야기 일뿐인가? 80년대 이후 소용돌이 치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아울러 엉켜 살아온 이들은 오늘의 이 화가를 기억하고 있다. 그가 왜 오랜기간 절필하듯 불을 내려 놓았는가룰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 그가 내려놓은 붓을 다시든 것이다. 개방사회가 찾아왔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대선을 통해 좌절의 역사를 경험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 그러나 이 늪 속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주변적인 일로 취급받아온 그림의 세례에서 가장 앞서 좌절의 옷을 벗는 몸짓이 시작되었다. 화가는 일찍부터 이일을 시작했다. 모두가 좌절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희망을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뼈만 앙상했던 판화그림들에게 숨을 불어넣기 위해서 일까? 화가는 지난해 겨울이 시작되기 전부터 출발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좌절의 역사가 닥아올 줄 알고 있는 듯. 한 화가의 부활한 몸짓으로 우리는 다시금 비관과 좌절의 시대를 극복하는 지혜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유난히도 큰 화가의 껌벅거리는 눈, 도저히 증오심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웃음에서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발견해야 했다. 우리는그림을 보고서야 그의 숨겨진 힘과 그의 역사 읽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8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는 민족, 민주 연합운동의 피나는 싸움의 소동들이 한 복판에 서 있었고 농민, 노동자. 학생, 교사 그리고 여성운동의 숨결소리를 들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견디기 어려운 시대적 압박속에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려간 인간상을 발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구겨진 장에서 참아내기 어려운굴종과 허탕과 무위를 체험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 속에서도 인간과 역사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떨쳐 낼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어두운 질곡 속에서도 굳굳이 걸어온 수많은 사람들의 신선한 숨결이 있음이 이번 전시회에서 드러났다. 화가의 애정에 찬 눈길을 통해서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로 우리 앞에서 꿈틀거리게 하고 있다. ‘용접공’‘대강간’‘귀가하는 노동자’를 통해서 우리는 노동의 건강과 힘을 별견한다. ‘환산동 당숙모’에게서 도시빈민의 튼튼한 웃음을, 타들어 가는 담배를 물고 앉은 산노인의 솟아오른 건장한 핏줄에서 이 땅의 농민들의 혈맥을 찾아 낼수 있다. 화가는 이러한 숨결들이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려 준다. ‘민들레’ ‘억세풀’ ‘들불’로 이어져 백년전 이땅에 역력했던 동학농민전쟁에서 솟아오른 투쟁의 혈맥에로 우리들을 접목하고 있다. 죽음의 세력과 대항하는 오늘의 몸부림을 어제의 농민전쟁과 접합하는 역사공부 방식을 우리에게 학습하고 있다 ‘딸과 찾은 고택’ ‘백산은 저기인데’‘섬진강’의 화폭은 이러한 역사 읽기의 표적들이다. 얼마전 한판 굿으로 펼쳐졌던(진도 씻김 굿)의 신명남이나. 전교조 교사들이 전개한(동학 농민전쟁 답사운동)의 전개,(김개남장군 기념비 건립)은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결코 개인의 사적인 일로 끝이 나고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이 지경은 어제와 오늘의 역사가 만나 생명을 살려내는, 일으켜지고 있는 조짐으로 가득차 있다. ‘입암산 앞’의 눈부신 들판에 휩싸여 오롯이 서있는 농민, 이수금 의장의 얼굴에서 우리는 민족, 민주 민중 운동에 헌신해 온 틍올열사 조성만, 노동동지 박복실, 그리고 수배와 수감과 삶의 빼앗김으로 수난당한 농민, 노동자, 학생, 교사 여성들의 밝고 건강한 얼굴을 본다. 공동체의 경험속에서 이제 우리는 하나의 희망과 가능성을 일구어 냈다. 그것은 역사변혁운동이 한몸으로 나타나는 리얼리즘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화가 송만규는 김용택 시인의 말처럼 80년대 역사현실에서 그림의 현실로 돌아 온 것이 아니라 다시금 ‘세상에 그림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주변으로 동아간 것이 아니다. 둥우리로 돌아 간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날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현실에 다시금 살아나게 하는 예술운동이 물밑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우리 저항이기도 하다.「민미련」의 고난 당한 통일열망, 그리고(민족해방 운동사) 걸게그림에서 펼쳐진 구원사적체험은 이제 다가오는 동학 100주년을 맞아 지역을 넘어선 예술연대운동으로 확산되고 열매맺혀 가고 있다. 얼마후 우리앞에 펼쳐질 화폭은 민족역사와 민중과 땅의 역사가 사랑에 넘치는 정서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 송만규의 그림 동지들은 혈연적 관계를 뛰어넘은 글자 그대로 동지애로써 그들이 실제로 체함한 광주민중항쟁, 극란한 분단극복과 민족 통일의 체험을 현대사의 고난과 희망이라는 건강한 정서로 엮어내는 작음을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크나큰 민족의 서정이 될 것이다. 이러한 미술운동의 서정성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희망의 힘을 불러 일으켜서 새로운 삶의 현실을 창조해 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 곁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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