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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8 | [특집]
민족문학 수립의 새로운 가능성
김영진/문학평론가 (2004-02-03 16:23:42)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연합국의 승리, 전쟁의 종결 등 숨가쁜 역사적 고비에서 우리 민족에게 해방은 왔다. 끈질진 우리 민족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해방이 우리의 힘으로 쟁취된 것이 아닌 타율에 의해서 그저 얻어진 것이라는 자학적인 해석이 있지만, 당연히 우리 민족에게 와야했고 해방은 필연적인 것일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독립을 획득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주어진 것이 되고 말아 해방은 되었지만 이데올로기에 있어서는 좌우익 대립과 남북분열이라는 비극을 초래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우리의 이상과는 달리 남은 미군이 북은 소련군이 지배하여 또다시 군체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박종화가 “대조선의 봄ꡓ에서 조선의 봄을 노래하였지만 감상적인 노래만으로는 현실적인 해방의 의미를 바로 볼 수 없었고, 또한 심훈이 그의 시 “그날이 오면ꡓ에서 표현한 해방의 기쁨, ‘삼각산이 일어나 등실등실 춤’추지도 않았고 ‘한강물이 용솟음ꡑ 치지도 않았다. 따라서 해방의 의미가 단순히 일제식민지 체제하에서 벗어났다는 일차적인 의미보다는 미군정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 해방이 우리 민족사에 있어 남북분단을 고착화 시켰고,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였다는 점이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우리의 현대사에 있어서 해방 공간이란 시대적 성격은 많은 복합적인 문제 를 우리의 현대사에 제공하고 있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인 측면에서이든 아니면 부정적인 측면에서이든 간에 지금의 현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 해방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회 의적인 경향도 없지 않다. 그것은 해방이 단순히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로만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1945넌 이후 정부가 수립되기 전 3년의 기간은 우리에게 해방의 기쁨과 민족분단이라는 고통을 동시에 맛보게 했던 시기였다. 그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분단이라는 역사적 고통의 굴레가 시작되었고, 자주적 민족국가를 세워보기도 전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냉전논리의 외적인 조건에 편승 우리 민족의 내적인 이질감을 심화시켜 오고 있다. 결국 해방과 분단이 이질적인 것이 아닌 동일한 문제로 파악되어야 한다면, 그 원인과 평가문제는 지금의 현실이 해결하여야 할 과제로서 우리에게 부여된 중요한 책무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반공이데올로기적인 시각에서 통일지향적인 진보적인 눈으로 해방의 새로운 의미를 규정하 고, 당시 문예조직기구나 미묘한 해방공간의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문학활동의 전개과정 등의 규명이 전제될 때 해방공간의 문학론의 성격이 드러나리라 믿는다. 2. 해방이 되자 툰학인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일제문화잔재의 칭산이었다. 해방이전에도 문학활동이 없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가 일제식민지 정책에 동조한 문학이 아니면, 아예 식민지 현실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는 문학이었다. 그리하여 해방 다음날인 8월 16일 조직적 활동에 앞선 좌파진영은 모든 분야에서 주도권을 장악, 일제식민지 정책에 적극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한「조선문인보국회」의 간판을 떼어내고, 임회, 김남천, 이원조, 이태준 등을 중심으로 한「조선문학건설본부」(약칭 ‘문건’)라는 간판을 내건다. 그리고 곧 이들은 「문화전선」이라는 기관지를 내면서 자신들의 문학운동을 진행, 예술의 전분야를 장악하려는 목적하에 8월 18일 ‘조선의 해방’, ‘조선문화의 건설’, ‘문화전선의 동일’이란 슬로건을 걸고 미술, 음악, 영화건설본부을 끌어들여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켰다. 문건은 좌파측에만 국한하지 않고 범문학인들을 받아들여 해방공간의 문단을 휩쓸게 된다. 그들의 문학활동의 기본적인 입장은 문화에 있어서 철저한 인민적 기초를 완성하기 위하여 일제의 봉건적 문화요소의 잔재와 특권계급적 문화의 요소와 잔재, 그리고 반민주적 지방주의적 문화의 요소와 잔재의 칭산을 위하여 투쟁할 것을 천명한다. 이러한 노선의 결정은 이 시기의 문학 슬로건인 민족문학수립이라는 당면과제에 귀결된다. 그리고 그 목표의 실현을 위하여 당시의 혁명단계를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단계로 규정, 문학이념을 ‘인민의 문학ꡑ이라고 규정한다. 이후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문학ꡑ을 문학운동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과 대립하면서 해방공간의 문학운동의 올바른 노선와 정립을 위하여 그들의 조직노선과 대립하면서 문학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한효, 이기영, 한설야 등은 193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된 카프를 계승한다는 입장에서 1945년 9월 17일에 「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약칭 ‘프로문맹’)을 건설하였다. 그들은 9월 3O일에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다른 분야의 동맹을 흡수하여 「조선프롤데타리아예술연맹」을 결성한다. 이들은「예술운동」이라는 기관지를 발간 현단계의 문학운동의 이념은 프롤레타리아문학이라는 이념을 표방하면서 문건과 맞섰다. ‘프로문맹ꡑ의 조직은 문건의 조직활동의 불만으로 조직된 것이다. 프로문맹의 볼만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을 문학적으로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반혁명적이라고 비판하고 문학건설의 당면 기본과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문학의 수립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정책에 의거, 여운형의 장안파가 박헌영의 재건파에 흡수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1945년 12월 13일 문건과 프로문맹이 합류하여 문학가동맹을 조직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조직체를 조직하게 되지만 근본적인 이념에는 합치될 수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던 것과 같이「문건」과 「프로문맹」의 대립 분열은 문학운동 이념의 인식에 대한 시각차이가 그 원인이였다. 「프로문맹」은 ‘예술운동ꡑ이란 기관지를 통해 당의 과격한 투챙 노선에 비추어 일체의 비혁명적 요소를 배제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단계를 위하여 투쟁할 것을 주장, 「문건」을 반동적 기량주의적, 소부르조아적이라고 비판했다. 즉, 「프로문맹」이 내세운 프롤레타리아문학론은「문건」의 민족분학론에 내재되었던 계급성의 희석화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문학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문건」은 ‘문화전선’이란 기관지를 통해 「프로문맹」과 맞섰다. 「문건」은 과도기로서 반제, 반봉건이 조선혁명의 일차적 과제임을 밝혀, 계급 대신 민족을 내세워 박헌영의 8월테제를 수용. 계급적 토대가 되는 인민적 기초를 토대로 구체화되는 문학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프로문맹은 문건과의 투쟁에서 문건에게 주도권을 넘겨줌으로서「문건」중심의 「조선문학가동맹」이 조직되자. 우파진영의 순수문학에 대한 공격에는 일치했으나 조직체롤 운영하는 내부의 의견에는 늘 대립이 있었다. 이 내부의 투쟁대립은 더욱 심화되어 프로문맹의 조직원들은 월북하기에 이르렀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문건과 프로문맹에서 제기된 문학론의 대립을 오늘날의 민족문학적 시각에서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조직제에 관여했던 논자들의 문학관 특히 민족문학론에 대한 관점이 심층적으로 분석되고 총체적인 측면에서 이해될 때 이 시기의 문학운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있으리라 본다. 3. 이상으로 해방공간의 좌파문학운동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새로운 민족문화의 건설에 대한 요청에 가장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인 이 시기의 문학운동은 식민지 상황에서의 황폐한 정신의 문학활동을 극복하고 본격적인 민족문학의 수립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이땅에 열어 놓았다. 또한 분단이 정비되고 민족문학의 이념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밝힌 것도 이 시기의 문학활동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러나 좌파문단은 「문건」이나「프로문맹」 다같이 현실단계 인식을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단계로 인식하지만 서로 다른 문학이념을 내세워 그들이 세웠던 강령, 투쟁노선이 효과적으로 실천되지 못했다. 또한 미군정과 경찰의 대대적인 대탄압과 테러, 그리고 좌파문학활동에 우파진영 역시 적극적인 대응과 파괴공작으로 인해 좌파문단은 정부수립과 더불어 소멸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리한 좌파문단의 문학활동은 우리의 문학사에 있어 진보적인 문학운동이었음을 간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진보적인 문학운동도 정부수립과 더불어 자취를 감추고 우파의 문학노선이 일방적으로 문단을 장악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반공과 안보라는 체제 속에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이 된지 4O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 있어서 당시의 문학운동을 바라보게 될 때 과연 그러한 징치적인 상황에서 우파의 문학이나 좌파의 문학이 온바른 방향성과 지도성을 가지고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최근의 이 시기에 대한 문학연구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외적인 조건으로 인한 일정한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는 점이 사실이다. 해방공간의 문학운동은 문학 그 자체만으론 이 시기의 문학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 이 시기의 문학은 정치나 사회에 무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해방공간의 소용돌이를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공간외 문학은 정치적인 측면이나 미군정의 정책, 그리고 북한문단 등 종합적인 연구를 할 때만이 이 시기의 문학운동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본다. 8O년대에 들어서서 우리 문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시작되면서 해방공간의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문학외적인 힘의 논리의 중압감으로 구체성을 띄지 못하다가 8O년대말에 이르러서 월, 납북작가에 대한 대대적인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후에서야, 비로소 이 시기의 문학에 대한 자유로운 연구가 시작되어 많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결국 해방공간의 좌파조직에 활동했던 문학인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연구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의 문학사가 다른 한쪽을 기술하지 못한 반쪽의 문학사를 복원하는 의미도 있다. 해방공간의 문학운동을 올바르게 정리하고 평가한다는 것은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분단문학사에서 통일문학사로 나아가는 데 있어 우리의 문학사가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냐 없느냐를 결징짓는 중요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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