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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9 | [저널초점]
먹거리의 예속화와 수입쌀
윤덕향/발행인 (2004-02-03 16:48:04)
지난 8윌에는 금융실명제가 전격적으로 실시되어 절차상 긴급명령이 합헌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이국땅에 묻혀 눈조차 감지 못하던 독립유공자들의 유해가 건국 45년만에 고국땅에 안장되었고 조선총독부 청사가 헐리고 새로 국립증앙박물관을 신축한다는 발표가 있었으며 대전 엑스포가 개막되었다. 미홉하긴 하지만 전교조관련 교사들의 복직이 추진되고 현대계열사 노사분규도 타결되고... 끈질기게 내리는 빗 속에서도 한바탕 신명을 날릴만한 일들이다. 그러나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이루어진 지난 8월 백제기행은 마냥 신명을 날릴 수없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뿌연 빗방울 속에서도 드넓은 들판마다 희망처럼 푸른 물결이 일렁임에도 신명은 커녕 가슴답답함이 짓누르는 기행이었다. 여름장사가 망했다 해도 피서가 너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례화된 행사인판에 얼마나 망했겠는가? 그리고 망했다해도 내년에 듬뿍 바가지를 씌우면 될 것이니 걱정할 일이 아니다. 지루하게 내린 비로 농사를 망치고 몇년만에 예년에 없는 풍년소리를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운것도 아니다. 또 금년 농사가 흉년이라서 보리고개가 있을 때처럼 쌀 떨이질까 7걱정하는 것도 아니다. 쌀이 남아돌아 천덕꾸러기가 된지 오래이고 보면 한해쯤 흉년이 드는 것을 걱정할일이 아니다. 다만 추곡매입가를 둘러싼 농민들의 한숨이 일렁이는 벼포기마다 배어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고 쌀개방을 둘러싼 개방론자들의 목청이 한껏 높아질까 걱정인 것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금, 꿈에라도 그럴리는 없지만 흉년을 빙자하여, 질좋은 쌀을 국민에게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금년에 한해서만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쌀을 수입할까 걱정인 것이다. 각종농산물이 시장마다 집집마다 돌어선 지금. 흉년을 핑계로 우리네 밥상에. 조상님 제사상에, 기름기 잘질 흐르는 외국쌀이 올려질까 불안한 것이다. 천만부당한 불안이고 기우로 끝나기를 바라지만 한없이 치솟는 인기를 바탕으로 딱 한번이라는 단서들 입이 부르트도록 강조하며 어느 날 갑자기 쌀이 수입될까 초조한 것이다. 현재의 문민정부가 국빈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국가를 위한 회선의 방책으로 실명제를 단행하면시 각종 사정활동을 벌리면서 절차상 얼마간 문제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있다. 사소한 절차쯤 속을 후련하게 하는 각종 혁명적 조치를 위해서는 무시해도 될 법하지만 때로 절차가 중요하다는 것쯤은 우리네 소시민도 미루어 짐작한다. 사소한 절차를 무시하는 현재의 정부이기에 극히 예외적으로 대다수 도시서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어느 날 갑자기 쌀을 수입하지나 않을까 불안스러운 것이다. 그런 눈으로 보면 금융실명제가 단행된 얼마 뒤 발표된 농지에 대한 새로운 대책이 당연한 것임에도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대단위 기업형 영농을 위한다는 발표에는 농업경쟁력강화가 자연스럽게 뒤따르며 우르과이라운드에 대비하는 정책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언젠가 개방될 쌀 시장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그에 대처하는 방안인 것이다. 쌀 시장을 개방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구차하게 늘어놓지는 않겠다. 다만 쌀이 우리네의 주된 먹거리일 분만 아니라 우리 민족 문화의 근간이라는 것과 보리고개가 한창일 때 보리와 더불어 여름 양식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밀을 되돌아 보려는 것이다. 우리가 농사지어 만든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나 칼국수의 맛이 어떠했는지 나이든 사람은 알고 있다. 주린 배를 채우기에 허겁지겁 하던 시절이었지만 밀 특유의 향내와 맛은 요즘 발달된 각종 조미료와 향신료로는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보리밭과 더불어 늦은 봄이면 이 땅 곳곳에 넘실거리던 밀밭이,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이란 싯귀를 어느 외국인의 번역시로 알만큼 송두리째 없어진 것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쌀이라고 예외일 수가 있겠는가? 농산물만이 아니다. 컴퓨터 관련 소프트웨어를 선심쓰듯 무료로 제공하여 널리 보급시킨 다음 어느 날 갑자기 사용료를 받아가는 것이 저들의 수법이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저들보다 한술 더 떠서 어린 학생들의 불법복사까지를 단속한 것이 저간의 실정이다. 학생들의 불법복사는 저들 나라에서도 눈감아주는 일인데도 말이다. 정녕 어린 학생들에게 정직과 준법정신을 함양시키려는 눈물어린 배려가 있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광목으로 민족자본을 말살한 한말 일본제국주의의 수법을 오늘에 다시 보며 일본 순사보다 기승을 부리던 한인 순사보조원을 보는 느낌이다. 기업형 영농도 좋고 충분한 국제경쟁력으로 쌀시장이 개방되어 우리의 쌀이 미국이나 일본으로 수출되면 그 더욱 좋을 일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쌀농사에 기반을 둔 우리 민족 문화는 어디에 자리할 것인가? 어차피 산업화로 마지못해 명맥을 이어가는 전통문화에 대체할 새로운 문화는 어디에 있는가? 압구정동 오렌지족을 탓하고, 할 일 없이 돈만 많은 졸부들의 초호화판 생활을 비난만 할 것이 아니다. 지역 공동체 성원들이 더불어 살아야된다는 민족 문화의 기본적 틀이 해체되고 이를 대체할 가치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돌아보아야 한다. 오렌지 족이 부럽고 졸부들이 존경스러워서가 아니다.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한 우리네 전통 사회에서 볼 때 그들은 물질적 발전만을 향하여 국민을 내몬 군사정부의 충실한 모범생이었고 결과적으로 가치관을 형성하지 못한 희생자들인 것이다. 5. 16 군사쿠테타 집단이 보리고개를 없앤 것은 어쨌든 인정할 공적이다. 그런 한편으로 농경문화를 없애려 한 것은 씻지 못할 죄악이다. 서구에 가까운 외양을 갖추기에 급급하여 초가집을 없애고, 당산제를 없앤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문화적 기반을 없애고 자생력을 압살한 것이다. 이제 바다를 막아 드넓은 땅을 넓히는 서해안 시대에 단순히 쌀이라는 먹거리의 수입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쌀을 중심으로 형성된 우리 문화의 뿌리가 뽑히고 먹거리의 예속화와 더불어 해일처럼 밀어닥칠 그들의 문화가 두려운 것이다. 지금도 마을마다, 간판마다, 말과 글마다, 노래마다, 그림마다, 바보상자마다 안방을 차지한 그들의 문화에 행랑채마저 빼앗길까 가슴 답답한 것이다. 그러나 숨한번 크게 쉬고 보면 언필청 문민정부이니 추석날 수입쌀로 송편빚는 일은 없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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