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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9 | [교사일기]
법성포 아이
류혜원/고창중학교 교사 (2004-02-03 16:49:28)
산비탈 다닥 다닥 붙어 있는 집과 집 사이의 작은 골목길을 힘껏 아이를 쫓아 뛰었다. 아이 는 생각했던 것보다 빨랐다. “아, 저기 보인다ꡓ “성준아! 가지마-!” “성준아!ꡓ “성준아! 너 안돌아 오면 선생님 고창 안간다.ꡓ “성준아!ꡓ 난 털썩 언덕배기에 주저 앉았다. 벌써 세번째 가출이다. 아이는 언제까지 도망치려는 걸까. 바다와 산 사이 저쪽으로 해가 진다. 법성포의 해가 지고 있다 눈물이 난다. 왜 눈물이 나는 걸까? 그 아이. 성준이가 우리 반으로 전학 온 것은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달이 지난 후였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까만 눈만 반짝일 뿐 표정이 없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행복원에 산다고 했다. “반갑구나. 이름이 뭐니?ꡓ “김 성준요ꡓ “법성포에 살았었구냐ꡓ “............................” “고창에 처음이니?” “예ꡓ “아이들이랑 잘 지내자꾸나-ꡓ “.......................” 말이 없는 아이다. 교실에서 그 아이의 말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시선은 창 밖에 머물러 있기만 했다. 무언가를 쫓고 있다. 날으는 갈매기를 찾고 있는 것일까?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열까 고민하기도 전에 전학 온지 닷새 되는 날 첫번째 가출을 했다. 아이는 열 하루만에 행복원 선생님과 함께 고개롤 푹 숙인 채 내 앞에 섰다. 아이를 안았다. “왔구냐. 어디에 갔었니?ꡓ “법성예요ꡓ “다친 곳은 없니?ꡓ 고개를 들어 날 보고는 살며시 품에 빠져 나갔다. “성준아 힘들어도 참아보지 않을래? 선생님이 도와 줄게ꡓ 성준이에게 무언가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이 할 것 같아 칠판 청소를 맡겨 보았다. 성실하게 아주 잘했다. 결석이나 지각도 하지 않았고 말이 없는 것만 빼고는 외면상으로는 문제가 없이 지냈다. 행복원 선생님을 만나 보았다. 성준이 어머니는 삼년전에 술로 날을 사 는 남편과 어린 삼형제를 등지고 법성을 떠났고 아버지는 아내가 떠난 뒤 간경화를 앓다가 올 2월에 아이들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들은 바로는 제 어미를 죽 여 버린다고 할 만큼 아이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미움과 원망, 불신으로만 남아있다고 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거부감이,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아이에게서 웃음과 말을 앗아가 버린 것일까? 아이의 이런 상태를 말해주려는 듯 보름쯤 지난 후 두 번째 가출을 했다. 삼일후 법성 파출 소의 연락을 받고 행복원에서 데리고 왔다. 아이들 다그치거나 때리지 않았다. 그것은 해결 책이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성준아. 이곳이 싫지?” “선생님이 두려우니?ꡓ “아니요ꡓ “법성이 좋지? 다음에는 선생님이란 함께 갈까?” “성준아. 형아가 많이 걱정했어. 형에게 네 얘기 물어 보니까 말도 못하고 울더구나.ꡓ 성준이는 눈물을 뚝뚝 훌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손을 쥐었다. “성준아. 법성이 좋겠지만 법성엔 형, 너, 동생이 있을 곳도 너를 보살펴 줄 사람도 없잖아? 이곳에 행복원에 있는 것도 성준이가 앞으로 어른이 될때까지 잠깐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무슨 뜻인지 알지?” “.... 네.ꡓ 성준이가 학교룰 나오지 않자 아이들은 회의를 했다. 성준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이 무얼까 진지하게 이야기 했다. 먼저 말을 걸고 장난 하기, 점심 시간에 운동 함께 하기, 도와 주기... 이렇게 아이들답게 결정한대로 성준이를 한반 아이가 되게끔 노력했다. 정말 효과가 있었다. 성준이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도 가끔씩 웃는 모습을 보였고 집에 갈 때는 나에게 언사를 하기도 했다. 행복원에서도 아이가 좋아진다고 한시름 놓았다고 했다. 하지만 5월 이느날 아침 조회시간, 1교시. 점심시간이 넘어서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즈음 학교 관리자들은 행동불량자(?) 무단 결석자들에 대해 퇴학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성준이에 대해서도 이미 경고한 상태였다. 난 성준일 기다릴 수 만은 없었다. 기다린다는 것이 그 아이를 외면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찾아 나서지 않으면 영영 잃을 것 같았다. 교감선생님에게 갔다. “법성포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ꡓ “학교에 남아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세요. 포구에 흔자 나가서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류선 생에 대한 책임은 학교가 져야합니다. 교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생각하세요.ꡓ 답답했다. 관라자들에게 있어서 학교의 의미는 무엇일까? 교사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단절의 벽으로 느껴졌다. 그것 이 바로 교육 현장의 현실이라고 여겨졌다. 벽을 통과하기로 마음 먹었다. “다시 생각해 보았는데,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 반 전체를 위한 일입니다. 아이들도 성준이를 염려하고 있고 제가 다녀 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의 아이라면 제가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겠습니다” 성준이는 내 외침을 들어서였을까 법성에서 ‘숨바꼭질’을 한 그날 성준이는 바로 돌아왔다. 다음날 행복원 선생님에게 맞은 매로 벌겋게 피먹진 종아리를 나 또한 눈물로 때렸다. 아이와 약속을 했었기 때문이다.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며 “성준아. 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니?” 성준이와 나는 한참을 같이 울었다. 아이는 내 눈물을 이해할까? 이해했을 것만 같다. 이제 성준이는 다른 아이와 똑같다. 딱지치기, 개구리 씨름도 하고 슬쩍 아이들과 떠들고 장난도 한다. 교실로 복도로 뛰어다니며 쌈질도 한다. 시험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도 찌푸린다. “김성준---”하고 화난 목소리로 표정도 지어 보지만 그런 성준이가 그렇게 예쁠수가 없다. 그리고 내 아이들, 성준이를 찾게 했고 성준이를 배려해주는 나의 아이들이 고맙고 사랑스럽기만 할 따름이다. 방학이 반쯤 지난 8월 6일 터미널 대합실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나를 부른다 “선생님---” “그래. 오늘은 선운산 꼭대기에 누가 먼저 오르나 내기 할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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