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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9 | [특집]
전북지역 문화단체의 여름나기 제3회 동학농민혁명 시민강좌를 듣고
김정실/남원여고 교사 (2004-02-03 16:52:05)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넘사업회와 전북문화저널사는 “동학농민혁명 그 역사를 바로 알자ꡓ라는 주제로 8월 2일부터 7일까지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이번 강좌는 향토사학자, 대학의 연구자. 시인, 소설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입장과 관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왜곡이 뿜어내는 안개 속을 뚫고 사대의 핵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해주었고 그를 통해 주체적 실천 을 위한 참된 인식을 가져다 주었다. 첫째날의 강좌는 이진영 선생의 “동학농민혁명은 왜 일어났는가?”라는 주제로 동학농민혁명 발생의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직인 조건을 살펴봄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이진영선생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생배경을 사회 경제적 상황의 객관적인 조건과 동학이라는 종교적 관점의 주관적인 조건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즉 사회 경제적 조건으로 조선 후기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인한 농민계층 분화 전정 ․군정 ․환곡의 수취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농민부담과중, 일본과 청나라 자본의 침투로 인한 조선의 산업과 생산자의 몰락, 지방관의 부정부패 등 크게 4가지로 정리했는데 19세기 사회 경제적 조건들로 각 지역에서 수탈당하던 농민들은 의지할 곳을 찾아 헤매다가 동학에 입도 하게 되고 이를 중심으로 당시대의 모순구조에 저항하게 되었다. 둘째날의 강좌는 향토사학자 최현식 선생의 “동학농민혁명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라는 주제로 이루졌다. 지난해 시민강좌에서 고창문화원장 이기화 선생님이 이와 뜩같은 주제로 다른 입장의 무장기포설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을 강의하셨는데 최현식 선생은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을 1월의 고부농민봉기 단계, 3월의 백산봉기단계, 9월의 삼례봉기단계로 나누어 살펴본 다음 ‘전봉준 공초’의 기록에서 “고부기포ꡓ라는 용어는 있으되 “무장기포”라는 용어는 없음을 지적하면서 3월의 백산기포설이 무장기포설로 인정되기 위한 선결과제로 제시하면서 무장기포설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은 3월의 무장기포 단계와 1월의 고부농민단계로 혼동하여 기록한 오지영의 ‘동학사’에 근거하여 3월에 동학농민군은 고부에서 전면 봉기하였다고 잘못 알아왔다. 그러나 신용하교수의 연구에 의해 본격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는 장소는 고부(백산)가 아니라 무장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신교수의 무장기포설이 새로운 자료들인 “수록ꡓ,ꡓ임하유고ꡓ등의 발굴로 이제 정설로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인물은 누구인가?ꡓ라는 주제로 이루어진 세번째 강좌는 온힘을 다하는 박맹수 선생의 학문적인 정열을 만나게 되었다. 동학농민학명의 주체세력은 농민이라 한다면 이들을 지도한 주도세력은 누구인가? 라는 견해는 잔반주도설, 부농주도설, 빈농주도설 등으로 다양하다. 박맹수 선생은 동학농빈혁명을 주도한 계층이 동학의 대접주, 부농층으로 이루어졌음을 전제하면서 그 주도 세력의 실체와 그 성격을 교조신원운동의 단계, 고부농민봉기의 단계, 제 1차 기포의 단계, 집강소 통치기의 단계, 제 2차 기포의 단계로 구분하여 강의하였다. 1892-1893년에 전개된 교조신원운동은 동학농민혁명의 제 1단계로서 동학의 조직을 근간으로하여 동학교단 지도자들이 주도하고 동학교도들과 일반농민들이 참여하여 2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것이다. 고부농민봉기는 1894년 1월 1O일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제2단계로서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등의 주도로 이루어진 제한적 지역적인 항쟁이었다. 이 봉기는 온갖 학정을 저질러 탐관오리의 악명이 드높았던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조병갑 고부군수가 고부군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어 버렸던 사건이다. 제1차 기포는 전국적인 항쟁으로서 고부농민봉기를 주도했던 전봉준 등이 무장의 동학대집주 손화중의 도움을 받아 1894년 3월 21일에 봉기하는 단계이다. 집강소 통치기의 단계는 전주화약을 계기로 동학농민군들이 나주 운봉을 제외한 전라도 53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한 시기이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이해관계의 대립 등으로 인해 집강소 활동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천민들로 구성된 농민군들이 양반집 처녀에게 장가들기 등 과감한 폐정개혁 활동에 나서게 됨으로써 부민층의 이탈세력이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아이러니와 교훈을 얻게 된다. 혁명은 비합법적인 방법이나 폭동보다는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훨씬 크게 성장할 수 있음을 말이다. 1894년 9원 12일부터 12월까지의 제 2차 동학농민혁명은 항일투쟁기로서 청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일제가 경복궁 쿠테타를 일으켜 친일 개화정권을 수립하는 등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노골화하자 조선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 전봉준 장군이 삼례에서 기포하는 단계이다. 이 동학농민군은 1O월14일경에 논산에서 최시형의 영향아래에 있던 북접 동학농민군과 합류하게 되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 관군의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함으로써 계속 퇴각하게 되었다. 네번째 강좌에서 박명규 선생님은 “오늘 우리에게 동학농민전쟁 연구와 기념의 의미는 무엇인가ꡓ라는 주제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했지만 ‘민권’의 문제와 ‘외세ꡑ의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세력들이 격렬하게 대립하던 사건으로서 그 정신은 1905년 이후의 항일의병 활동. 1919넌 3월 1일 독립 운동, 국내외에서 전개된 각종 민족독립운동, 4.19 학생혁명, 1980년의 광주 민중항쟁으로 면면히 계승되어왔다. 8월 6일과 8월 7일에 열린 문순태 소설가의 “동학농민혁명과 문학ꡓ과 장효문 시인의 ”판소리 전봉준ꡓ은 동학농민혁명의 본질 혁명의 정당성을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박종권씨가 부른 판소리 ‘전봉준ꡑ은 어떤 애철함과 긴박감으로 나에게 깊은 인상음 심어주었다. 이런 공감대를 보다 많은 이들과 함께 했으면 하는 아쉬움 을 남기면서 오늘의 삶에 기반하여 백여년진의 역사를 사랑하는 이가 점점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을 적어본다. 아울러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ꡓ 중에서 떠오르는 구절을 덧붙인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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